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남편의 ‘합법적인’ 정부 (7/171)

7. 남편의 ‘합법적인’ 정부2021.05.26.

내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 나는 하루 종일 미친 여자처럼 굴었다. 아침에 일어나 건강한 육체에 기뻐했다가 엉엉 울며 슬픔에 잠겼다가……. 침대를 벗어나면 멍하니 신문과 가십지를 반복해 읽었다. 제국 일보에는 더 이상 내 소식이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틈만 나면 노에비안의 필체로 온 카드를 꺼내 읽고 또 읽었다.

16558447777869.png‘노아와 블리에가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을까.’

인사말도, 끝맺음도 없는 쪽지인데 기이하리만치 신경이 쓰인다. 노에비안은 아무리 한미한 가문의 작위도 없는 영식일지라도 예의를 다하는 남자다. 내가 알기로는 격 없는 친우조차도 없다.

16558447777869.png“친구?”

가십지에 이름 한 글자 내밀지 못하는 블리에 아카시아와 그가 친구? 게다가 여인과 그리 친하지도 않을 대쪽 같은 성격의 노에비안과 블리에가?

16558447777869.png“친척?”

그는 황족이다. 그의 친척이라면 블리에 역시 황족일 테고. 아카시아 백작이 황족씩이나 되는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할 수 있을 리 없다.

16558447777869.png“동료?”

내가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는 이 저택 사람들의 반응으로 봐서는, 블리에가 그다지 지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듯했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노에비안이 가장 경멸하는 부류 또한 머리에 든 게 없는 이들이었고.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듯한 마지의 태도만 보아도 그렇지 않나. 하녀장 마지는 나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리 공손한 인물도 아니었다. 이미 대공저에서 영악한 하녀들만 보아왔던 내게는 그리 거슬릴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름만 백작 부인이라 할지라도 블리에를 제 조카딸쯤이나 되는 듯 취급하는 마지의 태도에 깔린 것은 은근한 멸시다. 나는 천천히 거울로 다가가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블리에는 내가 봐도 퍽 아름답다. 나와 소름 끼칠 만큼 닮았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철혈 재상이라 불리는 노에비안이 한눈에 반한 대공비라는 타이틀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니까. 바스러질 것 같이 약한 몸도 아니었고, 나이에 맞게 힘이 펄펄 넘쳤다. 신체에 결함이 있거나 외모가 이상해서 하찮게 보인 것이 아니란 말이다.

16558447777869.png‘분명히 멍청한 모습을 보였을 테지.’

하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나 역시 잠깐이지만 아카데미에 재학했던 경험이 있고 노에비안이 말이 잘 통하는 여인은 론타를 통틀어 나 하나뿐이라고 추켜세워주기까지 했었으니까. 실제로 백작저 사용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요 며칠간 내가 미친 여자처럼 굴기만 한 것은 아니었거든. 끔찍한 분홍색으로 가득했던 침실이며 응접실을 조금 덜 끔찍하게 바꾸라 지시하기도 했고. 집사장의 업무가 과중해 보여 일을 좀 나누어 분배해 주기도 했다. 집 안에 분홍색이 없어질수록 마지가 환호했고, 일거리가 줄어들자 노집사의 얼굴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와는 제대로 말 한마디 섞으려 하지 않았던 대공저 사용인들과는 달리, 슬금슬금 이건 어떡할까요, 저건 어떡할까요 하고 물어오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릴 사람이 필요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집안사람들에게 정을 붙여도 될까 고민하면서도 일단은 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16558447777869.png‘어서 알아내야 해.’

블리에와 노에비안이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는지. 노에비안은 가신의 부인을 직접 초대하고, 이런 묘한 쪽지까지 전하고는 한번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 치고는 이후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는 게 신경 쓰였다. 장례식에서 이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으니까 블리에와 그는 분명 아는 사이일 것이다.

16558447777869.png‘가까이서 보면 내가 아드리엔이라는 것을 알까?’

나는 그가 나를 좀 더 가까이서 보면 분명 알아볼 것이라는 묘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몇 년인데. 더 이상은 한계였다. 기약도 없이 노에비안이 먼저 연락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16558447777869.png‘내가 노아를 찾아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아카시아 백작의 인장이 없는 이상, 내가 보내는 서신이 대공저의 지붕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백작가의 소박한 정원을 거닐며 혹시라도 또 다른 쪽지를 건네는 사람이나 찾아오는 사람은 없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이어 근처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나더니 상기된 얼굴의 마지가 정원으로 뛰어왔다.

16558447777908.jpg“아이고, 이번엔 또 어디 계셨나 했네요! 어딜 가면 간다고 말씀이라도 하시라니까요!”

16558447777869.png“왜?”

16558447777908.jpg“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정원에 계신 줄도 모르고 외출하셨나보다 했다니까요?”

16558447777869.png“!”

16558447777908.jpg“주인님이 몇 달 만에 저택으로 돌아오셨는데, 얼른 가보셔야죠?”

16558447777869.png“……나를 보자고 하셨나?”

16558447777908.jpg“무슨 말씀이세요? 보자고 안 하셔도 가셔야지요, 마땅히. 부부란 원래 그런 거라고요!”

