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상한 백작 부인2021.05.08.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가 결국에는 잠겨서 죽어버리는.
“이제 깨셨습니까?”
“음, 음-.”
나는 여전히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악몽을 꾼 게 맞기는 한 듯 등이 축축했다. 손가락부터 까딱까딱. 유리 같은 몸을 가진 이후,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부터 까딱였다. 갑자기 움직이면 정말 깨질 것처럼 온몸이 아파져 왔기 때문에.
“아무리……라 하셔도, 나가보셔야-.”
애니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기듯 들리는 것 외에 정신은 또렷했다. 최근 몇 년간 이만큼 좋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머리가 아주 맑았다. 식은땀이 좀 난 것 외에는 숨만 쉬어도 불을 지피는 것 같던 가슴도 괜찮았고.
“제 말 듣고 계세요?”
그런데, 애니의 목소리가 저렇게 늙수그레했던가? 나는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애써 들어 올린 눈꺼풀을 다시 닫았다. 상쾌한 정신과는 달리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블리에 님!”
“…….”
벌떡!
“아악!”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순간, 엄청난 힘이 내 몸을 순식간에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아침마다 코를 적시던 지독한 허브향이 나지 않았다. 대신 붉은 장미향이 온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애니, 도대체…….”
“대공비가 죽었답니다.”
“……애니.”
하다 하다 이제는 내 면전에서 내 죽음을 이야기하는 애니의 목소리에 나는……아니, 잠깐.
“애니?”
“애니가 도대체 누구길래 그리 찾으십니까?”
툴툴거리는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낯설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낯선 목소리였기 때문에. 게다가 항상 잦은 기침으로 잠겨 있던 내 목소리가 정상적이었다.
“아, 아까 뭐라 했어?”
“뭘요?”
“대공비가…… 대공비가 죽었다고? 어떤 대공비?”
이 제국에 나 말고 다른 대공비가 있었던가? 그제야 내 눈에 생전 처음 보는 방 안의 풍경이 들어왔다. 온통 녹빛이던 내 방과 달리 질릴 만큼 하얀색과 분홍색으로 가득 찬 방.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자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을 무시하고 허겁지겁 거울 앞에 섰다.
“하아-.”
안도의 한숨. 햇빛에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와 황금빛 속눈썹. 지겨우리만큼 자주 보던 거울 속 내 모습이 맞았다. 창백하고 핼쑥했던 평소와 달리 혈색이 도는 장밋빛 뺨이 조금 낯설긴 했지만, 아침에 자주 열이 오르곤 했으니까.
“내, 내가 어제 또 쓰러졌었나?”
언제나 목이 아파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목 상태였다. 가만있자. 그런데 내가 지금 나 혼자 힘으로 침대 밖으로 나와서 거울까지 뛰어온 건가? 단단하게 서 있는 다리가 괜스레 한번 떨렸다.
“무슨 소리세요, 어제도 종일 빈둥거리시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시고는…….”
“내가……?”
이상하리만치 멀쩡하고 단단해진 몸 때문에 멍해져 있는데, 여자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나는 어제 아픈 몸으로 종일 앓았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빈둥거렸다’라고 표현하던가? 난생처음 보는 이 중년의 여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방금 내가 일어난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중 가장 큰 위화감은 손에 무엇하나 의지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 있는 내 몸이었고. 똑똑-.
“부인.”
“…….”
마땅히 대공비 전하라 불러야 할 시종 하나가 아무렇지 않게 내 침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꼴을 중년의 여인은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대공저가 아닌, 수도의 어디 큰 병원이라도 되는 걸까. 예의라고는 없는 그 행동들이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트로비카 대공 각하께서 부인의 장례식 참석 여부를 여쭈라 하셨습니다.”
“……남편이?”
풉. 그 순간 이부자리 정리를 마친 여인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수마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나는, 이 방 안의 모든 것이 위화감으로 다가왔던 나는, 그 웃음소리에 찬물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렸다.
