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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죽었다. (1/171)

1. 나는 죽었다.2021.05.05.

트로비카 대공비는 몸이 약하다. 론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제국의 유일한 대공비가 허약해 대공의 걱정이 하늘을 찌른다고.

16558446641287.png“쿨럭, 쿨럭쿨럭!”

16558446641326.jpg“아이참. 비 전하! 물도 천천히 드셔야 한다니까요!”

약해 빠져서 감히 소리치는 하녀에게도 뭐라 하지 못할 만큼이니까. 대공과의 결혼 이후 안 그래도 허약했던 몸은 곳곳이 말썽이었고 이 드넓은 저택에서 의지할 곳은 되바라진 하녀들뿐이었다.

16558446641326.jpg“어휴, 진짜 열불나. 전하, 물 한 잔을 마시는 데에도 온종일인데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16558446641287.png“먹을, 먹을 수 있어…….”

16558446641326.jpg“퍽이나요.”

그녀의 전담 하녀인 애니는 다른 하녀와 뭐라 속닥이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곧이어 다른 하녀가 가지고 들어왔던 식사 트레이를 그대로 침실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안 돼! 아드리엔은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지만 차마 소리 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귀족 중의 귀족이었고 음식에 체면을 벗어던질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뻔히 아는 애니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16558446641326.jpg“기껏 만들어왔는데, 전하께서 수저를 드실 힘도 없으시니, 어쩌겠어요?”

16558446641287.png“묽은 수프라도, 가져다주면…….”

16558446641326.jpg“안 돼요, 비 전하. 저번에도 다 흘리셔서 입고 계셨던 옷과 이불을 온통 버렸잖아요. 세탁방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세요?”

하지만, 그것은 너희의 일이잖아. 매일 두 번은 갈아입혀 줘야 할 옷도 일주일 넘게 갈아입혀 주지 않았고. 애초에 수프를 넘기지 못했던 건 말도 안 되게 짜고 혓바닥이 자글자글할 만큼 모래알이 섞여서이다. 게다가 애니의 말대로 아드리엔은 지금 수저 하나를 오래 들고 있기에도 벅찬 몸 상태였고. 마땅히 떠 먹여주고 입가도 닦아주어야 할 하녀가 팔짱 끼고 서서 얼른 먹으라는 눈으로 보고 있는데 잔뜩 주눅 들어 있는 그녀가 음식을 씹어 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16558446641326.jpg“비 전하-.”

트레이를 든 하녀가 나간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는 대공의 부관 짐스커였다. 아드리엔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16558446641326.jpg“전하, 대공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16558446641287.png“그, 그이는요?”

그를 뒤따라 들어오는 하인들이 선물상자를 몇 개씩이나 침실에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아드리엔은 선물보다는 제 남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결혼한 지 2년. 황제의 책사라는 칭호가 익숙한 남편은 신혼도 즐기지 않고 동서남북 국경 수비의 뒤처리에 차출되어 황제를 대신해 크고 작은 일을 살폈다. 아드리엔은 그런 그가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외로웠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익히 아는 짐스커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58446641326.jpg“수도로 귀환하시긴 하셨습니다만, 즉시 입궁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16558446641287.png“저택에는……. 콜록. 단 1분도 들르지 않고요?”

16558446641326.jpg“알현이 끝나면 곧바로 회의가 있으십니다만…….”

짐스커는 젊고 아름답지만, 병색이 완연한 아드리엔을 천천히 살폈다. 대공비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귀족의 기준으로는 ‘헐벗은 것과 다름없는’ 잠옷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황궁만큼이나 호화로운 대공저의 응접실에서 기품 있게 차려입고 그를 맞이해야 할 이 저택의 안주인이 말이다. 그런 예법을 차릴 수 없을 만큼이나 병이 중한 것이다. 그가 얼굴 가득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16558446641326.jpg“수도에서 하루 정도는 머무시고 다시 떠나시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6558446641287.png“부, 쿨럭. 부탁해요, 짐스커 경.”

