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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블리에 아카시아의 튼튼한 몸 (3/171)

3. 블리에 아카시아의 튼튼한 몸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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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시아 백작저의 오랜 사용인, 하녀장 마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택의 안주인을 지켜봤다. 집사가 급히 구해다 준 「제국 일보」를 읽는 블리에를. 그래. 그 「제국 일보」말이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참 장황하게도 한다며 비웃고 던져버리던 그 신문. 백작도 집에 없는데 뭣 하러 신문이 자꾸 집 앞으로 배달되냐며 불쏘시개로나 쓰라던 그것.

16558447055908.jpg‘정말로 미치신 게 틀림없어.’

두 다리로 멀쩡히 잘 걷고 있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기뻐하고. 물 한잔 달라 해놓고는 건네주자 감격한 눈으로 ‘고맙구나.’라는 말을 하다니. 게다가 응접실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또 별안간 행복해하고, 가십지가 아닌 제대로 된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라……. 응접실 입구로 시선을 돌리자 역시나 다른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 꼴을 보고 속삭이고 있었다. 블리에와 신문이라는 조합은 하녀들이 충분히 구경할만한 건수이기는 했다.

16558447055908.jpg‘쇼핑 카탈로그라도 들어 있는 거 아니야?’

16558447055908.jpg‘어디서 거하게 불이 나거나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이라든지.’

16558447055908.jpg‘그럴 수도 있겠다. 마님이라면 그런 걸 좋아하실지도.’

속닥이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렸다. 마지가 황급히 그들을 쫓았다. 미우나 고우나 어쨌든 이 저택의 안주인이니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는 안 되니까. 그녀가 새삼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동안 '못 배운 티를 내는’ 백작 부인의 모자람만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방에 며칠이나 들어앉아 있던 블리에가 이상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6558447055927.png‘내, 내 이름이 정확히 뭐라고?’

16558447055927.png‘아카시아 백작은 어디 있지?’

16558447055927.png‘너는, 너는 내 유모인가?’

  등등의 아주 얼토당토않은 질문 말이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마지 혼자 있을 때 물어봐서 다행이지, 입이 가벼운 어린 하녀들이 그 질문을 들었다가는 온 수도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미쳤다.’라는 소문이 돌만한 내용이었다.

16558447055927.png“마지.”

그러니 마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응접실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고는 입을 앙다물고 블리에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국 일보를 다 읽은 블리에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그녀를 부른 차였다.

16558447055908.jpg‘또 무슨 엉뚱한 말을 하려고…….’

16558447055927.png“내가…… 내가,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인가?”

16558447055908.jpg“!”

맙소사, 맙소사. 마지가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빠르게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16558447055908.jpg“드디어 진실을 말해주실 참입니까?”

16558447055927.png“……진실?”

블리에의 아름다운 연녹빛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마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16558447055908.jpg“대공 전하와 그렇고 그런 사이이신 것이지요?”

16558447055927.png“……왜, 왜 그렇게 생각했지?”

평민의 그것과 다름없던 블리에의 말투가 어딘가 모르게 귀족적으로 바뀌었다. 마치 아카시아 백작처럼. 마지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갑자기 조심스러워진 블리에가 입을 꾹 다물까 봐 황급히 말을 이었다.

16558447055908.jpg“아니, 정부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대공비의 신변에 관심을 가지실 리가 없잖아요?”

16558447055927.png“……내가?”

16558447055908.jpg“암요,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 패물이며 드레스며 자주 보내오시기도 했고…….”

16558447055927.png“그이가…… 그이가 그랬다고.”

블리에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마지는 제가 잘못 말했냐는 얼굴로 한참 고민했다. 사실 마지는 이미 자신의 이론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아침에 스리슬쩍 대공의 정부이니 대공비의 죽음이 좋지 않냐느니 떠봤던 것도 다 어찌 반응하나 살피기 위함이었고.

16558447055908.jpg“지금도 대공 전하께 ‘그이’라며 다정하게도 부르시니…… 아이참, 부인. 맞지요? 대공 전하께서 단순히 가신이 자리를 비웠다고 그 부인까지 이렇게 살뜰히 장례식에 초대하며 챙기실 분입니까? ”

아카시아 백작은 영지의 일로 바빠 수도의 저택으로 오는 일이 손에 꼽았다. 가신이 자리를 비우면 그 배우자는 자연히 주군인 대공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니 대공비의 장례식에 오라 친히 그 부인에게 초대할 수도 있다. 그런데…….

16558447055908.jpg“백작님께서 어떤 외출이든 다 눈 감아 주시는 것만 봐도, 뭐 보통 사이는 아닌 듯 보이던데요. 이제는 감추시지 마시고 속 시원하게 제게 털어놓으세요.”

