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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죽음의 늪에서 손을 잡은 구원자 (16/171)

16. 죽음의 늪에서 손을 잡은 구원자2021.06.26.

서릿발 같은 음성에 모두가 굳어버렸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온갖 사용인들이 모여 있는 죽은 대공비의 침실. 낯선 손님까지 있는 곳에서 옷을 벗으라니. 사용인들의 어리둥절하고 두려운 시선이 대공 노에비안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단 한마디의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16558449484375.jpg“전하…….”

보다 못한 집사 가스팔이 뒤에서 조용히 노에비안을 불렀다.

16558449484375.jpg“하녀들도 있고, 따로따로 수색을 진행하심이…….”

16558449484394.png“그게 무슨 상관이지?”

16558449484375.jpg“!”

16558449484394.png“쥐새끼가 여인인지 사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대공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은 대공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자포자기한 얼굴로 옷을 벗어 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하녀들은 딱딱 소리가 날 만큼 이를 떨면서 앞섶을 꽉 붙잡고 있었다. 집사 가스팔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들을 감싸는 척했지만, 그는 이 상황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결국 사내들이 먼저 옷을 벗어 내렸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부터 말라서 볼품없는 자들까지 재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자, 다음 차례가 될 늙은 하녀 몇이 자연스럽게 그 옷을 뒤적였다.

16558449484414.png“……쥐새끼에게 쥐새끼 수색을 맡기면 잡히겠어요?”

묘한 긴장감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낯선 귀부인이 입을 열었다. 상의를 온전히 탈의한 사내들을 앞에 둔 귀부인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모르는 이들은 부끄러워 그러는 줄 알겠지만, 정작 아드리엔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묘하게 들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사용인 중 대부분이 대공비였던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다. 침실 밖을 나가는 일도 거의 없고, 애니를 비롯한 하녀 몇 명만 수발을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아무 죄도 없는 것처럼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있는 애니를 보자 왠지 호승심이 생겨났다.

16558449484414.png‘당당하기도 하지.’

16558449484414.png“여인들의 수색은 제가 맡아도 될까요?”

16558449484429.jpg“!”

하녀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노에비안과 집사의 앞에서 몸수색을 당하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낯선 귀부인에게 몸을 맡기라니?

16558449484414.png“집사의 말에 일리가 있잖아요.”

16558449484394.png“…….”

노에비안은 그녀가 나설 줄 몰랐다는 듯 잠시 말을 잃었다가 입을 열려 했다.

16558449484375.jpg“전하, 아무리 그래도 집안일인데…….”

집사 가스팔의 참견에 노에비안이 순간 번쩍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내저었다.

16558449484394.png“부인께서는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오.”

그리고 아드리엔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애니의 시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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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8449484414.png‘찾고 싶었는데.’

내 어머니의 펜던트 목걸이. 다른 것들도 모조리 귀한 것이긴 했지만, 목걸이는 내가 가진 유일한 어머니의 초상이 담겨있는 것이라 특히 아꼈다. 나는 거대한 복도를 홀로 걸었다. 힘이 쭉 빠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가스팔이 챙겨준 검은 숄을 단단히 입고 계단 위에서 내 회고연에 온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2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몇몇 하녀들이 다과를 가져다 나르는 것이 보였다.

16558449484414.png‘침실에 있는 이들 말고, 저들 중 내 어머니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노에비안 몰래, 돈을 주고서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주머니에 넉넉하게 챙긴 보석도 있겠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적당히 시끌벅적한 분위기라 거대한 조각상들 사이에 슬쩍 숨으니 누구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근처에서 다과를 차리는 하녀 둘에게 다가가 빠르게 그들의 목을 살폈다. 목걸이를 건 흔적은 없다. 내 목걸이는 줄은 평범하니까 펜던트만 감추면 얼마든지 하고 다닐 수 있을 텐데. 나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웬만하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16558449484375.jpg“누구세요?”

다른 하녀들을 살피려는데, 곁에 있던 다른 하녀가 나를 휙 잡아당겼다.

16558449484375.jpg“누구신데 이런 차림으로…….”

그리고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16558449484375.jpg“비, 비전…….”

16558449484414.png“아니네.”

묘하게 낯이 익은 것을 보니 이 하녀는 몇 번 아드리엔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다. 약간의 소란을 들은 다른 하녀 몇이 나를 에워쌌다. 날 잡아당겼던 하녀는 나를 시체라도 본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돌연 공포감에 휩싸였다.

16558449484375.jpg“마리, 왜 그래?”

그들은 내 모호한 차림새에 섣불리 손님이라는 생각은 못 하는 듯했다. 조용히 음악을 연주하러 온 악사, 혹은 회고연에서 가끔 노래를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했는지 내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대신 마리라는 하녀는 내 얼굴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두 명만 있을 때는 상관없었는데 너덧 명이 모이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대공저. 익숙한 수군거림. 시체를 보는 것 같은 저 눈까지.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았고, 동시에 어느 것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16558449484414.png‘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나는 그들의 목 주변을 훑어보고는 조금 필사적일 만큼 정상적으로 호흡하려 애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 중 누구도 목걸이를 한 이는 없었다. 진정하려 가슴에 손을 얹자 내가 손발을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이 분위기, 이 하녀들 사이에 둘러싸여 숨이 막혀 죽었던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16558449484414.png“비켜, 비켜요…….”

16558449484375.jpg“자스민! 이리 와봐! 여기, 여기 비전하를 닮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홀의 구석으로 하녀들이 몰려들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녀 따위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했던 그때의 그 무력함이 생생히 기억나기 때문이었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입을 열어도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던 죽음의 순간. 그 순간이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실로 내 눈앞에 찾아 온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16558449484414.png“하아-. 하아-.”

