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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벗어라 (15/171)

15. 벗어라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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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49269395.jpg“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아카시아 백작 부인.”

집사 가스팔이 은근한 시선으로 눈짓을 하더니, 곧이어 응접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나는 숨이 턱 막히던 것을 억지로 쉬어냈다. 그리고 떨리는 다리로 응접실과 연결된 아드리엔의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 협탁 서랍에 있는 내 친정에서 가져온 보석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도.

165584492694.png‘그거라도 가져가야겠어.’

노에비안이 호스트로서 아드리엔을 추억할 무언가를 내게 준다면 그런 것이어야 했다. 친정에서 가져온 그 보석들 말이다. 나를 속인 그에게 너무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엇이든 내게 도움 될만한 걸 얻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침실 안은 내가 항상 누워 있던 그대로였다.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은 걸로 보아서 매일 쓸고 닦고 관리되어왔던 듯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협탁 서랍을 열었다.

165584492694.png“……어디 갔지?”

그런데 몇 개가 비었다. 분명 하녀들의 짓이겠지. 눈에 띄는 몇몇 보석만 남아 있고 금으로 된 반지나 팔찌 등이 모조리 사라졌다. 물론 어머니의 초상이 담긴 펜던트 목걸이도. 나는 우선 남아 있는 것만 몽땅 털어 품 안에 있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비상금으로 은화 몇 개가 들어 있던 작은 주머니에 노에비안과 오빠인 그레고리가 사주었던 고급 보석이 금세 가득 찼다. 당연히 내 것이니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이 맞는데, 괜스레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기분이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심장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로 돌아왔다. 때마침 검은 숄 하나를 챙겨온 가스팔과 함께 노에비안이 들어왔다. 나는 테이블에 몇 개 놓여 있던 부채 중 하나를 확확 부치며 열기를 멀리 떨쳐버리려 애썼다. 이리 뛰어본 적도 오랜만이라 몸은 멀쩡해도 힘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58449269411.png“가스팔.”

16558449269395.jpg“예, 전하.”

16558449269411.png“나가서 손님맞이 마저 하도록.”

16558449269395.jpg“예? 아, 예!”

가스팔이 다 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흩뿌리며 조용히 응접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165584492694.png“…….”

순식간에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노에비안이 가스팔에게서 받아든 숄을 가지고 느릿하게 걸어왔다.

16558449269411.png“자.”

그는 내 앞에 멈춰 서서 숄을 걸쳐주려는 듯 펼쳐 보였다. 나는 부채를 놓고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등을 보였다. 시간이 엄청나게 느리게 흘렀다. 응접실에 단둘이 있으니, 신혼 시절 잠깐의 행복이 생각났다. 노에비안은 아드리엔에게도, 블리에에게도 참 다정한 남자다. 이렇게 직접 숄을 걸쳐주기까지. 슬픈 실소가 내 입 안에서 맴돌았다.

16558449269411.png“……블리에.”

그리고 그는, 그대로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동시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16558449269411.png“블리에, 블리에…….”

그가 아드리엔의 이름을 저렇게 열정적으로 부른 적 있었나. 항상 나직하고 다정했지 저렇게 뜨겁게 부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165584492694.png“왜, 왜 그랬어요?”

이런. 나도 모르게 뜨겁게 입을 달구던 말을 내뱉었다. 노에비안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몸을 가늘게 떨면서, 이미 저질러버린 말을 다른 말로 수습했다.

165584492694.png“왜, 내게 생일 파티라고……. 이 드레스는 또 왜…….”

16558449269411.png“……오늘은 정말 내 아내의 생일이 맞아. ”

165584492694.png‘내 아내.’

노에비안은 여전히 아드리엔을 그렇게 부른다.

165584492694.png“하지만, 회고연이라고 홀에, 그렇게…….”

16558449269411.png“생일파티를 연다고 하면, 다들 내게 미쳤다 할 테니.”

그러니 아드리엔의 생일파티는 우리 둘이서 하자고. 노에비안이 내게 속삭였다. 죽은 아내의 생일파티를 숨겨둔 정부와 비밀스럽게 한다라. 이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인지! 이것을 좋아해야 하나? 분노해야 하나?

16558449269411.png“그러니 이런 상복 같은 것은 벗어, 블리에.”

165584492694.png“자, 잠깐만!”

걸쳐줬던 검은 숄을 순식간에 앗아간 노에비안이 내 몸을 가볍게 돌렸다. 타는 듯한 푸른 눈이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드리엔의 눈으로도 분명히 보았던 눈이다. 정말로 누군가를 원하는 눈.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양어깨를 그러잡고, 은근히 내 드레스의 어깨끈을 밀어냈다. 나는 품에 감췄던 묵직한 주머니가 번뜩 떠올랐다.

165584492694.png“안 돼, 안 돼, 안 돼요!”

16558449269411.png“…….”

노에비안이 깊게 인내하는 것 같은 얼굴을 들어 내 어깨를 더 꽉 그러잡았다. 변명이 무엇인지 들어는 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잡힌 어깨가 그의 손으로 인해 눅진하게 뜨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얘진 나는 곧 응접실 밖에 서 있던 하녀 몇을 떠올렸다. 그리고 집요하게 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입을 뗐다.

165584492694.png“……대공비의 침실을 보고 싶어요.”

나는 방금도 다녀왔던 그곳을 보고 싶다고, 떨지 않고 확실하게 말했다. 노에비안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졌다.

165584492694.png“대공비의 침실이 곧 내 것이 되는 게 아닌가요?”

노에비안의 얼굴이 아주 잠깐이지만, 창백해졌다. 그의 신경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165584492694.png“당신과 사랑을 나눈다면, 나는 그곳에서 하고 싶어요.”

