#외전-운 좋은 남자(2)
'엥'
유리는 당황했지만, 다행히 멍청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경영 지원 본부에는 부서가 넷이었고, 부서마다 팀이 복수로 있었으며, 팀마다 과장이 두 명 이상 있었다.
원래도 비대했던 조직이 M&A 직전에 더더욱 커졌다.
솔직히 유리는 이번에 본부장이 바뀐 걸 구조 조정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굳이 미국에서 사람을 불러들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유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아닌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이 과장은 어떻게 아니라고 확신하나?"
뭐지, 이 사람.
왠지 시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유리는 욱하는 감정을 느꼇지만, 꾹 참았다.
대담무쌍함은 환불할 떄 발휘하는 것이지, 회사에서, 그것도 까마득한 상사를 상대로 하는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도 뭔가 분했기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남의 험담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세뇌했다. 사실 뒤에 할 말이 오백 가지쯤 더 있었지만, 애써 참았다.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남자가 잘생긴 턱을 쓱 쓰다듬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턱선이 취향인 게 눈에 들어오는 게 한스러웠다.
미남이란 대체 뭘까?
"그렇군. 험담은 아니지. 뒷담화라고 하나?"
"아이고,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당황하여 약간 늦었지만, 유리의 상사인 강 부장이 얼른 나섰다.
본부장은 굳이 그 이상 유리를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김 부장을 처다보며 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없나 보군."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과장이 능력이 출중해서."
"그런가?"
또 다시 시선이 유리에게 닿았다.
검은 눈동자인데, 흰자위가 맑은 탓인지, 아니면 눈매가 깊은 탓인지, 어쩐지 그 눈빛이 짙푸르게 느껴져서 유리는 괜히 속이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자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부장님. 아니, 이거 사실은 오늘 회의실에 사람들 모아 두고 알리려고 했는데 출근을 일찌감치 하셔서, 하하······. 참, 저는 기획팀 강성규라 합니다."
"저번에 보지 않았습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 부장."
그가 손을 내밀자 강 부장이 거의 황송해하는 태도로, 두 손으로 잡았다. 과연, 윗분들이 접대에 절대 빠뜨리지 않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영광입니다, 본부장님."
"그냥 에릭이라고 불러요. 이 이야기도 저번에 했던 것 같지만."
"어찌 감히. 말씀도 낮추십시오."
"감히라니요. 알고 있겠지만, 내가 미국 출신이라, 그렇게 위아래를 나누는 게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유리는 멀거니 생각했다.
'그런 것 치고는 한국말 너무 잘하는데. 나는 이 과장이라고 불러 놓고, 불편하고 어렵긴 무슨.'
일가가 한국계이고, 특히나 집안의 권한을 쥐고 있는 조부가 이민 1.5세대기도 하지만, 그가 일곱 살 떄부터 다른 친척들보다 훨씬 공들여서 한국어를 배우고 연습해 왔다는 사실을 유리가 편린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리 없다.
강 부장이 말했다.
"제가 사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벽이 따로 있군요."
에릭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유리는 그 순간 '으엑!' 하고 생각했다.
개방형 사무실로 가는건가. 지금도 본부장 집무실과 비서실 말고는 대부분 열려 있는데.
눈치 빠른 강 부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벽은 가벽이니, 원하시면 언제든 해체할 수 있습니다. 칸막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역시 요즘처럼 협업이 중요한 시기에는 오픈 오피스가 중요하지요. 오늘 저녁이면 충분할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 과장?"
왜 하필 나인가?
유리는 제일 가까이 서 있었던 게 저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방긋 웃었다.
그래도 짜증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미남은 실로 귀중한 존재였다.
물론, 짜증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오픈 오피스가 기껍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강 부장처럼 출세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가끔 그러는 것처럼 미친 짓에 도전했다.
"괜찮아요, 에릭."
어차피 안 된다고 말할 순 없었다.
원래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니까. 아무리 싫어도, 죽어도 못할 일은 아니다.
동료들도 여기서 본부장에게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못했다고 저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름을 부른 것은 소소한 불만 표시였다.
강 부장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어이, 이 과장!"
아, 왜? 미국인이니까 그냥 에릭이라고 부르라고 본인이 방금 말했잖아.
남자의 눈이 둥글게 커지는 것을 보면서 유리는 미묘한 쾌감을 느꼈다.
본인이 부르라고 해 놓고, 역시 부르니까 기분 나빠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다.
평생 그 방향으로는 주름이 잡히지 않았을 것처럼 매끈한 입가와 눈가가 시원스럽게 웃는 모양으로 접혔다.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짓말하긴, 이유리 씨. 칸막이 뒤에 있는 쪽이 더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면, 그냥 떠보신 건가요?"
"아니. 사무실 구조가 너무 폐쇄적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야. 어차피 전부 가벽이라면, 유리로 바꾸지."
블라인드를 달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이 폐쇄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도 아닌데 굳이 그걸 내며 둘 리가 없었다.
그러니 비서들은 직통으로 본부장의 시선 속에서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련했다.
유리는 묵념했다.
하지만 남을 가련히 여길 때가 아니었다.
주변과 인사를 모두 나누고 난 본부장은 유리의 책상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리 한정으로 이름에서 직책을 완전히 떼 버리기로 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유리 씨는 나랑 면담 좀 하지."
"네?"
이번에도 유리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설마, 이름 좀 불렀다고 면담을 하자는 건가. 뭐 이런 좀스러운 미국인이 다 있나. 본인은 대뜸 반말하는 주제에.
"왜? 싫은가?"
말투는 시비 거는 것 같았지만, 미소는 근사했다.
"그럴 리가요."
유라는 애써 굳은 얼굴을 펴고 대답했다.
본부장이 몸을 돌렸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꽉조인 듯한 허리가 눈을 안 내려도 보였다.
집무실까지 따라 들어가자 본부장이 책상 뒤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유리 씨는 하던 일 인수인계하고, 당분간 내 일 좀 돕지."
"전 비서가 아니라 기획팀 과장입니다만······."
"이유리 씨만이 아니라 팀마다 한 명씩 뽑아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할 거야. 비서와 별개로, 실무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네."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게 우선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본부장님께 보고드리는 역할이라면, 제가 아니라 강 부장님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절대 추가 업무를 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위계를 뛰어넘어 윗사람한테 보고해 봐야 좋을 게 없다.
위치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떠안고 있는 일의 양으로 보나, 강부장이 적임이었다.
하지만 에릭이 깊은 눈으로 말했다.
"내 밑에서 일하는 건 싫은가?"
"······아니요."
까마득한 상사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달리 필계 댈 만한 것도 없었고.
"그러면 결정됐군. 책상은 비서실에 따로 마련하라고 하지."
"알겠습니다."
결국 추가 업무 확정이다.
한숨이 나왔지만, 유리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유리 벽 너머로 저 미모를 감상할 수 있다면, 조금 즐거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조금 더. 목소리도 훌륭하고, 미소는 더 훌륭하니까.
아니 그 전에 상대는 재벌 3세였고, 본부장이었지만.
'아, 진짜 취향이네, 남자가 너무 잘생기면 얼굴값 하던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본부장이 또다시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외모가 유리의 취향이라는 것을 금세 파악한 게 분명했다.
반드시 효과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미소였다.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 대부분에게 취향일 외모긴 했다.
하긴, 자기 잘생긴 줄 모르는 미남은 유니콘이다.
환상 속에나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트럭 정면에 달린 환생 버튼을 누르게 되기까지, 한 달여만의 시간이 남았을 시점의 일이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