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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만에 하나 내가 아내를 잃으면 (11/171)

11. 만에 하나 내가 아내를 잃으면2021.06.09.

나는 세 번째 춤곡이 끝날 때까지 굳어 있었다. 날 결박한 커다란 손은 분명 장갑을 끼고 있을 텐데도 뜨거운 체온이 곧바로 전달되었다. 이대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정돈되고, 세 번째 춤곡마저 끝나면 주목받을 게 분명했다.

16558448529994.png‘안 돼.’

노에비안을 만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주목받아서는 안 되는데……!

16558448530001.jpg“레이디 마지가 어떻게……?”

16558448529994.png“!”

레이디 마지라니. 낯선 호칭으로 나를 부른 사내는 아카시아 저택으로 내 호구조사를 하러 왔던 기사, 닐이었다. 닐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결박당한 팔을 풀려 애썼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뜨거운 손에서 힘이 슬그머니 풀리자 살짝 고개를 틀어 뒤를 보았다. 번쩍이는 붉은 눈과 마주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나와 마주친 남자의 동공이 훅 좁아졌다.

16558448529994.png‘닐을 보낸 게 이 사람이야.’

내가 그를 관찰하듯, 그 역시 나를 보았다. 그는 느리고 집요하게 당황한 내 표정 사이사이를 눈으로 헤집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해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했다. 그러자 느슨해졌던 팔이 다시 힘 있게 붙들리고 번쩍이는 금발이 내 관자놀이를 스칠 만큼 가까워졌다. 그가 여전히 뒤에 서서 말했다.

16558448530013.png“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16558448529994.png“!”

제국의 탕아. 황실의 문제아. 전장의 악마. 피를 부르는 붉은 늑대. 가십지에서 봐왔던 그를 향한 수식어는 거짓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지금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게 누구인데, 귀부인의 팔을 뒤에서 결박하고 놓아주지 않는 게 누구인데……! 우리를 둘러싼 그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춤곡이 흘러나오고 있더라도 그에게 붙잡힌 내 얼굴을 모두가 주목했을 것이다.

16558448530013.png“파트너가 없어 곤란해 보이는데.”

그 파트너를 따라가 보살펴야 하는 상황과 제 수하들이 옮겨놓은 내 파트너를 처음부터 본 적 없다는 듯 여상히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감미로워 이질적이었다.

16558448530013.png“……도움이 필요합니까?”

16558448529994.png“아니요!”

크게 울려 퍼지는 춤곡에 맞춰, 내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여전히 우리를 가려주며 힐끔대던 닐이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도리질 치는 것이 보였다. 로아드네스가 제 쪽으로 나를 살짝 더 끌어당겼다.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그가 내쉬는 숨결이 다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16558448530013.png“……도움이, 필요합니까?”

더 음산해진 목소리에 나는 바짝 긴장해 고집스럽게 도리질을 쳤다. 내게 필요한 건 이 남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 남자가 사라져, 노에비안을 찾는 것이다. 곧이어 춤곡이 점점 끝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를 가려주던 그의 기사들이 거짓말처럼 하나, 둘씩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16558448529994.png“자, 잠깐만! 이것 좀! 이것부터 좀 놔주세요!”

16558448530013.png“……도움이 필요합니까?”

음산하지만, 정중한 목소리가 귓전을 계속 울렸다.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이 솜털 하나하나를 강제로 곤두세우고 몸 전체를 꽁꽁 사로잡는 것 같았다. 춤곡이 끝나는 소리와 함께, 내가 자포자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48529994.png“네, 도움이 필요해요. 그러니 제발 놓아주세요.”

탁-. 이를 악물고 말하자 나를 죄고 있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렸다. 곧이어 멍했던 귀로 들리는 소리가 물속을 벗어난 것처럼 선명해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지척에서 들렸다.

16558448529994.png“……!”

