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호구 중의 호구, 아카시아 백작 부인2021.05.29.
백작이 애원하는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내가 대공비가 되기 전, 비앙카가 단단히 일러두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리엔, 혹시라도 대공께서 정부를 둔다고 할지라도…… 그저 모른 척해.’
다들 입 다물고 자신 역시 또 다른 애인을 두곤 하니까. 어머니가 없는 나를 위해 비앙카가 충고랍시고 그리 말했었다. 그때는 귀담아듣지 않았던 말이 백작의 흐느낌과 함께 가슴을 왕왕 울렸다. 가뜩이나 약해진 몸뚱이 때문에 주눅 들어 있던 내가 혼자 힘으로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을 수도 없었을 무렵에는…….
‘만약 건강하고 아름다운 다른 여인을 정부로 삼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수 있지?’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아주 가끔은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홀로 괴로워하다가도 그의 사랑이 담긴 선물이며 편지를 보고 안심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는 언제나 다정했고, 따스했으니까. 나를 정말 유리 인형처럼 섬세하게 대했으니까.
‘그런데, 왜?’
왜 하필 노에비안은 나를 이만큼이나 닮은 여자를 정부 삼았지? 얼굴, 키, 체형, 심지어 속눈썹 색깔까지 똑같은데. 도대체 무슨 새로운 점을 이 여자에게서 발견했을 거라고? 흑발이라면 이 나라에 차고 넘쳤다. 바깥을 지나는 이들의 태반이 검은색, 갈색 머리칼을 가졌다. 노에비안이 정말 지독히도 한결같은 취향이라 이 여자가 눈에 띈 것인가? 그렇다면 오랫동안 그와 내가 나누었던 애틋한 감정들은? 그가 강하게 원했다면 우리는 몸을 섞을 수 있었다. 신혼 초부터 내 몸이 그리 유리 같았던 것은 아니니까.
‘당신은 소중하니까.’
그 말이 긴장한 새신부의 몸과 마음을 덥히고, 이 사내야말로 온전히 믿고 함께할 나의 반려라고 믿게 했다. 20살, 나는 어렸었고. 28살, 그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으니까. 어린 신부를 얻은 대공 노에비안이 그 부인과 처가인 피레타 공작가에게 극진하다는 것은 귀족 사회 누구나 알만한 이야깃거리였다. 아드리엔은 사랑받는 대공비였다. 적어도 남편인 노에비안 트로비카에게는. *** 스산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닐은 지독한 냉기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제 주군인 로아드네스는 수도로 돌아온 이후 잠들지 못했다. 누가 보면 트로비카 대공비의 남편이 본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난이었다. 모두가 개황자의 변덕이라 생각했지만 2년간 그를 가까이서 모셨던 닐의 생각은 달랐다. 로아드네스는 대공비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 이유는 참 알기 쉬웠다. 제 눈앞에 지금 북부의 트로비카 영지보다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가.
“대공.”
마땅히 예를 갖추어야 할 황궁 안에서 맨몸에 붕대를 둘둘 감고, 팔에 깁스를 한 채 재킷만 툭 걸친 로아드네스가 싸늘한 표정으로 제 숙부와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갑시다.’
뒤에 서 있는 닐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숨을 참았다. 대공 노에비안의 핼쑥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위로해주고 싶을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대공 쪽에서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항상 날카롭고 서늘하던 푸른 눈 밑으로 시커멓게 그늘이 져 있는 데다 여위어 보였다. 반면 똑같이 핼쑥하지만, 온갖 빛은 다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로아드네스는 고개 숙이지 않았다. 빛을 받아 시뻘겋게 빛나는 눈동자는 자신과 비슷한 키의 숙부를 굳이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드리엔 피레타가 정말 죽었습니까?’
그 문장 하나만 내뱉으면 되는 것을. 오만한 표정과는 달리, 로아드네스는 입안이 온통 까끌까끌해 혀를 굴릴 수 없었다.
“승전 기념식이라는 쓸모없는 행사를 한다던데…….”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당연히 대공께서 자리를 빛내주시겠지.”
