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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사내의 힘 (10/171)

10.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사내의 힘202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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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 긴장했다. 나는 이미 데뷔탕트를 치렀지만 그때는 샤프롱도 있었고 아버지와 오빠가 든든히 내 뒤를 지켜주기도 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16558448344038.jpg“제, 제가 꼭 가야겠습니까?”

16558448344044.png“…….”

16558448344038.jpg“……가야겠지요, 예.”

딱 죽기 직전인 아카시아 백작뿐이다. 직계 황족의 대다수가 참여하는 이런 큰 파티에 가는데 나 혼자 파트너 없이 갈 순 없었으니까. 많은 영애들이 이곳에서 오늘 데뷔탕트를 겸하겠지. 파티에서 에스코트를 해줄 멋진 신사는 필수였지만, 이 역시 내 선택권 밖이었다. 나는 블리에가 주문한 드레스 중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었다. 물론 ‘블리에가 주문한’ 드레스 중에서 고른 것이니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데뷔탕트 드레스와는 맞지 않았다. 등에는 거의 옷감이 없다시피 훅 파여 있었고 앞부분도 못지않아서, 요나는 밤새 다른 드레스에 달려 있던 장식들을 바느질해 매달아야만 했다. 아침 일찍 마지가 그럴듯한 숄을 구해오지 못했더라면, 명색이 데뷔탕트인데 이브닝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차림으로 갈뻔했다. 얼굴도 과거에는 절대 하지 않을 법하게 치장했다. 궁색하지만 않게 해달라 했지만, 주인의 첫 데뷔탕트에 들뜬 하녀들이 요모조모 잘 꾸며주었다. 조금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하던 대로’ 해달라 했기에 블리에가 선호하는, 내 기준에서는 조금 진한 화장을 했다는 것이다. 블리에는 자신의 매력을 관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십지나 잡지 표지에 그려진 극단 여배우 같은 그런 고혹적인 느낌 말이다. 본래의 몸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치장이었지만, 블리에가 ‘하던 대로’ 하자 나름 잘 어울렸다. 이리 꾸미니 아드리엔의 얼굴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더라도 단번에 아드리엔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날 알아볼지도 모르는 몇몇 대귀족들을 벗어나 노에비안에게 슬그머니 다가가기에는 제격이라는 소리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지와 요나, 그리고 다른 하녀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응원했다. 심지어는 노집사마저 멀찍이서 눈을 빛내고 서 있었다. 처음 저들을 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환대였다. 드문드문 과거의 기억을 벗어나지 못해 나를 무시하거나 선을 넘을 것처럼 지나치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제 주인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생기는지 나를 꽤 챙겼다.

16558448344044.png‘‘가문의 영광’이라는 승전기념식에 초대받은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요나가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왠지 마음이 몽글몽글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멀어지는 그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는데, 아카시아 백작이 나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수도 중앙 광장을 지나, 점점 길이 막히기 시작하는 황궁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 한숨 소리는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황궁과 가까워질수록 희게 질려갔다.

16558448344038.jpg“저, 부인. 혹시 제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부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잘 놀다가 오십시오.”

16558448344044.png“……네?”

16558448344038.jpg“후, 후, 후-!”

짧게 여러 번 호흡하던 아카시아 백작이 품에서 작은 원통형 틴케이스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싸한 향기가 나는 것을 보니 긴장을 완화해주는 약인 듯했다. 아주 가끔 얕은 발작이 일 때 내가 먹어봤던 것이기에 눈에 익었다.

16558448344044.png“긴장되시나요?”

16558448344038.jpg“그것을 말씀이라고……!”

아카시아 백작의 원망 섞인 호박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그가 단 한 번도 나를 자신의 부인처럼 대하지 않았기에 나는 더 이상 그의 앞에서 긴장하지도, 그렇다고 공손하지도 않았다.

16558448344038.jpg“주신이시여, 부디 모든 영광을 가지시옵고…… 당신의 어린 양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돌연 그가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참 신실하기도 하지. 나는 반듯하게 앉아 아카시아 백작이 노쇠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문 외는 것을 응시했다.

16558448344038.jpg“부인께서는 이미 혼인을 하셨으니, 샤프롱이 없더라도 다들 이해할 겁니다.”