아까와 같이 오만하고 서늘한 표정의 로아드네스가 어느새 내 앞에 있었다. 우리를 가려주던 기사들은 온데간데없이 흩어졌다. 내 앞으로 불쑥 그의 손이 뻗어져 나왔다. 하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긴 팔과 목을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어찌나 큰지, 눈을 마주하려면 고개를 까마득히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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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다섯 번째 춤곡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이, 손을 뻗은 그와 내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16558448530013.png“당신의 첫 춤을 내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가장 처음 춤췄던 소녀에게는 이런 말을 건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붉은 눈의 맹수는 너무 정중해서 자칫 오만하게 느껴지는 태도로 내게 말했다. 거절하면 더 큰 주목을 받는다. 나는 내게 내민 손을 황급히 잡았다. 단단하게 그러잡은 손이 물 흐르듯 나를 홀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다섯 번째 춤곡은 그와 내가 자리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시작했다. 곧바로 그의 손이 벌거벗은 내 등줄기에 와닿았다. 머리끝까지 쭈뼛 곤두서는 느낌에 내가 조금 버벅댔지만, 로아드네스가 자연스럽게 나를 리드하자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내 눈앞을 가득 채운 그의 훈장들을 보려 애썼다. 얼굴을 마주하는 동작에서도 차마 그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미끈하게 잘 빠진 그의 목만 바라보았다. 등에 닿은 그의 손은 내 팔을 잡았을 때만큼이나 뜨거웠다. 그리고 어쩌면 노에비안이 이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나를 잠식했다.

16558448529994.png‘로아드네스 2황자.’

이 황자는 도대체 본래의 나를 어찌 알기에 묘지에 있었지? 닐이 이 황자에게 내가 마지라는 이름의 하녀라고 보고했다면 어째서 하녀가 이 자리에 있냐고 묻거나, 왜 사람을 속였느냐고 화를 내야 정상이 아닌가?

16558448529994.png‘도대체…….’

한참 정신없이 생각을 더듬어보는데, 더운 숨과 함께 지극히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내 정수리에 쏟아졌다.

16558448530013.png“마지, 성도 가지지 못할 만큼 비천한 신분이라 들었는데.”

16558448529994.png“…….”

16558448530013.png“관심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빙그르르 돌렸다. 어릴 적 착실하게 춤을 배웠던 나는 조금 휘청이긴 했으나 곧바로 안정을 찾았다. 미묘한 표정을 한 로아드네스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8448530013.png“당신과 닮은 사람과 나는, 이곳에서 첫 춤을 추었습니다.”

내게 그 추억을 다시 선물해주어 고맙습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 그가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8448529994.png“!”

나는 얕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대번에 나를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라 칭했다. 아카시아 백작가의 하녀라는 거짓말은 당연하게도 도루묵이 된 것이다. 하녀가 이런 옷을 입고 이렇게 춤을 출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16558448529994.png‘본래의 내가, 이 황자와 춤을 추었다고?’

아드리엔의 몸으로 이곳에서 춤을 췄던 적은 딱 한 번. 20살 첫 데뷔탕트 때였다. 신년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가면무도회에서.

16558448529994.png‘그날 내가 누구와 춤을 췄지?’

그날 춤을 췄던 건 오로지 오빠인 그레고리와 노에비안뿐이었는데? 맞닿은 그의 손과 내 등의 열기와는 달리, 그는 지나치게 바짝 붙지도 그렇다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 적절한 간격을 유지했다. 마치 나의 첫 데뷔탕트 때 노에비안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긴장하던 몸을 풀고, 데뷔탕트 시절, 열여덟이었던 나를 회상하며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게 춤을 이으려 애썼다. 로아드네스와 나의 춤은 마치 매번 맞춰봤던 사람들처럼 잘 맞아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춤곡이 끝나갈 무렵,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 로아드네스가 다시 내게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할 때쯤이었다. 나는 기묘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위로 했다. 깎아놓은 듯한 로아드네스의 턱을 지나 얼굴을 더 들자, 높은 계단 위에서 나와 로아드네스를 응시하는 노에비안의 푸른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16558448529994.png“!”

너무 놀라서 딱 멈추어 서버리고 말았는데, 타이밍 좋게도 춤곡이 끝났다. 나는 곧바로 로아드네스의 단단한 가슴을 살짝 밀어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무리 틈에 섞였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16558448530013.png“부인!”

로아드네스의 낮은 외침이 들렸지만, 노에비안과 시선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16558448529994.png‘기회를 놓치면 안 돼.’

