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위험한 초대? 가문의 영광!2021.06.02.
요나는 제 눈앞의 주인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하녀장 마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게 선 자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제 주인이 마치 대귀족가의 ‘귀부인’처럼 의상실에서 나온 하인 하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억지나 패악을 부리는 게 아니라 ‘꾸짖고’ 있었다. 아드리엔은 청구서 한 장 한 장에 해당하는 드레스 앞으로가 직접 모든 것을 지적했다.
“S등급 에메랄드라고?”
“예, 예 분명히…….”
“분명히?”
이미 서너 개의 드레스에서 지적을 받았지만, 마티어스가 또 한 번 부정하려 했다. 아드리엔이 가슴 부분에 큼지막이 달린 초록빛 보석 하나를 직접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대의 눈에는 이것이 S등급의 에메랄드로 보인단 말이지.”
“저, 저는 그저 운반만 할 뿐이라 등급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부인.”
“그렇다면 알려주지.”
아드리엔이 허리를 반쯤 접은 사내를 향해 친히 몸을 굽혀 얼굴을 가까이했다. 반짝거리는 연녹빛 눈동자와 마주하자 마티어스가 움찔했다. 귀부인의 얼굴을 이리 가까이서 본 적도 없거니와, 적대감 가득한 귀부인의 시선도 처음이었다.
“똑바로 보게.”
“예, 예.”
“최상급 에메랄드는 바로 이런 색깔이니까.”
아드리엔이 제 눈을 가리켜 그리 말했다. 짙은 초록색인 에메랄드 원석을 깎고 또 깎아 특수한 액체를 들이부으며 세공 하면 가장 깨끗한 청록빛을 머금은 최상급의 연녹색 에메랄드가 탄생한다. 마티어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사람을 시켜 떼어내고 바로 아래 등급의 에메랄드로 바꿔치기한 것이니. 그리고 본래의 에메랄드는 분명 아카시아 백작 부인의 눈과 그 색깔이 아주 흡사했다.
“예, 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아드리엔이 낮게 탄식하며 나머지 드레스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달려 있는 보석 중 몇 가지가 미묘하게 주문서와 달랐다. 어떤 것은 드레스 전체에 달린 보석이 원석에 가까운 볼품 없는 것들도 있었다. 빠르게 주문서를 스윽 훑어보자, 그저 ‘가장 비싼 것으로.’라고 휘갈겨 쓴 것들이 즐비했다. 잘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주문이었다. 혹은 값을 따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당연히 블리에는 전자의 경우일 것이다. 잘 모르니까 가장 좋은 것, 가장 비싼 것을 원했을 것이고. 하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이런 것을 보아줄 어미 없이 공녀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했던 아드리엔은 달랐다. 오빠의 약혼녀였던 비앙카를 따라다니며 보는 눈을 키워왔고, 합리적으로 좋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을 길렀다. 아무리 피레타 공작가가 동부 제일의 부호라 할지라도, ‘몰라서’ 돈을 도둑맞고 싶지는 않았다.
“아, 아무래도 제가 잘못 가져온 모양입니다, 부인. 오늘 저녁까지 부인의 드레스를 새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됐네.”
귀부인이 조용히 고개를 젓자, 마티어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담 르블레아는 수도에서 이름난 디자이너이고, 귀부인들은 그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직원의 실수라 하는데 굳이 그녀에게 항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등급 낮은 것이 붙어 있는 것들만 가격을 제하여 다시 돌려받고, 마담에게 직접 사과를 받아야겠어.”
“예?!”
마티어스의 주인인 마담 르블레아는 이 사실을 절대로 모른다. 그가 몇몇 귀부인들의 드레스에서 보석을 바꿔치기하여 뒷돈을 만든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부인이 돈을 돌려달라고 의상실에 요청하면 마담 르블레아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그가 떨리는 손을 공손히 부여잡고 청했다.
“오, 온전히 제 실수이니, 부인. 노여움을 푸시고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이 보석을 공급한 보석상은 물론이고, 마담에게도 직접 말씀드려서 제대로 된 드레스를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마담이 알기 전에 다시 보석을 바꿔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마티어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직 해결할 기회는 있는 것이다. 가지고 온 이 행거들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다시 보석을 바꿔 달기만 한다면!
“아니, 나는 드레스에는 불만이 없네. 그저 보석이 제 등급보다 너무 터무니없는 값을 받고 있으니 차액만 돌려받고자 하는 것이지. 알아서 계좌에 넣어주기만 하면 될 문제인데 공연히 번거로울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신뢰의 문제이니, 마담의 시간이 부족하다면 서면으로 사과해도 좋네.”
***
“마지 님, 아까 그 직원 표정 보셨습니까?”
“다 죽어가던데-. 마님,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드셨다면 돌려보내시고 사과의 뜻으로 더 고급 드레스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셨습니까?”
왜 그랬느냐 물어보면서도 요나와 주거니 받거니 쌤통이다 말하던 마지의 표정이 엄청나게 밝았다. 달라진 내 모습 때문인지 가끔 부인, 부인하면서 은근히 선을 그었던 마지가 어느새 마님이라 부르며 내게 살갑게 굴었다.
