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친 여자와 울고 있는 미남자2021.05.19.
적막한 혼란으로 꽉 찬 묘지. 장례식 내내 이 몸을 향해 그리 불러주길 바랐던 이름이 생전 처음 보는 사내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잔뜩 굳은 채 내게 고개 돌린 남자를 보았다. 안쓰러울 만큼 일그러져 엉망이 된 젖은 얼굴이었다. 움푹 팬 눈두덩이, 그 속에 가스등과 달빛을 받아 기묘하게 빛나는 강렬한 붉은 눈동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단순히 낯선 적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먹이를 빼앗긴 야생 동물처럼, 제 아이를 빼앗긴 맹수처럼 낮게 울부짖던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은 내게 혼란을 주었다. 저토록 얼굴이 완전히 허물어질 만큼 울어야 하는 이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아니라, 노에비안이어야 했다. 지금 내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는 사람은 저 낯선 남자가 아니라 내 남편이어야 했다. 지금 내가 마주쳐야 할 사람 역시…….
‘노에비안을 먼저 만나야 해.’
이 몸이 누군지 조차도 제대로 모르는데, 내 얼굴을 아는 다른 사람부터 마주칠 수는 없었다. 그건 동물적인 직감과도 같았다.
“아드리엔……!”
남자는 얼어붙은 듯 멈춰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떡 벌어진 어깨가 크게 휘청였다. 조금 밝은 곳에서 보니 몸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 같았다. 훈장으로 빼곡한 정복 재킷의 앞부분이 불그스름한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커다란 손으로 그곳을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나는 굳어 있던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뒤돌아 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롭게 얻은 블리에의 몸은 너무 건강해서 거뜬히 달릴 수 있었다.
“아드리엔, 아드리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절대 나오지 않을 애처로운 목소리가 곧바로 뒤통수에 꽂혔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그 붉은 눈의 사내의 목소리인지, 입구에 서 있던 묘지기의 것인지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헐떡이며 나는 갓길에서 나를 기다리던 백작저의 마차에 올라탔다. 당황스러워하는 마부의 외침도 무시하고 미친 듯이 벽을 두드렸다. 멈칫하던 마부가 ‘이랴!’ 하는 소리를 내며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어스름한 등불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이 이어지고 거칠었던 숨이 안정되었을 무렵,
“어?”
나는 어쩐지 허전한 발을 확인했다. 군데군데 찢어진 하얀 실크 스타킹은 흙이나 풀 따위로 엉망이었고 발가락 두 개가 빼꼼 나와 있었다. 그리고 옷에 맞춰 신고 왔던 검은 구두가 모조리 벗겨져 있었다.
“하…….”
몸을 옹송그려 팔꿈치를 무릎에 의지한 나는 여전히 떨림이 있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뛰어오던 중에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겨우 중심을 잡고 달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자그마한 진흙더미에 구두 굽이 살짝 빠졌던 것 같기도 하다. 비석 앞에서 만난 남자의 눈은 반쯤 돌아 있었다. 조금은 미쳐 있는 사람처럼.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도망쳤었다. 달빛 아래 번뜩이는 붉은 눈은 분명 그랬다. 피를 틀어막으면서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내게 오려 했다. 흙투성이가 된 발에서 까끌까끌한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내며 나는 호흡을 깊게 내뱉었다.
“도대체…… 누구야…….”
나는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상황을 다시 짚어보았다. 동시에 별안간 지끈지끈 아파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남자의 얼굴을 더 자세히 떠올려보려 애썼다. 그 남자는 누굴까. 데뷔탕트 후에 파티에 참여한 것은 두어 번뿐인데. 아무도 없는 묘지에 등장한 사내는 겨울밤에 뜬 태양처럼 번쩍거리고, 순간이지만 눈이 개안할 만큼 황홀하게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그만큼 미형의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음에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 나는 도착해서도 한참을 넋이 나간 채로 마차에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백작저에 들어섰다.
“마님! 오셨습니까?”
“마님, 발이……!”
시종 하나 없이 다녀온 나를 퍽 걱정했는지 마지와 요나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나는 모자를 벗으며 무너지듯 응접실 소파에 몸을 맡겼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로하고, 혼란스러웠다. 하루 만에 감당하기에는 하나같이 너무 벅찬 상황들이 이어져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의 죽음. 새롭게 얻은 몸. 나를 남편의 정부라 부르는 사람들. 내 장례식. 그리고 거기서 오열하고 있는 나도 모르는 남자. 장례식에서나 쓰는 엄숙한 검은 모자를 받아든 요나가 바지런히 내 다리를 주무르며 조심스레 찢어진 스타킹을 벗겨내 발을 씻겨주었다. 손을 씻으라고 들여온 물은 순식간에 족욕 물이 되었다. 상처가 생겼는지 따끈한 물이 닿자마자 발이 따끔따끔했다. 마지는 내 상태를 보고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직감한 것인지 정신없이 내 앞을 서성였다.