아드리엔이 품에서 손수건을 급히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찬 기운이 방으로 들어오자 불현듯 기침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짐스커가 집사와 하녀들에 의해 내쫓기듯 침실에서 나갔다. 아드리엔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할까 두려웠던 사용인들이 그를 황급히 처리한 것이다. 갑자기 대공저가 분주해졌다. 북쪽의 영지를 살피러 갔던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귀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

16558446671809.png“이런, 잠을 깨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16558446641287.png“언제 왔어요? 당신이 오면 꼭 깨워달라 부탁했었는데…….”

16558446671809.png“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노에비안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자정까지 자지 않고 버티던 아드리엔이 끝내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잠에 빠지고 한참이 지나서. 노에비안의 다정한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아드리엔은 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자마자 그 품에 안겼다. 그리운 향기가 났다. 그가 피우는 시가. 방금 씻고 나온 로즈마리 비누 향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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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46641287.png“보고 싶었어요, 노아.”

16558446671809.png“나도 마찬가지야.”

그가 안겨드는 아드리엔을 마주 안으며 속삭였다.

16558446671809.png“나도 당신이 너무 그리웠어.”

16558446641287.png“선물도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자주, 콜록. 주지 않아도 되는데.”

16558446671809.png“당신을 보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날 잊을까 봐.”

노에비안이 다정하게 웃는다.

16558446641287.png‘아…….’

그는 다소 예민하고 서늘한 인상이었으나 웃을 때는 주위가 반짝일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아드리엔은 너르고 단단한 품에서 마음껏 그 얼굴을 훑었다.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았는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공녀였던 시절의 연애 감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16558446671809.png“사용인들이 당신 걱정을 많이 하던데, 피레타에서 보내는 약과 내가 보내주는 약 전부 잘 챙겨 먹고 있는 건가?”

16558446641287.png“……그, 그럼요.”

매번 그 약 한번 넘기기가 그리 힘들었다. 한 사람 몫의 행동조차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어서 하녀들에게 의지하고, 이 거대한 저택의 안주인인 자신은 그들의 눈치를 보고…….

16558446671809.png“항상 말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걱정 마."

16558446641287.png“……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누워 있을 수만은 없는걸요.”

대공비라는 자리는 명목상 제국의 황녀와 버금가는 높은 자리였다. 황족인 노에비안의 아내로서, 그녀 역시 황후나 황녀와 함께 어울리며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해야 했고.

16558446671809.png“어차피 제국의 모두가 알잖아, 당신의 몸이 약하다는 걸.”

사람들은 생각보다 관대해, 아드리엔. 노에비안이 길쭉하고 섬세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16558446641287.png‘정말 그럴까요?’

당장 제 주인을 모셔야 할 하녀들마저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내일 당신이 떠나버린다면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고 대공비인 내게 맞서 온갖 교묘한 폭언을 할 텐데. 황제께서 직접 보냈다는 그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16558446641287.png‘저택 밖의 사람들이 내게 그리 친절하고 관대할 리 없어요.’

건강이 악화된 지난 2년간 그녀는 끝없이 비관적으로 변했고, 무기력해졌다. 과거에도 몸이 약했지만 걷고 글을 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쉽게 지치긴 했어도 무도회에서 곧잘 춤을 추기도 했고. 우울해지는 그녀의 표정에, 노에비안이 잠깐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16558446671809.png“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누구든 그 목을 베어버릴 거야.”

그가 낮게 속삭였다. 아드리엔은 그 서늘한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애써 긴장을 떨쳐낸 그녀는 남편의 품에 다시 안겨 조용히 눈을 감았다.

16558446641287.png‘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요.’

