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눈빛부터 말투까지, 하나같이 불순하고 괘씸해2021.06.30.
나는 이제 조금 괜찮아진 정신으로 로아드네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유 없는 도움은 없다.’
눈앞의 이 맹수는 분명히 어떠한 목적으로 내게 빚을 지우려고 하고 있다. 꿀꺽.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졌다. 목구멍이 타는 듯 바싹 말라왔다. 그가 왜 화가 나 있는지는 몰랐다. 노에비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던 여자가 버젓이 저택에 있는 게 싫어서?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저 노에비안의 비위를 맞춰 입안의 혀처럼 군 다음, 훗날 그가 더 비참하게 버려지길 바랐을 뿐이었지.
“잊지 않았습니다, 전하.”
로아드네스가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이렇게 된 이상 무슨 도움이든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기엔, 블리에라는 사람의 위치와 내 상황이 너무 터무니없었고. 당장 생각나는 앞으로의 살길은 아카시아 백작과의 이혼, 그리고 노에비안에게 그것을 통보하고 그와 헤어지는 것뿐이다.
‘직계 황족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잖아.’
귀족의 이혼은 간단치 않아서, 직계 황족의 인장이 필요했다. 노에비안 몰래 일을 진행하려 하는 이상, 그의 인장을 훔치거나 가까운 황족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한 가지 도움을 더 받을 수 있다면…… 노에비안의 정부라는 존재를 경멸하는 듯하던 이 남자에게 이혼을 승인해 달라고 하자.’
그리 생각하자 세차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무엇을 요구할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분명히 얻는 게 있을 터였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는 복잡해 보이는 그의 눈을 힐끔 보았다.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볼까?’
단지 ‘아드리엔’의 비석 앞에서 그녀와 너무 똑같은 얼굴을 한 이 블리에와 마주한 게 신기해서? 황족인 자신을 보고 제대로 된 예도 갖추지 않고 냅다 도망쳐서?
‘그도 아니라면…….’
내게 반해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기엔 줄곧 정중한 말투에 비해 표정은 오만하고 서늘했으며 행동은 절제되기 그지없다. 로아드네스의 새빨간 눈동자와 내 눈이 누가 잡아당긴 듯 똑바로 마주쳤을 무렵.
“아카시아 백작 부인.”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을,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내 저택의 하녀들이 부인에게 무례했다 하던데, 괜찮소?”
***
“꽃다운 나이에 주신의 부름을 받고 아바델리아로 간 대공비 전하께 이 시를 바칩니다.”
짝짝짝짝짝!! 박수의 갈채가 쏟아졌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한 미담을 늘어놓고 그리워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내가 행사차 갔던 보육원에서의 봉사활동,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가는 신전 예배 같은 일들이 아주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급기야는 성녀 마리니의 현신이나 다름없다고 칭송하는 이도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행사를 이틀이나 할 예정이란다.
“마님.”
“……이제 가자.”
더 볼 것도 없었다. 죽기 전에도, 죽고 나서도 아드리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저런 사람들뿐이다. 노에비안에게 잘 보이려 하는 사람들.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나는 아까 노에비안과 로아드네스가 함께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었다. 노에비안이 나타나자, 로아드네스가 그에게 마침 할 이야기가 있다며 끌고 나가버렸다. 요나가 구해온 모자를 꾸욱 눌러썼지만 검은 숄 아래에서 반짝이는 붉은 드레스 때문인지 하녀들의 시선이 금방 따라붙었다. 파티홀에서 은은하게 연주되던 음악이 점점 멀어졌다. 마차를 향해 걷는데, 내 마차에 가까워질수록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제 아내가 구경거리가 되는 게 싫어 그렇습니다. ”
노에비안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드리엔의 시신을 구경하려는 게 아닌데.”
“…….”
“확인하고 싶어서이지.”
“초대장을 보낸 적도 없는데, 이리 오신 이유가 그것입니까?”
담담한 노에비안의 목소리에 화를 억지로 눌러 참는 듯한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겹쳤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뛰는 심장만큼이나 다리를 빠르게 놀렸다. 그리고 조용히 마차에 타서 창문을 열어 그들을 지켜보았다.
“무엇을 확인하신단 말입니까?”
“……내 눈으로 직접, 아드리엔의 시신을 봐야겠단 말이오. ”
“제 아내는 대공비가 된 지 2년이나 흘렀는데, 이름으로 부르시니 민망합니다.”
내게는 노에비안의 얼굴만 정면으로 보였다. 로아드네스의 찬란한 금발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입으로 설명하기 구차하군.”
“설명 말입니까?”
무표정하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점점 차게 식어간다. 그는 공손했던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리더니 세상에서 가장 가소로운 것을 보듯 로아드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로아드네스의 키는 상당히 비슷했지만, 그는 굳이 턱을 들고서 제 조카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없던 시절의 첫사랑. 그 첫사랑의 죽은 시체라도 보고자 하심입니까?”