“뭐, 이제 남편이 되실 수도 있겠군요 부인. 트로비카 대공비가 죽었으니, 정부이신 블리에 님께서 그 자리를 꿰차시면 참 재밌는 가십이 될 테지요.”
“트, 트로비카 대공비가 죽어?”
나는 그제서야 밀물처럼 밀려드는 기억에 허우적거렸다. 악몽이 아니었다.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침실의 양쪽 문이 활짝 열리고. 냉소적이던 하녀들의 표정은 사색이 되고. 언제나 나를 골려 먹던 애니마저 달려 나갈 만큼 심각했던 발작. 코끝이 매울 만큼 강했던 허브향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덜덜 떨리던 몸. 눈 내리던 밤, 노에비안과의 뜨거운 입맞춤을 생각하며 웃음 짓던 순간 찾아든 악몽. 아니, 현실. 약한 발작이 일 때마다 먹이던 끔찍한 맛의 약을 삼키게 하려던 거친 손길들. 입 안으로 들이붓는 물마저 감당하기 힘들어 허덕이고, 숨을 쉬지 못해 점차 머릿속이 새하얘지던…….
“우웩-!”
“블리에 님!”
“부인!”
내게 내밀어지는 두 개의 손들을 정신없이 해치고, 나는 아까 응시했던 거울로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아름답다 칭송하던 내 연녹빛 눈동자와 반짝이는 황금 속눈썹, 코, 입. 모든 것이 똑같은데 나를 부르는 이름도, 내 신분도 다르다. 도대체…… 잠깐.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느슨하게 묶인 채 뒤로 늘어진 포니테일을 툭, 풀었다. 동시에 머리에 씌워져 있던 파자마 모자도 벗었다. 등허리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은 반짝이는 금발이 아니라 남편의 것과 같은 흑발이었다.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던 머리카락은 관능적으로 굵게 웨이브 져 있었고.
분명 내 얼굴인데, 내가 아닌 몸이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화장품이 잔뜩 놓인 콘솔에 휘청이는 몸을 의지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차는 종이 뭉치들로 손을 뻗었다. 내가 주로 읽는 제국 일보가 아닌, 온갖 스캔들로 가득한 가십지인 「뒷골목」이 있었다. 「트로비카 대공비, 새벽녘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이유는? 젊은 대공비의 삶과 스캔들」
“아아-.”
나는 머리를 짚고 휘청였다. 힘센 중년 여인이 단단히 나를 받쳐 들고 혀를 쯧쯧 찼다.
“너무 좋으셔서 기절하고 싶으신가요?”
아드리엔 트로비카. 바로 그 이름의 내가 어제저녁 죽었단다. 그 고통스럽고 기묘한 감각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대공비 전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시려면, 오후가 되어서야 참석이 가능하답니다.”
그리고 하녀에 말에 따르면, 나는 그가 만나온 정부의 몸으로 환생했다.
*** 식탁에는 엄청나게 거나한 식사가 차려지고 있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그것을 응시했다. 어느 것 하나도 현실 같지 않았다. 저택 안주인의 취향일 게 분명한 화려한 다이닝룸은 온갖 예술작품들이 누더기처럼 더덕더덕 걸려 있었다. 꽉 채워진 것을 좋아하는 듯, 액자 사이의 틈새에는 사람 키만 한 조화가 꽂힌 꽃병들이 그득 했다. 마치 미친 예술가의 창고에 앉아 식사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지금 제정신이기만 하다면 그런 기분부터 먼저 느꼈으리라. 브리치즈가 곁들여진 샐러드로 시작했던 아침 식사 코스는 뜨끈하게 끓어오른 양고기 스튜까지 내 앞에 서빙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입맛이 없으신가요?”
스튜 안의 양고기를 거대한 포크로 능숙하게 쭉쭉 찢어 뼈를 바른 중년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 그대는 이름이 뭐지?”