내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왔을까 싶을 만큼 발칙한 말이었다. 그래, 이쯤 되면 나는 노에비안이 내 뺨이라도 한 대 쳐주기를 바랐다. 왜? 오기로 가득한 말을 내뱉고 생각을 해보니, 그게 내가 계속해서 노에비안에게 주는 기회임을 깨달았다. 소리 없는 실소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스스로 상처받지 못해 안달 난 내가 망가진 것만 같아 서글펐다. 한참 고민하던 노에비안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침실 문을 열고 느릿하게 걸어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내게 들어오라는 말도, 둘러보라는 말도 하지 않고. 나는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두고, 아까 내가 보석들을 가져왔던 협탁 쪽으로 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노에비안은 고개만 돌려 나를 응시했다.

165584492694.png“서랍, 열어봐도 되나요?”

16558449269411.png“…….”

그는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속을 꼭 깨물고 아까 내가 한번 열었던 협탁 서랍에 손을 가져다 댔다. 노에비안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이때…… 어쩌면, 블리에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165584492694.png“귀부인들은 침대맡에 가장 아끼는 보석들을 둔다고 하던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나 봐요. 구경이나 해보려 했더니.”

블리에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미 내가 털어버린 서랍을 탁 닫으며 그리 말했다. 노에비안의 미간이 깊어지더니 긴 다리로 휘적휘적 다가와 거칠게 서랍을 다시 열었다.

16558449269411.png“가스팔!!”

그리고 놀랄 만큼 화난 그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가스팔이 손님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용인들을 불러 모았다.

16558449269395.jpg“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16558449269395.jpg“그 여자가 왔다던데?”

16558449269395.jpg“그 여자?”

16558449269395.jpg“그 왜, 대공 전하의 숨겨둔 애인이라던 여자.”

16558449269395.jpg“전하께서 애인이라니? 정부라도 있으셨단 말이야? 말도 안 돼!”

16558449269395.jpg“집사님에게 못 들었어?”

손님들을 맞이하는 하녀들을 제외하곤 사용인들 전부 대공비의 침실에 불러졌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던 이들이 대공 노에비안의 형형한 눈동자에 압도되어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간 최소 내쫓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내쫓기고 싶지 않은 이는 단연 죽은 대공비의 마지막을 지켰던 하녀, 애니였다. 호강에 겨운 줄도 모르고, 제국 최고의 신랑감을 맞이하고도 징징대기만 하던 대공비가 드디어 죽었다. 꿈에 나올 만큼이나 아름다워 흠모해 마지않았던 대공 노에비안이 드디어 저택에 머물기 시작했다. 유혹하려면 방법은 많았다. 밤마다 집무실 벽을 가득 채운 양주병이 빈 병이 되어 낙엽처럼 바닥에 뒹굴 만큼 술을 마셔대는 그였으니. 대공비의 머리 색과 비슷한 금발로 염색하고 유혹한다면 넘어오진 않을까 재고 있던 중이었다. 그들이 초야조차 치르지 않았던 부부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리고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그 대쪽 같던 대공 노에비안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지 않나. 병든 몸을 안기 싫은 것은, 젊고 아름다운 대공이라면 당연한 일. 그리 생각하며 싱그럽기 그지없는 자신을 보이려 했다. 아드리엔의 침대를 차지하고 앉은 여자 하나를 보기 전까지는.

16558449269395.jpg“비, 비전하?”

16558449269395.jpg“입 조심해라.”

가스팔이 뒤에서 속삭였다. 그러나 애니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줄지어 들어선 그들을 바라보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연녹빛 눈동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리라고. 대공비 아드리엔의 꺼져가던 그 눈동자를 바로 옆에서 보았는데.

16558449269395.jpg“어느 곳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왔습니다, 전하!”

가스팔이 그리 외치자, 흑발의 여자 옆에 서 있던 대공 노에비안이 그들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애니는 물론이고, 모든 사용인이 벌벌 떨었다. 그의 주인은 아름다웠으나 가차 없었다.

16558449269411.png“대공비의 침실에, 쥐새끼가 들었더군.”

감히 속닥이지도 못하는 사용인들이 숨을 헉, 헉 들이켰다. 찔리는 것이 있는 자들은 오금이 저려옴을 느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기함했다. 누가 감히 죽은 대공비의 침실에 침입했단 말인가.

16558449269411.png“내 아내의 보석에 감히 누가 손을 댔다.”

애니는 제 몸이 얼어붙은 듯 딱딱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 침착하려 애썼다. 티 나지 않게 훔쳤고, 눈에 띄는 유색 보석들은 다 두었다. 금붙이 몇 개, 그리고 아드리엔이 그리 아끼던 낡은 펜던트 목걸이……. 그 목걸이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조리 제 방 침대 아래 숨겨두었으니까. 애니는 곧 같이 훔쳐냈던 하녀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입을 다물자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 교환은 곧바로 끊어지고 말았다.

16558449269395.jpg“사용인들의 침실은 이미 수색이 끝났습니다.”

165584492694.png“몸에 숨겼을 수도 있잖아요?”

가스팔의 보고에 낯선 귀부인의 목소리가 별안간 섞여들었다. 사용인들을 훑어보던 노에비안이 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16558449269411.png“……벗어라.”

정적이 흐르던 대공비의 침실에서, 노에비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16558449269395.jpg“예?”

끌려온 것은 주방장도 마찬가지라, 그가 되물었다. 노에비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뇌까렸다.

16558449269411.png“전부 옷을 벗어 결백을 증명하라.”

그리 말하는 대공의 뒤로, 아름다운 귀부인이 연녹빛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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