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단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2021.06.12.
머릿속에서 누군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죽은 아드리엔,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내 비명이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지만 내게는 귀가 찢어져라 들리는 소리. 한순간 숨이 턱 막힌다. 생각이라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근거 없는 말이 아닌 그에게서 직접 듣는 말은 내게 다가오는 충격의 정도가 달랐다. 잔잔히 들끓는 눈을 한 노에비안이 한숨과 함께 계속해서 말을 쏟아낸다.
“아드리엔이 죽고 나는 따라 죽을까 생각해봤어. 그러다가 생각했지. 아드리엔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그러다 보니 당신 생각이 났어. 당신을 보면……. 젠장, 아드리엔이 떠올라!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래, 힘들고 괴롭겠지. 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나는 괴로웠어.”
“…….”
“아드리엔은 매일 아파하고 힘들어했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만큼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모른다. 그래, 아마도 나는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아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내가 본 노에비안의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은 장례식장에서 죽은 내 시신을 보고 오열하는 얼굴이니까. 그리고 지금 아드리엔을 따라 죽고자 했다는 낮은 절규니까. 나는 제 부인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다른 여자를 정부로 삼겠다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을 말하면서 정부를 원하는 사내의 얼굴. 낯설다. 한순간, 꿈같기도 했다. 이 몸으로 깨어난 뒤로 나는 매 순간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했지만, 지금만큼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없었다. 빈틈없이 완벽한 노에비안 트로비카. 금욕적이고 시니컬하지만, 제 부인에게는 다신 없을 정성을 쏟아부었던 그 노에비안이 맞나?
“……그러니까, 저와 밤을 함께하고 싶다는 건가요?”
떨리는 블리에 아카시아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나는 이미 다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마음을 무시하고, 다시 확인하려 애썼다. 그는 알아채지도 못할 ‘아드리엔’이 주는 기회였다. 삭막한 대공저에서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댔던 남자. 나의 병이나 괴로움보다 나라는 사람 자체를 지지하고 응원해줬던 유일한 사람. 나의 자랑이자 사랑이었던 노에비안 트로비카.
‘지금이라도, 블리에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줘요. 노아.’
제발 다 거짓말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죽은 대공비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태어나 남긴 족적이 아무것도 없어서, 비웃고 깔아뭉개려는 것일 뿐이라고.
“하, 하하…….”
노에비안이 자조하듯 한쪽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소리로 웃더니, 돌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시커메진 푸른 눈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술에 취해 풀린 눈이었다. 그리고 책에서만 봤던 그 ‘정욕’에 휩싸인 눈이었다. 아픈 아드리엔과는 단 한 번도 나누지 못했던 어른의 사랑을, 이 몸과 나누고 싶어 하는 게 분명한 어른의 눈.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온몸을 훑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몸이 더 떨려온다.
“그대는 나를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로 만들고 싶은가 보군.”
“……아닌가요?”
아니라고 말해줘요, 제발. 나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간절하게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 표정이 그를 더 부추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편의 품인데, 왜인지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맞아, 나는 당신을 원해.”
“!”
서늘한 품 안에서 나는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맞아, 나는 당신을 원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는 사랑 고백은 정말이지 비참할 만큼 쓰고 아팠다.
“단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아드리엔,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아드리엔보다…….”
낯설게, 하지만 착실히 끓어오른 푸른 눈은 나를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을 원해.”
“!”
이윽고 알코올 향 가득한 입술이 내게 겹쳐졌다.
그의 눈빛만큼이나 강렬한, 집어삼킬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내가 아는 노아가 아드리엔에게 하는 입맞춤이 아니었다. 다정하거나, 애틋하지도 않았다. 그저 뜨겁고, 향기는 독했다. 그가 마신 독한 술이 내 입 안을 온통 아리게 할 만큼. 아드리엔에게는 제 숨을 모조리 불어넣어 줄 것처럼 굴던 노에비안이, 블리에에게는 모든 숨을 다 앗아갈 것처럼 빨아들였다. 나는 멍하니 노에비안에게 붙들려 입술을 내어주고 눈물만 흘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집요하게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맞추고 숨을 앗았다. 그토록 그리던 넓은 품, 언제나 부족했던 입맞춤이었지만……. 심장이 다 찢길 만큼 아프고 잠깐 들이켰던 샴페인이 역류할 만큼 역겨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밀어냈을 때, 나는 테라스 아래에서 우리를 보고 서 있는 로아드네스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그의 번쩍이는 붉은 눈동자는 색깔과는 정반대로 싸늘했다. *** 나는 취한 노에비안의 테라스에서 벗어나 2층 복도의 비상문을 열고 달렸다. 노에비안은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나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도 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잡지 않았고 어떤 시선도 느끼지 못했으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
그 어떤 비명보다 끔찍한 침묵이 내가 달려온 으슥한 정원 구석에 고였다. 나 역시 그곳에 고여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엔 없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폐쇄된 회랑 외부. 유리창에 비친 블리에의 모습을 보자 울컥 솟아오른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나는 울고 있는 블리에의 얼굴을 외면한 채 회랑 벽에 등을 기대어 몸을 무너뜨려 앉았다. 얼른 마차를 타고 돌아가야 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으…… 흑…….”