16558449484375.jpg“이, 이봐요! 이봐요 왜 그래요!”

16558449484375.jpg“맙소사, 누가 사람을 좀 불러와!”

뛰어가는 하녀의 뒷모습. 메이드 복을 입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낮게 경악하는 목소리. 모든 게 그날과 비슷하다. 내가 죽은 날의 분위기. 깊은 물에 빠져 발이 닿지 않고, 손을 아무리 뻗어도 누구도 잡아주지 않던 그 날. 물살을 가르고 갈라도,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던. 내게만 잔인했던 그 죽음의 늪.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16558449484414.png‘살려줘…….’

내 얼굴을 모르는 것 같은 하녀 쪽으로 손이 저절로 뻗어졌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기만 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16558449484414.png‘살려줘!!’

그리고 그런 내 얼굴을 마주한 하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손을 뻗어 잡아주기만 하면, 그러기만 하면 이 지독한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눈이 따끔거린다. 그동안 쌓인 것들이 지독한 원망의 눈물로 변해 고이기 시작했다.

16558449484414.png‘살려줘, 제발, 제발!’

그리고 시야가 흐릿해지려는 그 순간. 눈앞이 완전히 까매졌다.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다가오더니 내 머리 위로 무언가를 덮어씌운 것이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허공을 더듬던 내 팔을 감싸 쥐는 게 느껴졌다. 낯선 손길. 어렴풋이 느껴지는 약초의 향기와 시가 향, 그리고 라벤더 향이 뒤섞인 야릇한 향기. 낯설지 않은 향기다.

16558449484414.png‘말도 안 돼.’

16558449573427.jpg“……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내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속삭임이었다. 허공을 휘젓던 팔이 얌전히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승전 기념식 때처럼 아프지 않게 뒤에서 결박한 두 팔을 따뜻하지만 집요한 손이 더 지그시 눌렀다.

16558449573427.jpg“내 손을 잡겠습니까?”

진절머리가 나는 도움이라는 말이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구원자의 목소리에 나는 목이 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49573427.jpg“……분명, 당신이 직접 도와달라 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곧바로 결박됐던 팔이 탁, 풀렸다. 동시에 뜨거운 손이 자연스럽게 팔을 타고 내려와 뒤에서 내 손을 쥐었다. 내게는 턱도 없이 큰 손이었다. 분명히 죽음을 경험했을 때와 같은 숨 막힘, 같은 두근거림이었지만.

16558449573427.jpg“대공저는 손님 대접을 이리하나?”

나는 그 손을 잡고 죽음의 늪에서 순식간에 끌어 올려진 기분이 들었다. 줄곧 나를 긴장시키기만 했던 낮은 울림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휘청이던 몸이 단단하고 거대한 그의 몸에 등을 기대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놀랍게도 잦아들었다. 그가 항상 입고 있던 하얀 재킷. 훈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금빛으로 번쩍이던 그것이 내 머리 위를 감싸고 있었다.

16558449484375.jpg“화, 화, 황자 전하…….”

16558449573451.png“대공에게 전하라.”

재킷의 틈으로 밖을 살피자 근처에 있던 하녀 하나가 붉은 눈의 그를 알아봤는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내 등에 닿는 그의 몸 위에서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8449573451.png“제국의 별이 행차했으니, 마땅히 얼굴을 내비쳐 예를 다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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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별’이라는 말에 나를 에워쌌던 하녀들이 다른 의미로 혼비백산했다. 벌을 받을까 두려웠던지 연신 죄송하다 외치며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16558449484414.png‘하아-.’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턱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강한 힘이 어느새 재킷을 어깨로 내린 나를 꽉 붙들어 주었다.

16558449573451.png“……괜찮습니까?”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조각상. 그리고 그 조각상의 얼굴에 박힌, 갓 죽인 짐승의 선혈 같은 눈동자 한 쌍이 내게 향했다.

16558449573451.png“안색이 안 좋습니다.”

굳은 표정의 로아드네스였다. 역시, 그가 맞았다. ***

16558449484375.jpg“주신의 축복을! 제국의 위대한 별이신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집사 가스팔이 재빠르게 거물을 맞이하러 달려왔다. 목이 죄는 기분이 들어, 로아드네스는 창백한 백작 부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크라바트를 가볍게 풀며 입을 열었다.

16558449573451.png“네 주인은?”

16558449484375.jpg“저어-. 죄송하지만…… 지금은 제 주인께서 조금 일이…….”

16558449573451.png“죽고 싶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

가스팔의 두 손이 자연히 제 목으로 향했다. 저도 모르게 황실의 문제아라 불리는 아름다운 황자의 옆구리에 버젓이 있는 검으로 눈이 향했다. 슬쩍 올려다본 황자의 얼굴은 아주 싸늘했다.

16558449484375.jpg‘도대체 오늘 하루 종일 이게 무슨 일이야!’

대공은 대공대로 화가 났고, 초대하지도 않은 황자는 갑자기 나타나선 무슨 일인지 살벌하다.

16558449573451.png“당장 네 주인을 불러와라.”

16558449484375.jpg“예, 예!”

가스팔이 빠르게 물러났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대공의 전언은 쓸모없어져 버렸다. ***

16558449484414.png“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해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쨍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듯 응시하고만 있었다.

16558449484414.png“저는 이제 괜찮으니, 하시던 일을……. ”

16558449573451.png“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이제 잦아든 공포를 완전히 억누르며 로아드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화나 보였다.  

16558449573451.png‘한 번 더 내 입에서 도움이 필요하냔 소리가 나오면…….’

16558449573451.png‘그때는 내가 정확히 뭘 도와주는 게 좋을지 스스로 말해야 할 겁니다.’

  불현듯 얼마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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