생각해본 후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기가 막힌 답변을 시종에게 보낸 참이었다. 감히, 대공에게. 블리에가 그리 할 수 있는 이유가 그의 정부이기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이 집안의 오랜 사용인으로서, 마지는 대공의 성정 또한 익히 들어왔기에 동시에 불안했다. 대공이 정부에게 그리 큰 인내심을 발휘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6558447055908.jpg‘빨리 치장을 하고 마차를 대기 시켜야 하는데…….’

누구는 대공에게서 불벼락이 떨어질까 걱정이 태산인데! 정작 당사자인 블리에는 서두르는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16558447055927.png“너도 모른다는 거로구나.”

16558447055908.jpg‘아니 본인이 이야기를 안 하는데, 저 같은 하녀가 어떻게 안단 말이에요?!’

상태가 이상한 것도 받아주는 정도가 있지. 마지가 이를 악물고는 인내심을 끌어모아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47055927.png“그래, 이 저택에선 아무도 내게 정답을 알려줄 수 없겠어. 일단, 일단 그이의 초대는 받아들이고 장례식에 가는 수밖에.”

아니, 그래서 도대체 무슨 사이시냐고요? 그리고 대공비가 죽었다며 대공이 친히 연락을 해왔는데, 그 가신의 부인이 장례식에 참여하는 당연한 일을 무슨 가준다는 듯 말씀하시는 거예요? 온갖 말들이 가슴속을 굴렀지만 마지는 꾹 참았다. 요 며칠 잠잠하다 해서, 그 성질머리를 까먹었을 리가. 물건 하나라도 집어 던지기 전에 그녀는 일단 조용히 치장을 돕는 것을 택했다. 그러고는 쉴 새 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불안함을 표출하는 블리에의 낯선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 나는 하녀장 마지나 내게 편하게 굴지, 다른 하녀들은 거의 허리를 반으로 접은 상태로 나를 대하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내 눈치를 보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뿐만아니라 말이라도 한마디 꺼낼라치면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16558447055927.png‘블리에 아카시아는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그럴 만도 했다. 온몸에 힘이 넘쳤다.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해도 쌩쌩할 만큼. 정말 오래간만에 슬리퍼가 아닌 구두를 신고도 몸이 휘청이지 않았다. 한 움큼씩 빠지던 머리카락은 몇 번을 빗어내려도 좀처럼 빠지지 않았고.

16558447055908.jpg“다 됐습니다, 마님.”

요나라는 이름의 어린 하녀 하나가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신거울 앞에 서자 익숙한 얼굴과 낯선 몸이 비쳤다. 살이 적당히 올라붙은 보기 좋은 얼굴이 신기했다. 기침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일어나 식사를 하고 치장을 하는 동안 단 한 번의 발작도 없었다.

16558447055927.png“……건강해 보이네.”

16558447055908.jpg“네?”

그 말이 비난인 줄 알았는지, 요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런 몸을 갖고 싶어 얼마나 기도하고, 기도했던가. 오전 내내 혼란스럽고 멍한 상태를 번갈아 가며 겪던 나는, 결국 이것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온 신문에서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죽었다는 비보를 1면에 실었고, 정황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과 같았다. 지병으로 인한 심각한 발작,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망. 블리에 아카시아의 몸에 죽은 내 영혼이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나는 애초에 블리에 아카시아였지만 정신병에 걸린 것인지 그것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드리엔이었다. 나는 거울에 천천히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장밋빛 뺨이 사랑스러웠다. 내가 이런 황당한 상황을 겪고도 당장 미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이 여자의 얼굴이 나와 소름 끼칠 만큼 닮았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꿈꾸던 나의 모습과 너무 같아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16558447055927.png‘신께서 기회를 주신 걸까.’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 아프고 병든 몸을 벗어던지고 똑같은 몸을 얻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지 않나. 만약 이 몸에 담긴 내 영혼이 이미 죽어버린 내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려 한다면?

16558447055927.png‘절대 안 돼.’

오히려 내가 막고 싶은 심정이다. 이 몸의 주인인 블리에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나는 지금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걷고. 혼자 무엇인가를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감격이었다. 남편과 이 몸의 주인이 묘한 관계라는 것은 애초에 믿기지도 않았다. 자신의 체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노에비안이 절대 그럴 리도 없었거니와 그토록 사랑하여 몸이 약한 내 상태를 알면서도 대공비로 들이고자 했던 그가 뭐가 아쉬워서? 대공저는 커녕 수도에 한 번 들르는 것도 힘들 만큼 바쁜 사람이, 정부와 한가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상상을 하자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아는 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데이트는 무슨, 일에 반 미쳐 있는 사람인데. 애초에 사교계에서 매력적인 노에비안의 정부라며 암암리에 떠들고 다니는 여인들이 있다고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노에비안이 황실의 명으로 얼마나 바쁘게 사건 사고를 해결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 나는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묘한 감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이리 치장하고 밖으로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트로비카 가문의 공동묘지에 도착한 나는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마차에서 내렸다. 묘지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기묘한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건강해져서 기쁘다는 생각도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설수록 죽지 않은 사람처럼 곱게 꾸며져 누워 있는 ‘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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