몸이 약해 제 역할도 못 하고, 심지어 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도 마음을 얻지 못하고……. 대공비라는 신분은 거창했지만, 실상은 약해빠진 몸뚱이에 잠식된 나약한 정신머리. 그가 주는 사랑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은 너무 빈약했다. 다른 부부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는데, 남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어쩐지, 너무 비참했다. 노에비안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이면 무엇이든 선물하고, 황제를 대신해 온갖 곳에 불려 다니면서도 좋은 약이 보이면 값이 얼마든 치르고 제게 보내왔다. 완벽한 남편.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누워서 먹고 자는 일밖에 없는 그녀가 한참 아랫사람인 하녀들에게마저 우습게 보이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 같은 것을 어찌 할 수 있으랴. 귀족이 누군가에게, 특히 평민에게 얕보이는 것은 수치다. 그녀가 그 정도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걸 노에비안이 알기라도 한다면? 직접 눈으로 보기라도 한다면? 그의 말대로 하녀들이나 집사의 목이 댕강 베이고 동시에 겨우겨우 숨기고 있던 아드리엔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댕강 베일 것이다.

16558446641287.png‘몸부터 추스르자.’

나약해진 정신은 그만큼 약해진 몸에 비례한 것이었다. 건강을 되찾고, 집사에게 맡겨둔 집안일을 다시 잘 돌보고, 그녀의 일까지 떠맡은 노에비안에게서 다시 할 일을 찾아오고……. 그 생각만으로 아드리엔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눈이 감기는 순간까지, 노에비안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를 적셨다. 그가 그녀의 귀에 익숙한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다. 아기 오리 삼 형제. 그녀의 고향인 동부 피레타 아이들이 듣고 자라는 그 자장가.

16558446641287.png‘잠들고 싶지 않아…….’

아침이면 그는 없을 텐데. 다시 만나려면 몇 달이 지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가 없다면 그 누구도 내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을 텐데. *** 트로비카 대공저의 사용인들이 넓은 대공저를 달리며 수선을 떨었다.

16558446641326.jpg“어서! 어서 주치의를!”

16558446641326.jpg“맙소사!”

16558446641326.jpg“피레타 공작저에 연락을 넣어!”

2층 침실에서 유령처럼 지내던 대공비 아드리엔이 위독해졌다. 이전과는 달리 심각한 발작 증세가 멈추질 않아서, 줄곧 그녀를 무시하던 하녀들마저 사색이 되어 자고 있던 주치의를 거의 잡아채서 침실에 대령했다.

16558446641326.jpg“전하……!”

대공이 저택을 떠난 지 어언 두 달. 성큼 다가온 초겨울은 전에 없이 추웠고, 첫눈이 무릎까지 쌓인 어느 날 밤이었다.

16558446641287.png“노에, 비안…….”

16558446641326.jpg“어서 진맥을 해보세요!”

대공비의 전담 하녀 애니가 주치의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대공비는 이미 침대에서 몸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16558446641287.png“쿨럭!”

카펫 위로 굵직한 핏덩이가 쏟아졌다. 모여든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떨고 있던 주치의가 재빨리 품에서 약을 꺼내 애니에게 건넸다.

16558446641326.jpg“삼키시게 해라, 어서!”

애니와 다른 하녀들이 이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아드리엔의 몸을 붙잡고 거대한 환약을 먹였다. 약이 워낙 커서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아드리엔을 붙들고 하녀들은 입에 거의 물을 들이붓다시피 했다. 컥, 컥. 컥! 흡사 물에 빠진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드리엔은 물살을 가르듯 온몸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다시 발작이 시작됐다 생각한 이들이 몸을 꾹 붙들었고, 그 행동은 아드리엔에게 마치 물에 빠진 그녀를 아득한 심해로 잡아당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16558446641287.png‘답답해……!’

이 사람들의 손을 다 떼어버리고 싶어! 날 그냥 놓아줘! 물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참을 발버둥 치던 아드리엔은 순간, 거짓말처럼 자유로워졌다. 아, 드디어……! 하지만 아드리엔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를 열고 있었지만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하얀 상자처럼 무엇도 담고 있지 않았다.

16558446641287.png‘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입을 벌려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하얀 상자가 사실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닌 그녀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아드리엔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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