“…….”
뒤에서 닐이 입을 열지 말라는 듯 로아드네스의 재킷을 살짝 잡아당겼지만, 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대공이 직접 보낸 전장에서 승리했는데, 안 오면 내가 섭섭하지 않겠나?”
“아시겠지만…….”
노에비안의 푸른 눈이 정확히 로아드네스에게 향했다.
“제가 지금 상 중입니다.”
“…….”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야 해서, 이만 퇴궁하겠습니다.”
곧이어 거칠거칠한 노에비안의 음성이 싸늘한 복도를 울렸다. 로아드네스는 억지로 고개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가는 길. 그 말 한마디에 귓속이 멍멍해졌다.
“……조문을 가지.”
노에비안이 억지로 입만 웃어 보였다. 감사의 표시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미묘하고 슬픈 미소를 보인 노에비안이 이내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손발을 벌벌 떨며 이 이유 없는 기 싸움을 지켜보던 닐이 움직이지 않고 우뚝 서 있는 로아드네스에게 바짝 다가왔다.
“조문 다녀오셨잖습니까, 전하?”
“시신을 확인한 적이 없으니, 아직 조문한 게 아니지.”
“이미 대공의 귀에 전하께서 다녀가셨다는 보고가 들어갔을 겁니다.”
“상관없다.”
“그런데 전하, 대공이 장례 첫날 이후로 시신을 내놓지 않는답니다.”
조용히 있던 빈센토가 말을 꺼냈다.
“…….”
“황제 폐하께 직접 아뢰어, 대공비의 시신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싫다 했답니다.”
“워-. 꽤 세게 나오는 것 아닙니까? 세기의 로맨티스트라더니 역시…….”
“아무리 대공이라도 며칠이나 버티겠습니까. 돌아가신 레티나 황후 폐하께서도 피해가지 못하신 절차인데요. 정식으로 조문하시려면 절차대로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예……?”
“저 새끼가 시신을 내놓을 리 없어.”
“그게 무슨…….”
오래 참았던 숨을 내뱉듯,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리던 로아드네스가 돌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카시아 백작저에 그 엿 같은 승전기념식 초대장을 보내라.”
“갑자기요?”
“그쪽은 대공가의 가신이라 아마 불참하지 않겠습니까?”
주군도 안 가겠다는데 가신이 거기서 하하 호호 웃고 떠들 수 있을 리가요. 닐이 빈센토와 주거니 받거니 중얼거리다 문득 로아드네스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혹시……?”
“그 집 귀부인이 젊은 여인이라지. 그럼 항상 따라다니는 하녀 하나쯤은 있겠지.”
닐과 빈센토가 동시에 우뚝 멈춰서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이디 마지를 직접 만나시려고요?”
“갑자기 아카시아 백작가의 하녀는 왜……!”
대공이 사라진 복도를 우뚝 서서 한참 응시하던 로아드네스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 없이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 나는 한동안 충격으로 저택에서 칩거했다. 마지가 날라다 주는 신문이나 가십지를 뒤적이고 있긴 했지만, 의지가 사라졌고 힘이 펄펄 샘솟던 몸뚱이도 추욱 처졌다.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의 승전을 기념하며 열리는 무도회. 베일에 싸인 아름답고 위험한 미혼의 황자를 사로잡을 최신 유행 드레스와 모자 브랜드는?!」 가십지를 뒤적이자 온통 2황자 로아드네스의 이야기다. 얼마 전 서쪽 반란군의 잔당과 마물을 모조리 소탕한 그가 예정보다 일찍 수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귀족들에게 꽤 흥미가 도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2황자 로아드네스는 근 몇 년간 수도로 오는 일이 없었다. 대외적인 활동은 황태자 부부가 앞장서 하고 있고, 그 밑의 황자와 황녀들은 따로 친분이 있지 않은 이상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는 편이 아니었다. 2황자 로아드네스야 워낙 인물이 출중하다는 소문이 많아 가십지에 자주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그 역시 춤과 음악이 함께하는 파티보다는 공적을 쌓기 위해 전장을 나돌았다. 어쩌면 그 역시 형님인 황태자가 황제 위에 오르는 순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알토란 같은 땅의 대공이나 공작이 될지도 모르지.