“……감히.”
“설마 지금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실 테고.”
“내가 먼저 알았고, 내가 먼저 마음에 담았다.”
“……그래서요?”
노에비안이 피식 웃었다. 로아드네스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여유만만해 보이던 황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연인도, 남편도, 이젠 상주까지 하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닙니까?”
“…….”
“아드리엔에게는 전하같이 이리저리 날뛰며 손에 피가 마를 날 없는 문제아가 아니라, 저같이 안정적이고 어른스러운 사내가 필요했습니다. 가지지 못할 것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가질 수 있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그리고 노에비안의 검푸른 눈이 나와 딱 마주쳤다. 그는 마치 내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손님 배웅을 해야 해서, 이만.”
그리고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로아드네스의 뒷모습을 등진 채 내게 다가왔다. 겨우 목소리만 들릴 만큼의 거리였는데, 그는 단 몇 걸음도 걷지 않고 성큼 내게 도착했다.
“괜찮은가?”
“…….”
그리고 그의 빈틈없는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나는 괜스레 로아드네스가 신경 쓰였다. 그는 아마 노에비안이 저택에 들였다는 내 시신을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던 듯하다. 그리고 분명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했어.’
“블리에.”
그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던 내 턱을 노에비안이 움켜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절반도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살짝 아팠다.
“나를 봐.”
“…….”
“괜찮으냐 물었는데. 내 저택의 하녀들이 그대에게 어찌했지?”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저 몇몇은 그들이 모시던 안주인의 얼굴과 같은 내가 신기해 몰려든 것이고 몇몇은 소란이 일어나니 궁금해 모인 것이지.
“대답 안 할 거야?”
노에비안은 내 턱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나는 그를 비켜 흐르던 시선을 옮겨 그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앉아 있는 마차 의자가 훅, 꺼져버리는 것같이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노에비안의 손을 떼어내고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녀들이 그대에게 어찌했는지 말해.”
“아무것도요.”
그가 인내하듯 창문틀을 꽉 그러잡았다.
“말해.”
로아드네스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들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는 문득, 아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엔으로 있던 시절. 그때 노에비안이 몇 번이고 이렇게 물어봐 주었다면 나는 입을 열었을까? 로아드네스에게 했던 말대로, 그는 내가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러운 사내이니. 저택 내부의 문제도 눈을 감았다 뜨면 짠! 하고 해결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군.”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블리에에게는. 그렇다면 아드리엔에게는? 그렇다면 할 말이 참 많은데.
“굳이 말하자면, 저택의 하녀들이 하나같이 저를 업신여기더군요.”
“뭐?”
“눈빛부터 말투까지, 하나같이 불순하고 괘씸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없을 때, 나는 그곳에 있는 유령과 다름없었어요. 아무도 내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았고,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는 홀로 시들어갔어요. 내 일거수일투족이 혹시라도 황실에서 보냈다는 그들의 입을 통해 황실로 들어갈까 봐. 책잡혀서 당신에게 누가 될까 봐.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어.’
바쁜 걸 알면서도 곁에 있어 달라 말하고 싶었어. 대공저 안에서의 공포가 지나가자,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분노였다. 로아드네스의 한 마디에 질겁을 하고 죄송하다며 흩어졌던 그들을 기억했다. 아드리엔이나 블리에에게는 단 한 번의 공손함도 보이지 않던 이들.
“불쾌해요.”
“……대신 사과하지.”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그렇게 답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속에 담긴 말들이 많았는데 블리에의 입으로 말할 수 없어 답답했고 동시에 그의 대답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드리엔이 그랬다면 뭐라 했을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당신은 신경 쓰지 마.’라며 다정하게 속삭였을까? 그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 계속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멀쩡히 살아 있는 나를 위해 열린 회고연. 잃어버린 어머니의 목걸이. 블리에를 원하는 노에비안. 그러면서도 아드리엔을 ‘내 아내’라 부르는 노에비안.
“갈게요.”
“잠시만 기다리지. 기사를 붙여줄 테니.”
울음을 삼키고 간다 말하는데 별안간. 탁!
“그럴 필요 없겠군.”
“!”
누군가 닫혀 있던 마차의 왼쪽 문을 가볍게 열었다. 고개를 돌리자 반짝이는 남자가 마차를 꽉 채우며 들어왔다.
“부인은 내가 배웅해 드릴 테니, 파티의 호스트는 저택이나 지키게.”
그의 한참 뒤에나 서 있던, 로아드네스였다. 탕탕! 그가 마차 벽을 두 번 치자, 마부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노에비안이 눈을 크게 뜨고 속절없이 우리를 보낼 수밖에 없을 만큼 마차가 빠르게 내달렸다. 나 역시 노에비안만큼 놀라 크게 떠진 눈으로 어느새 내 맞은편에 앉아 긴 다리와 팔을 꼬아 앉은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한 쌍의 쨍한 붉은 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불만이 아주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