당신을 만나야 해. 당신을 만나서 무엇이든 확인해봐야 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여섯 번째 춤곡에 맞춰 춤을 추려는 사람들의 파도를 거슬러, 나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 노에비안을 놓친 나는 파티 홀 밖으로 나가서 정원을 달렸다. 추위로 인해 오들오들 떨면서도 노에비안을 찾기 위해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파티 홀 건물의 외벽을 훑으며 테라스가 모여 있는 곳들을 살피자, 수많은 테라스 중에서도 바깥쪽 커튼을 치지 않은 곳이 보였다. 그곳에 홀로 비죽 솟아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미친 여자처럼 외벽 계단을 올랐다. 비상문을 열어 여러 겹의 암막 커튼을 젖히고, 아까 내가 빠져나왔던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차가운 손 하나가 내 팔뚝을 잡아챘다.

16558448529994.png“악!”

나는 순식간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던 테라스 하나에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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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8448633264.png“이런 식으로 계속 애만 태울 건가, 블리에?”

나를 잡아끈 사람은 노에비안이었다.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 나는 놀라기도 전에 소름부터 오소소 솟았다. 추워서? 그래, 물론 그것도 맞았지만. 장례 첫날에 나를 못 본 척하던 그가 정확하게 블리에의 이름을 부른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두 팔뚝이 강하게 붙잡힌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16558448529994.png'나를 알아볼까?'

블리에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인지라도 할까? 노에비안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진동한다. 그는 술을 꽤 많이 마신 듯했다. 서슴없이 꽉 붙들어 잡는 팔과 바짝 다가온 하체. 내 귀에 들릴 만큼 쿵쾅이는 심장까지. 테라스는 정원만큼 추웠지만, 나는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애초에 머리 손질은 하지도 않은 듯 대충 묶어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깊은 눈두덩이는 한층 더 음울한 빛을 띠고 있다. 정말 그답지 않았다. 항상 완벽했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아니었다.

16558448633264.png“대답하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가?”

그가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명 노에비안이 맞는데, 내가 아는 그 노에비안이 아니다. 그는 대답 없는 내게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자비라도 베풀듯 부드럽게 인상을 폈다.

16558448633264.png“약속, 안 지킬 건가?”

약속.

16558448529994.png‘도대체 그 빌어먹을 약속이 뭔데.’

또다시 울컥 목소리가 튀어 나가려 했다. 노에비안, 나는 뭐야? 나는 뭔데 당신이 내게 이러는 거야? 블리에는 정말로 당신의 정부야? 다 죽어가기 직전인 아카시아 백작이 하는 말들이 정말 당신의 뜻이야? 입안에서 마구잡이로 터져 나오려는 말들을 꼭 말아 물고,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58448529994.png“……무슨 약속이요?”

며칠 내내 나를 괴롭혔던 그 ‘약속’부터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내 팔을 잡은 노에비안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이었다. 짙은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아드리엔의 눈으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격한 모습에 나는 정신없이 그 얼굴을 살폈다.

16558448633264.png“이렇게 나올 거야?”

16558448529994.png“……무슨, 무슨 약속이요?”

16558448633264.png“1년 전에 우리가 한 약속.”

16558448529994.png'그러니까,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야 노에비안.'

아드리엔의 몸으로 노에비안과 결혼한 지 2년. 그리고 블리에와 노에비안은 1년 전에 무슨 약속을 했단다.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는데?

16558448633264.png“그걸 굳이, 아내를 잃은 내 입으로 이야기해야겠어?”

노에비안이 아까의 사나운 얼굴은 지우고 슬프게 속삭였다. 단단히 붙들려 있던 두 팔이 거짓말처럼 탁, 풀렸다. 그가 길쭉한 몸을 돌려 내 팔 대신 테라스 난간을 꽉 그러잡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토악질이라도 하는 표정으로. 나는 아내를 잃었다는 그의 말에 몸 안에 있는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16558448529994.png“……말해주세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들을 수 있을까? 내 억지에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지만 끝까지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테라스 아래 정원으로 떨어뜨렸다.

16558448529994.png“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내가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난간을 붙잡은 손이 바르르 떨리더니 그가 돌연 내게 다시 다가왔다.

16558448633264.png“만에 하나 내가 아내를 잃으면…….”

그리고 반쯤 으르렁대며 내게 말했다.

16558448633264.png“……네가 온전히 내 정부가 되겠다고 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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