“아니, 지금의 내 격에 최상급 에메랄드가 달린 드레스를 입으면 쓸데없는 주목만 받지.”
직원의 행태는 괘씸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꽤 괜찮았다. 나는 사용인들 앞에서 위엄을 보이려 애쓰느라 잔뜩 힘을 줬던 몸을 노곤히 풀었다. 블리에의 건강하고 지치지 않는 육체에 취해 잘도 그리했다. 꿈만 같았다. 잠깐이지만 건강했던 시절의 나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작가의 재정에 이미 혼인한 백작 부인의 데뷔탕트에 그 정도로 쓸 수 있는 돈이 있을까. 대공비 아드리엔의 얼굴이 사교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눈에 띄어 내 얼굴을 아는 이를 만난다면 곤란해질 것이 아닌가. 데뷔탕트를 피할 수는 없다. 귀족 출신이 아닌 듯한 블리에가 데뷔탕트도 하지 않고 얼렁뚱땅 늙은 아카시아 백작의 부인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데뷔탕트 시즌을 이용해 어떻게든 노에비안을 만나봐야 하고.’
“지금은 쓸데없이 주목받아 좋을 것이 없어. 그저, 얼굴을 알리는 정도가 적당하지.”
“예에~?”
“왜…… 왜 그런 눈이지?”
그야, 언제든지 주목받는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정확히 그런 표정의 마지와 요나가 내 표정을 살폈다. 습관적으로 이마에 손을 얹으려는 그들을 내가 몸을 살짝 돌려 피했다. 평생을 공녀나 대공비로 살다가, ‘마님’이라 불리며 살갑게 대해지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나는 멋쩍은 시선으로 안으로 들여놓은 드레스 행거들을 보며 턱짓했다.
“그, 그런데 자세히 보니, 데뷔탕트에서 입기엔 노출이 좀 심하던데?”
“예, 딱 마님의 취향이시잖아요.”
요나가 해맑게 답했다. 아, 앞뒤가 사정없이 푹 파인 그 드레스들은 블리에가 싸놓은 똥이었나보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거기에 어울릴만한 숄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드레스룸의 몇몇 숄을 떠올리자 딱 오페라 가수와 다름없는 번쩍이는 화려한 자태가 예상되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입고 돌아다녔다간, 눈에 띄지 않기는커녕 온 시선이 다 따라붙을 거야.”
“‘이런 미모를 뽐내지 않는 것은 죄악이잖아.’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요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블리에 이 여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한 걸까. 옷도 옷이지만, 굵직한 파티에만 참여하는 노에비안을 만나기 위해선 아까 가십지에서 봤던 승전기념식만큼 좋은 데뷔탕트 자리도 없었다.
“승전기념식에 가야 하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지는 ‘네가 그런 꿈을 꾸고 있었느냐.’라는 표정을, 요나는 살짝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저, 근데…… 승전기념식은 내일인데요. 마님…….”
“음?”
촉박하구나. 그래도 입고갈 드레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초대장이…… 없어요.”
“뭐?”
빨리 노아를 만나야 하는데! 초대장조차 받지 못했단 말인가? 너무 한미한 가문이라 초대받지 못한 건가? 대공비 시절에는 쉽게 받을 수 있었던 초대장이었는데, 이곳은 아니었나 보다.
“백작님은?”
“예? 주인님께서는 내내 집무실에…….”
“어찌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봐야겠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당장 내일이 승전기념식이라니. 아카시아 백작이 이런 굵직한 기념식의 초대장을 바로 받을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을까?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저택 입구에서 노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마님! 마님!! 마님, 마님!!”
멈춰선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흥분한 표정의 마지가 집사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를 빼앗고는 팔랑였다.
“맙소사! 왔어요! 왔어! 승전기념식 초대장이 드디어 아카시아 백작저에도 왔다고요! 이런 영광이!”
“뭐……?”
이 밤중에 황가에서 초대장이 왔단 말인가. 아카시아 백작에게 부탁해 무슨 수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내일 당장 무도회에 참석하실 수 있어요! 맙소사, 제가 30년이 넘게 이곳에서 일했지만 이렇게 큰 무도회에 백작 부인께서 초대받은 건 처음이라고요!!”
마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너도나도 초대장을 구경하려 애썼다. 차마 나보다 먼저 열어볼 수는 없었던지 마지는 상기된 얼굴로 뜯어보지도 않은 초대장을 팔랑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용인들을 이끌고 다니며 상기된 마지의 얼굴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나는 함께 기뻐하는 사용인들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움켜쥐었다.
‘설마 노에비안이 보낸 걸까?’
며칠간 번뇌 속에 살던 나는 결국 마지막으로 노에비안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노아, 난 당신에게 직접 들을 거야.’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거야. 당신과 나의 시간은 처음 보는 다른 사람들의 말 몇 마디로 쉽게 무너질만한 그런 것이 아니잖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