16558448344044.png“저도 알아요.”

안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는 표정이 돌아왔다. 블리에라면 모를 법도 했다. 나는 그저 드러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승전기념식 파티는 꽤 성대하게 치러지는지 입구에서부터 마차가 줄을 이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우리는 입구에 발을 디뎠다. 블리에는 그리 큰 키가 아니었지만, 아카시아 백작이 워낙 작달막한 데다 내가 높은 구두를 신어 우리는 키가 얼추 비슷했다. 파티 입구에는 종 치며 입장을 알리는 시종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를 아주 낯선 표정으로 스윽 훑었다. 마부가 초대장을 건네고, 시종이 초대 명단과 그것을 한참 번갈아 보더니 떨떠름하게 종을 치며 우리를 호명했다.

16558448344038.jpg“아카시아 백작 부부 입실!”

과연, 아카시아 백작 부부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지 파티장은 시끌벅적했다. 건강이 악화되기 전 두어 군데 참석했던 파티에서 노에비안과 등장했을 때는 모두가 우리를 주목했기 때문에 일순 조용해졌었다. 지금은 가끔 나를 힐끔대는 시선은 느껴졌지만 그때에 비하면 시종들이 열심히 나르고 있는 샴페인보다도 못한 관심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벽 쪽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고 있는 내내 내가 붙잡고 있는 아카시아 백작의 팔이 자르르 떨렸다. 나 역시 겨우 가라앉혔던 긴장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백작까지 이러니 점점 스트레스였다.

16558448344044.png“……진정하세요, 백작님.”

16558448344038.jpg“대, 대공께서 아직 안 오셨나 봅니다.”

내가 부채 뒤에서 조용히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백작은 진정하기는커녕 제 입으로 내뱉은 대공이라는 단어에 자신이 놀라고는 입을 합 다물었다. 덜덜 떠는 그가 가여워 보일 때쯤이었나. 댕-! 댕-! 댕-! 입구에 서 있던 그 건방진 시종이 종을 3번 울렸다. 잠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고, 친분이 있는 이들과 깔깔거리던 이들도 입을 다물고 까마득한 입구의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16558448344038.jpg“위대한 대제국, 론타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입실! 제국의 희망이신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 비전하 입실! 그리고 이번 서쪽 반란군을 토벌하여 공적을 세우시고 제국의 강대함을 보여주신 2황자 전하 입실! ”

늙수그레해진 황제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황후가 동시에 들어오자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뒤이어 등장하는 황태자 부부까지 이어진 박수는, 2황자 로아드네스가 등장하자 절정에 달했다.

16558448344038.jpg“아아-! 저는 2황자 전하는 처음 뵈어요!”

16558448344038.jpg“저도요. 와아……. 어찌 저렇게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생기셨지? 그런데, 눈이……?”

16558448344038.jpg“쉬이! 조용히!”

수군대는 어린 영애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시선이 홀 전체를 훑자 나도 모르게 아카시아 백작의 뒤에 숨어 부채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쿵! 쿵! 쿵! 쿵!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름만 드높던 로아드네스 2황자의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 2황자가…….

16558448344044.png‘미친.’

얼마 전 내 비석 앞에서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울던 바로 그 남자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카시아 백작의 어깨 너머로 슬그머니 눈만 뺐다. 로아드네스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황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황태자도 준수했지만, 그는 준수함을 넘은 ‘아름다움’이었으니까. 번쩍이는 백금발에, 맹수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은 느른하게 풀려 있었고 오만한 표정과 관능적인 입술은 탕아라 불리는 모습 그대로였다. 틀림없다. 묘지에서 봤던 그 남자가 분명하다.

16558448344038.jpg“그럼, 오늘은 승리의 기쁨을 자축하며 마음껏 즐기는 자리가 되기를!”

환대의 말을 하고, 로아드네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치하하던 황제가 샴페인 잔을 들어 외쳤다. 동시에 홀에 모인 모든 사람이 샴페인을 들고 외쳤다.

16558448344038.jpg“주신께 영광을! 론타에 번영을! 황제께 충성을!”

16558448344038.jpg“주신께 영광을! 론타에 번영을! 황제께 충성을!”

