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면접 보러 왔습니다, 부인2021.07.03.
아침 햇살 아래 널부러진 로아드네스는 누워 있는 조각상같이 몹시 보기 좋았다. 결국 이 황자는 지하 감옥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절하듯 잔 게 분명했다.
“이력서는?”
“고민 중입니다.”
“고민 중이다?”
벌어진 셔츠 틈새로 나온 자기주장 강한 가슴근육을 개똥 보듯 응시한 닐이 불퉁하게 말을 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굴던 것이 꿈인 듯, 눈 뜨자마자 말도 안 되는 엘라콘어 가정교사 이력서나 물어보는 주군이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참이다.
“매일 이력서를 받는 게 일이었는데, 전하의 존함으로 이력서라는 걸 써서 내는 게 어디 쉽나요. 황실의 인장을 찍어야 할지, 전하의 수많은 작위 중 하나의 인장을 찍어야 할지부터…….”
“그냥 평민인 척 보내.”
끔찍한 숙취가 밀려드는지, 로아드네스가 몸을 일으키며 잘난 미간을 왈칵, 구겼다. 근처에 아무렇게나 떨군 검은 시커먼 마물의 피가 묻었는데도 눈이 아플 만큼 서슬 퍼런빛을 내고 있었다. 로아드네스가 검을 주워 검집에 다시 집어넣고는 주위를 대충 살폈다. 평소 더러운 잠자리에는 발끝도 안 붙이는 취향을 생각하면 마구간에서 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력에 뭐라 씁니까? 아카데미 엘라콘어 수업에서 모조리 만점 받았다고요?”
“알면서 뭘 자꾸 물어, 짜증 나게.”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결국 짜증이라는 감정이 감돌자 닐이 바짝 긴장하며 용기를 냈다.
“아~ 그러니까 평민인데 아카데미 출신이라 말하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왕족 이상만 다닌다는 로열 아카데미 성적을요. 귀부인의 취미생활을 봐줄 선생치고는 너무 대단한 경력은 아닐지…….”
로아드네스가 한심한 술주정뱅이 같던 행동을 뚝 멈추고 선 채로 닐을 내려다보았다. 닐은 또 제 주둥이가 주군을 닮아감에 한탄하며 미리 작성해 온 이력서를 넘겼다.
“알아서 잘 썼으면서, 비꼬기는.”
어제 피를 보아서인지, 로아드네스는 그를 걷어차거나 욕도 하지 않고 그가 밤새 고민하며 써온 것을 대충 접어 다시 건네려 했다.
“전하, 전하!”
그때, 저 멀리서 빈센토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수하들이 익히 알던, 오만한 황자의 턱을 치켜든 로아드네스가 빈센토가 가져온 종잇장을 내려다보았다. 곧이어 잘난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회고연?”
“황태자 전하께서 아침부터 출궁하시는 것 같기에 알아보니…….”
“답지 않은 짓을 하는군.”
더 수상하게. 싸늘하게 누군가의 초대장을 훑어보던 로아드네스가 중얼거리고는 대놓고 그것을 찢어버렸다.
“전하!”
“빌려온 것을 그렇게……!”
빈센토가 부질없는 손을 뻗으며 창백한 얼굴로 절망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가 저 멀리 내팽개친 재킷을 걸쳐 입으려 하자 더 놀랐다.
“어, 어디 가십니까?”
“파티 훼방 놓으러.”
“예?!”
“파티 초대장도 없으시면서, 그리고 거긴 웃고 떠드는 곳이 아니라 망자의 회고연인데……!”
“무슨 상관이지?”
로아드네스가 닐에게 건네려던 이력서를 셔츠 주머니에 대충 접어 넣었다. 곧이어 어리벙벙하게 그를 바라보는 부관들에게 햇살이 고인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그런 걸 따지지 않는 사람더러, 문제아라 하지 않나?”
*** 로아드네스는 마치 무엇을 회상하듯 흐릿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를 보는 와중에도, 마차는 빠른 속도로 대공저의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왔던 입구를 벗어났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빽빽한 등나무 숲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 회고연에 왔을까?’
황태자가 황실을 대표해 이 의미 없는 행사에 다녀갔다는 수군거림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에비안은 대표적인 황태자파의 사람이었으니까.
‘설마 진짜 내 시신을 확인하려고?’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는데도 로아드네스의 커다란 몸은 미동도 없었다. 흔들리고 덜컹거리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놀라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가슴을 꾹 누르고 먼저 그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감사했습니다, 전하.”
“……무엇을 말입니까?”
조각상 같이 앉아 있던 그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아까 하녀들 틈에서 저를 구해주신 거요.”
“왜 그러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미묘한 표정.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눈이 꽤 집요했다. 나는 억지로 약간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리고 조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노에비안에게도 다 못 했던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공비 시절 그들에게 받았던 냉대가 떠올라, 그날의 죽음이 떠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대번에 미친 여자 취급이나 받겠지.