“……이건 또 무슨 놀이이신지?”
“나는 그대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네.”
여자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얼굴을 살폈다.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불쾌하군.”
“정말 미치신 겁니까?”
맙소사. 내가 아무리 괄시받는 안주인이긴 했으나 이렇게 면전에서 욕을 들을 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온 몸의 주인, 이 ‘블리에’라는 여자는 무슨 이유에선지 남편의 정부라 불린다. 퉁명스럽지만 적당히 괜찮은 대접. 하지만 하녀로 보이는 이 여자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위치는 아닐 텐데. 무례함에 할 말을 잃은 내가 그저 보고만 있자, 그녀는 자신을 ‘마지’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혀를 찼다.
“며칠 내내 방에 콕 틀어박혀서, 웃었다가 울었다가 아주 생난리를 치시더니 대공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벌떡 일어나셔서 새삼스레 제 이름까지…….”
그리고 마지의 입에서 곧장,
“미치시려면 좀 곱게 미치세요.”
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그만 입맛이 뚝 떨어졌다. 고작 이름 하나를 묻는데도 저런 반응인데 내가 사실 대공비 아드리엔이라는 말을 하면 정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나는 찬물만 들이켰다.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
침실에 들어왔던 시종은 다이닝룸으로 내려오는 내내 나를 그렇게 불렀다. 블리에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지만, 아카시아 백작은 나 역시 익히 아는 자였다. 대공가의 가신이지만 중앙에서 요직을 맡지는 못한 아카시아 백작. 백발이 성성할 만큼 늙어서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자. 한미한 가문이니만큼 남편의 영지 일에 대한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었기에 퍽 불쌍해 보이기도 했던 자.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들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내 아팠던 나는 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물론 대공비쯤이나 되는 여인이 가신이라 하여 한미한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할 리도 없었지만. 감히 제가 모시는 주군의 아내를 탐해 이렇게 닮은 여자를 구해 살고 있었을 리도 없다. 나는 여러 번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는 대공비인 나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눈만 내리깔고 있는 자였으니. 그나마도 몸이 좋지 않아 결혼 후에는 한두 개를 제외하고 파티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백작뿐만 아니라 여느 귀족이라도 얼굴을 알기 힘들었다.
‘우연의 일치인 것 치곤, 굉장히 기분 나빠.’
머리카락 색깔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만 아니라면 이 여자는 영락없이 나를 닮았다. 입술에 바르는 것 하나, 머리 위에 쓰는 깃털 모자 하나에 휙휙 바뀌는 것이 귀부인의 이미지라지만…… 자주 보는 얼굴이라곤 거울 속 내 모습이 전부였던 내가 이만큼 닮은 여자를 몰라볼 리가.
“잘 드시네요.”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입에 음식을 넣고 있으니, 마지가 피식 웃으며 접시를 계속 내밀었다. 말은 거칠지만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블리에의 친정에서 같이 온 유모 같은 사람인 건가? 아, 그러고 보니 나…….
‘내 손으로 직접 식사를 하는 게 얼마 만이지?’
블리에의 몸도 배가 아주 고팠는지 배가 차는 느낌도 없었다. 나는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입에 음식을 넣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대공저에서 겪은 유치한 괴롭힘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지도 오래였으니까. 냠냠. 처음에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기계적으로 먹은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해 계속 먹을 수밖에 없었다. 블리에의 손은 내 것과 똑같이 하얗고 가늘고 길었지만, 힘은 완전히 달랐다. 몸살기가 있긴 했어도 이전의 내 몸과 비교해서 이 정도면 ‘다신 없을 건강함’이었다.
“저어, 부인. 각하께 뭐라 전할까요……?”
대공저에서 보냈다는 아까 그 시종은 안절부절못하고 식사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내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공비 아드리엔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인가?'에 대한. 이 블리에는 정말로 내 남편의 숨겨둔 정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