‘노에비안이 그랬던 것처럼.’
노에비안에게로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두 분 사이에 이렇게 끼어 있기도 싫습니다. 애초에 저와 그런 말도 안 되는 결혼식을 올린 것은 합법적으로 대공 전하의 정부가 되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아카시아 백작이 내게 똑똑히 말했다. 블리에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는 노에비안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기 위해서라고.
‘웃기지도 않네.’
애초에 합법적인 정부라는 것이 어디 있다고. 그 말은 암묵적으로 미혼 남녀를 정부로 두지 않는 귀족 사회 관습에 따랐다는 말일 테다. 반려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정부를 두는 것에 참 너그러운 이 제국은 그 정부의 자격을 이미 혼인한 사람들로 특정하면서 죄악감을 씻어내는 것이다.
“하-.”
까맣게 모르고 있던 입장에서야 기분이 정말 더러웠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다. 다들…….
“마님. 가봉을 끝낸 드레스들이 도착했다 하는데요.”
“드레스?”
이어지는 비관적인 생각들을 끊은 것은 하녀, 요나였다. 하녀장 마지와 함께 나를 전담하는 요나는 이전부터 블리에를 그리 무서워하지는 않았는지 곧잘 말을 걸어오기도 하는 아이다.
“예, 저번에 분부하신 대로 다시 지어 올린 것이어요.”
나는 드레스룸에 빽빽이 자리 잡은 것들을 떠올렸다. 본래의 나는 외출복을 거의 입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품위 유지라는 명목과 노에비안의 선물로 꽤 많은 옷을 가지고 있었는데, 블리에는 저택의 규모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옷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 꼭 데뷔탕트를 치르고 싶으시다 하셨잖아요? ”
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자, 요나가 의아하게 물어왔다. 데뷔탕트라. 본래 데뷔탕트는 한 번이 아니라, 그 시즌에 열리는 파티에서 내내 치르는 것이다. 물론 본래의 나는 첫 번째 데뷔탕트 이후 곧바로 노에비안에게 청혼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파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직 데뷔탕트도 안 치렀다고?”
“그리 말씀하셨잖아요?”
“난 내가 스물두 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스물두 살이 되도록 데뷔탕트 한번 치르지 못한 게 너무 억울해 돌아가시겠으니, 격에 맞게 준비해주지 않는다면 저택을 다 불태워버리겠다고 하셨었잖아요, 백작님에게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실제로 내가 한 말도 아닌데, 부끄러워지는 것은 이 몸을 차지한 나였다. 블리에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찌 되었건 그녀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 내 드레스들은 어디 있지?”
*** 마담 르블레아의 의상실에서 일하는 마티어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호구 중의 호구라는 소리를 듣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청구서를 보며 눈썹을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보는 눈도 없고, 호구이긴 했지만 성질머리 하나는 대단했었지. 드레스 끝단 처리가 미흡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그녀가 던진 향수병에 머리가 깨질 뻔했던 일을 떠올리자 왠지 아찔해졌다.
‘그래도 제가 알면 얼마나 알려고.’
대단한 귀부인들을 속여먹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한미한 가문에서 대귀족들의 뒤꽁무니를 쫓으려 애쓰는 귀부인들은 속여먹기 딱 좋았다. ‘뭘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신데, 이 부분을 말할 것 같으면…….’ 하고 시작하면 화려한 언변에 속아 고개를 끄덕이는 부인들이 지천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 역시 그런 손님 중 하나였다. 재정과 맞지 않게 ‘가장 좋은 것으로.’ 혹은 ‘가장 화려한 것으로.’라는 오더를 내리고는 그것이 진짜 보석인지 아닌지도 구별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사기를 참, 합법적으로 치려고 수를 써뒀군.”
호구 중의 호구, 아카시아 백작 부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메인홀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