원망스러울 만큼 밝은 달빛을 가려주는 곳에서, 나는 추위와 배신감에 떨며 울고 있었다. 뚝, 뚝. 메마르고 어둑한 바닥을 적시는 눈물방울 위로, 그보다 더 어둑한 그림자가 졌을 무렵…….
“!”
나는 내 눈물 자국을 가린 그 짙은 그림자가 정원수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심장이 발치에 툭, 구르는 기분과 함께 고개를 들자.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 빌어먹을 도움을 운운하며 서 있는 남자가 눈 안 가득 들어찼다. 정중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그래서 더 오만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던 목소리는 홀에서 들은 것과 같은데, 아까보다 훨씬 싸늘한 분위기의 남자가 내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2황자, 로아드네스였다. ***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 제발 혼자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벌떡 일어나 그를 마주한 지 한참 흘렀을까. 로아드네스가 오만하게 손을 까딱하자 있는 줄도 몰랐던 닐이 그의 뒤에서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로아드네스는 닐에게서 받아든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너무도 느릿하게 한 행동이라 나는 숨만 겨우 쉬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
로아드네스가 땅에 내려놓은 것은 아주 낯익은 구두였다. 정확히는 내 장례식에 신고 갔다가 이 남자를 만나 도망치던 때 잃어버린 검은 구두.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제야 나는 왠지 차게 느껴졌던 발을 확인했다. 아, 아 정말 싫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겁니까, 아카시아 백작 부인?”
고개를 살짝 기울인 로아드네스의 금발이 역광을 받아 금가루라도 뿌린 듯 반짝였다. 구두를 남겨놓고 도망친 나도, 백작저로 찾아온 닐에게 거짓을 말했던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여상한 얼굴. 움푹 패인 눈두덩이와 오만한 코끝 사이사이는 고개가 살짝 기울어질 때마다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지만, 푹 잠긴 목소리로 내가 답했다. 로아드네스의 커다란 손이 내 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 도움을 받아들이고 재빨리 구두를 신었다. 더 이상 맨발로 서 있을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황자는 묘지에 있던 내가 누구인지, 내가 닐에게 어떤 거짓을 말했든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자신을 보고 도망쳤던 나도, 닐에게 거짓말을 했던 나도 추궁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일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 구두를 전해주기 위해 따라왔는지도 모르지.
“이제…….”
구두를 다 신고,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로아드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꽉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날숨이 정수리에 닿을 만큼 가까워지고, 깜짝 놀란 내가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
“……당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때가 된 것 같지 않습니까?”
내 눈물로 젖었던 바닥을 기어가듯 낮은 목소리가 내 몸을 타고 올랐다.
“!”
다 알고 있으면서. 이 몸이 블리에 아카시아인 줄 다 알고 있으면서. 묘지에서 정신없이 도망쳤던 여자가 나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정중하고, 감미로운 낮은 목소리. 반대로 차가운 얼음을 품은 불같은 그의 눈이 정확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노에비안 트로비카와 그의 정부를 목도했었던 순간의 그 싸늘한 눈. 정확히 그 눈이다. 나는 밀려드는 수치심과 모멸감에 울컥, 눈물이 치솟음을 느꼈다.
‘이 남자가 다 봤다.’
다 봐버렸다. 굳어 있던 내 눈과 입에서 웃음도, 울음도 아닌 것이 흘러나왔다.
‘내가 누구냐고?’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요.”
그 순간, 고귀한 남자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도로 내 목구멍을 태우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목격한 남자에게, 더 이상의 거짓말이 무슨 소용일까?
“저는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예요.”
그리고 나는 결국, 그 불덩어리를 남자에게 내뱉고야 말았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붉은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와 이유 모를 흥분감으로 되는대로 다시 내뱉었다. 실상 아까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계속 원치 않게 마주치는 이에게 화풀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정부로 살고 싶지 않은데…….”
말도 안 되는 뻔뻔함이 눈에서 솟구치는 눈물처럼 터져 나왔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으신가요?”
그토록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잖아. 내 치부를 모조리 보고도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내 상처를 들추어냈잖아. 굳이 내 정체를 알려 하고 자꾸 내 손을 잡잖아. 그런데 충격은 잠시, 누가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답고 날카로운 눈매가 살짝 휜다.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그래 보이는군요.”
홀린 듯 그것을 응시하던 나는 곧이어 여전히 이 붉은 맹수가 잡고 있던 손을 떨쳐낼 수밖엔 없었다. 그 맹수가 한없이 다정하고 감미롭게, 동시에 나를 죽일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잘도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곧바로 내 목을 조를 것 같은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