다시 한번, 박수갈채가 터졌다. 모두가 샴페인을 입에 머금으며 웃었다. 흐뭇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황제와 황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계단 밑에 자리 잡은 악단들이 악기를 조율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홀의 중심을 비우고 공간을 만들었다. 승전 기념식의 주인공인 2황자 로아드네스와 황태자 부부가 홀까지 친히 내려왔다.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마다 낮은 비명이 쏟아졌다.

16558448344044.png“!”

나도 모르게 벌벌 떨고 있는 아카시아 백작의 팔을 꼭 붙들었다. 새빨간 눈과 정면으로 딱! 마주하자 맹수 앞에 놓인 먹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오만하고, 서늘하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16558448344044.png‘안 돼, 안 돼! 오지 마!’

이쯤 되자 내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인지, 백작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서로가 무서워하는 대상은 달랐지만, 우리는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색이 된 내 얼굴을 겨우겨우 부채로 감추고 이미 사시나무나 다름없는 아카시아 백작의 뒤에 숨어 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얼굴을 본 게 분명한 로아드네스가 제 근처로 다가온 영애 하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더니 곧바로 춤을 청한 것이다. 그의 얼굴이 아주, 지나치게 굳어 있었는데도,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든 금발의 소녀가 냉큼 그 손을 잡고 홀의 가운데로 들어섰다.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자 황태자 부부와 2황자 일행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16558448344044.png“하아-.”

십 년 감수했다. 걱정과는 달리, 그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그때 그 묘지에 있던 사람이 베일에 싸여 있던 2황자 로아드네스였다니……. 왈츠의 선율이 절정에 이르자 나는 살그머니 눈을 빼 홀 중앙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녀가 가끔 비틀거리긴 했지만, 로아드네스는 음악에 맞추어 정말이지 완벽하게 춤을 췄다. 내 주변에 있던 젊은 영애들은 그의 손이 소녀의 허리나 어깨를 스칠 때마다 깊은 한숨을 신음처럼 내뱉었다.

16558448344038.jpg“으으-.”

그리고 내 곁에는 묘한 신음을 내며 식은땀을 닦아내는 아카시아 백작이 있었다. 우리도 곧 춤을 추러 나아가야 했다. 주최자의 첫 춤이 끝나면 손님들은 자신의 파트너와 곧바로 홀에 쏟아져 나가 춤을 추는 것이 파티의 룰이니까.

16558448344044.png“어디 안 좋으신가요?”

안정을 찾은 내가 그제야 백작을 챙겼다.

16558448344038.jpg“아……. 죄송, 죄송합니다.”

백작은 진심으로 미안한 듯한 표정을 내보였다. 첫 춤은 이미 끝나 있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귀족들 사이에 치여서 휘청휘청하던 백작이 식은땀을 겨우 닦아내었을까.

16558448344038.jpg“대, 대공 전하……!”

어느 지점을 향해 고개를 들던 아카시아 백작이 결국…….

16558448344038.jpg“꺄아아악-!”

16558448344038.jpg“이봐요!”

16558448344044.png“백작님!”

나만 들을 수 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살려, 살려 주…….’라며 긁듯이 애원하고는 쓰러졌다. 두 번째 춤곡은 빠르고 웅장한 음악이어서, 우리 쪽에만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나는 재빨리 아카시아 백작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벽에 기대어 까무룩 쓰러져 앉아 있기만 하고 일어서지를 못했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나이 든 귀부인들만 얕은 비명을 질렀는데 용케 그 소리를 들은 기사 하나가 다가와 백작을 눕혔다. 곧이어 그와 함께 있던 기사 몇이 백작을 휴게실로 옮기겠다며 업어갔다. 뒤따라가야 했지만, 나는 멈춘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6558448344044.png“……!”

사람들이 몰려든 그 틈에, 누군가 뒤에서 내 두 팔을 교차하여 한 손으로 가볍게 붙들었던 것이다. 숄이 떨어져 훤히 드러난 등줄기로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프지 않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사내의 힘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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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와 뒤섞인 라벤더 향기가 불쑥 코끝을 잠식했다.

16558448440255.png“……찾았다.”

동시에 바닥을 진동시키듯 낮은 목소리가 귓전에 강렬하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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