“대, 대공 각하는 만나 뵈셨습니까, 마님?”
아. 그래, 노에비안. 그의 이름이 들리자 도망치느라 잊었던 일이 생각나며 정신이 확 들었다. 별안간 나타난 아름다운 맹수 같은 남자 때문에 나는 노에비안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는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처음 보는 남자의 무너진 얼굴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그제야 장례식에서의 노에비안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노에비안을 마지막으로 봤던 순간까지도 그는 내게 단 한 줌의 시선도 보내지 않고 조용히 장례 첫날을 견디고 있었다.
“마님?”
“…….”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에비안을 보긴 했으니까. 내 얼굴을 다시 제대로 살피던 마지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을 내 얼굴을 보더니, 잠시간 말을 잃고 어수선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대공비의 시신도요?”
“……응.”
나는 팍 잠겨버린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봤지. 똑똑히 봤지. 대공저에서 병자로서 침대를 지키고 있던 시절보다 아름답게 꾸며진 나를. 이젠 돌아갈 몸뚱이마저 없어진 현실을. 노에비안은 앞으로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할 때마다 귀한 골동품을 꺼내 보여주는 주인처럼 내 시신을 보이고 조문하러 오는 손님을 맞아야 할 터였다. 우스웠다.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황실에 의해 개처럼 부려 먹힌 노에비안은 수도에서 이틀 이상 있기가 그리 어려웠는데. 꼼짝없이 100일 동안은 이 수도에 있어야 한다. 내가 죽고 나서야 말이다. 그 또한 황족의 의무였다.
“……좋아서 까무러치실 줄 알았더니, 어찌 우십니까?”
나는 계속 울고 있었나 보다. 마지가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 나는 그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소파에서 가만히 울음을 삼켰다.
‘그대는 어려.’
늘 나를 안아주며 위로하던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그래, 나는 아직 어리고 무지하여 아침만 해도 당장 내게 주어진 건강한 육체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평생에 걸쳐 소원하던 몸이었으니까. 그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건강한 몸을 얻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잃은 것이지 않나. 내 남편은 더는 아름다운 노에비안이 아니고, 내 이름도 더는 아드리엔 트로비카 혹은 아드리엔 피레타가 아니다. 이 상황이 동화나 소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 같은 게 아니었을 텐데. 노에비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 몸에 아드리엔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운명처럼 알아챘겠지. 그러면 나는 노에비안에게 달려가 키스하며 드디어 병든 몸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났다며 환호했을 것이다. 주신께서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면서. 하지만 나는 장례식장에서 애도를 표하던 귀부인 몇몇과 영애들의 노에비안을 노리는 시선을 똑똑히 기억했다. 모두가 건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것은 동화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내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했다면야,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없더라도 행복해요, 노아.’라며 아련하게 웃었겠지만, 눈앞에서 그 꼴을 보니 속이 뒤집어졌다.
‘아아-. 우스워라.’
타오르는 감정과는 달리 기막힌 웃음이 계속해서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나는 죽었고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기까지 한데. 고작 그런 것이 더 서러웠다. 마지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계속 엉엉 우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쉬고는 진정에 좋은 차라도 한 잔 내어 오라며 요나를 내보냈다.
‘노아가 우는 건 처음이야.’
단 한 번도 그의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런 그를 아주 잠깐이라도 의심했던 내 머리를 세게 치고 싶었다.
‘나는 어쩜 이리 바보 같을까.’
가장 힘들 사람은 나를 잃고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내 시신을 곁에 두고 조문객을 맞이할 노에비안인데. 가신의 부인을 장례식에 초대하려 사람을 보냈던 노에비안에 대한 얕은 의심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표정.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았으니까.
“마님! 마님!!”
그리고 슬픔에 잠겨 있던 내 감정이 한순간에 뒤바뀐 이유는 의문의 카드 한 장 때문이었다.
“마님, 집 앞에 이런 것이!”
그래, 캐모마일 티를 준비하러 간 요나가 헐레벌떡 함께 가지고 온 고작 그 카드 한 장의 필체를 보고서 말이다. 「약속을 지켜줘, B.」 블리에의 이니셜임이 분명한 B를 부르며, 약속을 지켜달라 하는 이의 필체는……. 분명히 내 남편, 노에비안의 것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