“알겠습니다.”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자세는 여전히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열심히 생각하는데,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완벽한 모양의 입술이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꾹 닫히자 침묵의 공기는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다만 이전보다 더 큰 긴장감이 내 가슴속에서 계속 팽창하고 있었다.
‘철없던 시절의 첫사랑. 그 첫사랑의 죽은 시체라도 보고자 하심입니까?’
‘내가 먼저 알았고, 내가 먼저 마음에 담았다.’
노에비안이 사라지고, 이 황자와 둘만 남게 되자 아까 노에비안과 그가 나누었던 대화가 마음을 갉작였다. 어째서 내겐 단 하나의 기억도 없을까.
‘내가 저 사람의……?’
힐끔 보니 여전히 삐딱한 자세의 황자가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를 어디서 봤다고?’
왠지 부끄러워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적인 기분이 일었다. 다각다각.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평소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어둑해진 마차 안에서 그의 눈이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저렇게 번쩍거리고, 깎아놓은 듯 생긴 이를 기억 못 할 리 없는데…….’
힐끔대는 내 시선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표정 변화 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가 꼬고 있던 팔다리를 풀어 정자세로 앉았다. 나 역시 그를 의식해 자세를 더 바르게 했다. 그는 한참 내 눈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까 대공과 내 이야기, 다 들었습니까?”
계속 그 대화를 곱씹던 것이 들킨 것 같아, 나는 조금 흠칫했다.
“……조금이요.”
“그렇다면 말이 빠르겠습니다.”
어느새 마차가 수도 중앙광장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조명이 안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빛이 내려앉자, 그는 보석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눈부시게 번쩍였다. 너무 눈이 부셔서 나는 눈을 살짝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것을 더 말해보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듯 그의 굵은 목울대가 눈에 띄게 꿀렁였다.
“나는 부인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
“네? 그게 무슨…….”
“내게 무엇을 도와달라 할지 생각해 봤습니까?”
이 남자는 분명 ‘나’를 첫사랑이라 했다. 그렇다면 묘지에서 그리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고, 나를 찾아 백작저까지 찾아오고, 승전 기념식에서 나와 춤을 춘 것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된다. 비록 내 기억에는 전혀 그가 없지만, 내가 그의 ‘첫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걸 가정하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비겁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블리에의 몸으로 나는 누구의 도움이든 받아야만 한다. 사지육신이 멀쩡하다고 해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혼. 이혼을 승인해 줄 직계 황족. 노에비안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황자. 본래의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남자. 꿀꺽. 어스름한 가스등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마차 안, 그림자와 빛을 동시에 얼굴에 담고 있는 눈앞의 남자. 그는 내게 위험한 유혹 그 자체였다. 어떤 대가를 치를지는 모르지만, 그 손을 잡는다면 무조건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겠지.
“이혼…….”
“…….”
“아카시아 백작과 이혼하고, 노에비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목적은?”
“……그의 정부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가 아주 많이 슬펐으면 좋겠어요.”
노에비안을 슬프게 하고 싶다는 말은 로아드네스의 마음을 조금 더 동하게 하려 한 말이다. 진심이긴 하지만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말. ‘아드리엔’이 자신의 첫사랑이라면 그 첫사랑과 혼인한 노에비안도, 그의 숨겨진 정부도 달갑지 않을 테니까. 그의 정부인 블리에의 몸으로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고 뒤통수를 치고 싶다는데 싫어하진 않을 것 같았다. 반쯤 드러난 눈동자가 느릿하게 내 얼굴을 배회했다. 보이지 않는 축축한 혀가 내 온몸을 핥아 내리는 것 같은 기이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이 막혔다.
‘내가 먼저 알았고, 내가 먼저 마음에 담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다. 기묘하게 두근대는 심장을 꼭 붙잡고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완전히 안심했을 때, 배신하고 싶어요. 아카시아 백작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고…….”
“직계 황족인 내가 필요하겠군.”
그가 낮게 한숨 쉬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거면 됩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전하께서는 뭐가 필요하신가요?”
내가 고민 없이 답하자 오히려 로아드네스가 초조한 듯 앉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대가 없는 도움이 아니라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자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늘 오만하고 여유로운 모습만 봐서 그런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다시 한번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마차에 깔렸다.
“부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동안, 나는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이루려 합니다.”
“……그게 뭔데요? ”
마주치는 눈. 그리고 결심한 듯 턱에 힘을 바짝 준 얼굴. 이어 그가 말했다.
“내가 아드리엔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그리고…….”
그가 품에서 대충 접은 종이 같은 것을 하나 꺼냈다.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열어 펼쳐보았다.
“!”
【엘라콘어 가정교사 지원서】
“면접 보러 왔습니다, 부인.”
눈앞의 지원서를 보고 멍한 얼굴을 드는데, 아까의 긴장한 낯은 완전히 지워버린 남자가 눈을 빛내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웃고 있었다.
“이것도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언제든 나를 지옥으로 넣을 수도 있다는 듯 조금 서늘한 얼굴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내게 면접을 보러오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