그랬지, 참. 누군가의 부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은 아직도 내게 낯설기만 했다. 저택을 비웠던 아카시아 백작이 몇 달 만에 돌아왔다라…….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를 따라 3층의 집무실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남편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리 나쁜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 블리에 아카시아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니까.

16558447811327.jpg

  *** 똑똑-. 문은 두드린 것이 민망할 만큼 이미 열려 있었다. 집무실은 단조로웠다. 그림이나 꽃병 하나 놓이지 않은 삭막한 공간.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빼곡했던 블리에의 침실과는 대조적이었다. 마지를 밖에 두고 조심스레 발을 들이자 집무실 책상 옆 큰 창문에 기대어 서 있는 아카시아 백작이 보였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아카시아 백작과 블리에의 몸으로는 처음 대면하는 것이니 나는 조금 긴장했다.

16558447777869.png“백작님.”

16558447777908.jpg“……부인.”

16558447777869.png“돌아오셨군요.”

나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백작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노쇠한 아카시아 백작은 구부정한 자세로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소파에 앉은 그가 내게도 앉으라 손짓했다. 그 모습이 퍽 다정해서 긴장을 풀려던 그때.

16558447777908.jpg“대공 전하를 만나 보셨습니까?”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손에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나는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백작을 응시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가늠하고 있는데 말 안 듣는 딸을 보는 듯한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제 부인이 하녀 하나 없이 외출한 것 같아 보여도, 게다가 제 주군과 만났느냐 묻는데도 참 태평한 가신의 얼굴은 못내 기이했다.

16558447777869.png“……아니요.”

혼란과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내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짧은 한숨 섞인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흘러나왔다.

16558447777908.jpg“대공 전하와의 약속은…… 지키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을 잔뜩 굳히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겨우겨우 마주 본 백작의 얼굴에는 그 어떤 경멸도, 분노도 없었다. 당연하게 내게 노에비안에 관해 물어보고, 그를 만났느냐고 물어본다. 쿵! 쿵! 쿵! 쿵! 떨어져 있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평민일지도 모르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블리에.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존대하는 아카시아 백작. 도저히 부부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대화 내용. 그리고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얼굴은 조금 창백하게 질려 있다.

16558447777869.png‘마치 잔뜩 겁을 먹은 사람처럼.’

16558447777869.png“……무슨 약속이요?”

도대체 그 약속이란 게 뭘까. 자기 이름조차 쪽지에 적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노에비안이, 이 가신에게도 그 약속이란 걸 알려주었을까? 백작이 내 말에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 심장을 부여잡으며 느릿하게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짧은 거리였지만 그 정도로도 숨이 찬지 한참을 헐떡였다. 나약한 몸뚱이를 가진 그 늙은 가신이 곧 내 앞에 꿇어앉았다.

16558447777869.png“……백작님!”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가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백작은 늙은 손으로 제 무릎을 꽉 움켜쥐고 절박하게 말했다.

16558447777908.jpg“제발. 살려주십시오, 부인!”

16558447777869.png“……!”

16558447777908.jpg“제발,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부인. 말년에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발…….”

16558447777869.png“일어나세요, 백작님!”

16558447777908.jpg“이만큼 미룬 것도 한계입니다. 제 나이에 다른 이들은 한가롭게 포커 게임이나 하는데 저만 여전히 대공 전하의 영지와 수도를 오가며 개고생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 자신의 부인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남자. 나는 그저 그 약속이 무엇이냐 물었을 뿐인데. 너무 이상하지 않나.

16558447777908.jpg“대공께서 그리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대공비께서 그리되시고, 대공께서 한층 더 날이 서서 저를 압박하시는데…… 이 늙은 몸뚱이로도 무엇을 원하시는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16558447777869.png“저는…… 그저, 그 약속이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에요.”

16558447777908.jpg“제가 대공께 그리 전한다면, 제 목이 온전하겠습니까?”

그가 떨리는 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며 말했다.

16558447871151.png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공포에 잠긴 눈. 약속 하나에 제 목이 걸려 있다고 말하는 창백한 입술. 한 번 만나 티타임을 가지자 따위의 가벼운 약속이 아닌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며 여전히 무릎 꿇은 백작을 응시했다. 입안은 마른 침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바싹 메마르고 있었다.

16558447777908.jpg“저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두 분 사이에 이렇게 끼어 있기도 싫습니다. 애초에 저와 그런 말도 안 되는 결혼식을 올린 것은 합법적으로 대공 전하의 정부가 되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16558447777869.png“!”

굳어 있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탁, 풀려버렸다. 동시에 누군가 나를 절벽 아래로 팍! 밀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밑이 꺼져버린 듯한 선득한 느낌 속에서,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백작의 말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굳이 그 약속이 뭔지 확인하려 노에비안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내 시신 앞에서 슬퍼하던, 남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그런데…….

16558447777869.png‘……그래, 맞았구나. 내가, 아니 블리에가…… 이 블리에가…….’

그의 가신, 아카시아 백작의 입을 빌리자면……. 이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내 남편,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가 맞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