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불쌍한 아드리엔 피레타2021.07.07.
수도 중앙광장에서 몇 골목 떨어진 「레스토란테 젠디카」. 앤티크한 작은 식당은 귀족들이 드나드는 곳이라기보다, 부유한 상인들의 단골 맛집이었다. 그 근처에서 마차 하나를 지키고 선 이는 2황자 로아드네스의 직속 부관, 빈센토와 닐이었다. 그들은 눈에 띌까 적당한 평상복을 입은 채였다. 식당은 외부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닐은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며 가끔 드나드는 손님들을 유심히 살폈다.
“개황자 전하는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건가?”
“…….”
“빈센토, 네가 더 오래 모셨잖아. 이게 말이 되냐고?”
“명하시면 따라야지 뭐, 별수 있나.”
“혼기가 차다 못해 넘치고 나서야 여인에게 관심이 생기신 게야, 그렇지?”
닐이 반쯤 확신하며 팔짱을 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인들에게 영혼 없는 정중함 혹은 기가 질릴 만큼의 무례함만 선보이던 개황자가 이럴 리 없었다.
“이제 혼기에 드신 거지. 막 성인이 되셨는데.”
“어쨌든! 유부녀가 말이 되냐고?”
“안 될 것은 없지 않나? 귀부인이라지만 나이도 같고. 가벼운 데이트 정도야, 불륜 취급도 안 하는 게 이 나라인데.”
“그것도 그렇지만, 내 말은 전하가 전하답지 않게 저렇게까지 신경을 쏟는 게 너무…….”
“생각이 있으시겠지.”
비교적 덤덤한 빈센토에 비해, 닐은 일견 씩씩대며 문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이렇게 심각한 이유는 하나였다. 2년 만에 수도로 귀환한 주군이 승전 기념식 이후로, 황제의 애타는 호출은 개무시하고 웬 귀부인 하나와 일주일에 한두 번씩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벌써 2주나 지속한 만남이었다. 성격파탄자가 이렇게 성실하고 꾸준하게 교류하다니! 살아 있는 걸 죄다 죽이고 상처입히는 것만 봤지 멀쩡하게 차려입고 정중한 척하며 여인을 만나다니. 그것도 미모의 귀부인과. 가십지에서 캔다면 대번에 1면에 나올 사건이다. 물론 그들의 대화 내용과는 달리, 아주 건전하고 몹시 공적인 만남이긴 했지만, 상대가 이미 기혼의 부인인 게 아주아주 맘에 걸린다 이 말씀이다.
‘나를 그렇게 속여놓고는…….’
특히 닐은 이를 갈았다. 미인이 넘치는 수도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워 심장이 조금 떨리기까지 했던 그 하녀 ‘마지’가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었다니.
“전하께서 미모에 혹해서 혹시 모를 속임수에…….”
“전하께서 그럴 분인가?”
너나 그렇지, 병신. 이라고 말하는 게 분명한 표정이 빈센토에게서 떠올랐다. 닐은 그동안 로아드네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던 면면들을 떠올리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주군이 그동안 거들떠도 안 보던 미인이 몇이던가.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트로비카 대공비와 뭔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 전하가 아직도 본인이 대공비의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매일 밤 술에 절어계시는 데다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린다고. 닐은 입을 합 말아 물며 마지막 말은 입에 가둬두었다. 다행히도 빈센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그들 사이를 휩쓸었다. 수도로 돌아오면 장가갈 준비도 하고, 전장에서의 무용담을 풀어내며 존경만 받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 미친 말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로아드네스는 함께 전장을 나서면 그 누구보다 든든한 ‘전장의 악마’였고, 전투가 아닐 때는 자결을 부르는 ‘훈련장의 악마’였다. 하지만 대공비가 죽은 후 아주 든든하고 거대한 산 같던 사람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저 귀부인을 만나지 않는 모든 시간이 죽은 시간 같았다.
“어휴,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금지된 사랑이라도 해서 시가 연기만 자욱한 침실 밖으로 계속 나다니는 게 개황자 전하께 좋을 수도 있겠다.”
트로비카 대공비의 죽음 이후로, 로아드네스의 속이 심각하게 곪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 대공비가 가족같이 지내던 지인이라도 되나 보지. 따지고 보면 대공 노에비안은 반쪽이긴 해도 로아드네스의 숙부였으니까. 조용히 열리던 빈센토의 입술이 갑자기 다물렸다.
“전하!”
“그럼 이만.”
“오늘도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다음 만남은 다음 주 이 시간으로 알게요.”
로아드네스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함께 식당을 나선 것이다. 상기 된 얼굴로 로아드네스에게 예를 갖춘 귀부인은 이윽고 그의 부관들에게도 살짝 눈인사를 하더니 품에 책을 잔뜩 끌어안은 채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닐은 똑똑히 보았다. 로아드네스의 미묘한 시선이 멀어지는 마차 끄트머리를 보며 한참 머물러 있음을.
*** 로아드네스와의 만남 이후 벌써 며칠이나 흘렀다. 살인적인 과제를 받아온 날도 그만큼이나 흘렀다. 오늘 오후에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나는 로아드네스가 내어 준 과제를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까지 잘할 수는 없다던 오빠 그레고리의 말은 틀렸다. 그와의 수업은 벌써 여러 번 진행되었다. 그동안 내 공부는 아카데미 시절의 기억을 되살릴 만큼의 진척은 있었다. 게다가 며칠째 복습했더니 기억 저편에 있던 아카데미 시절의 수업내용까지 슬그머니 떠오르는 게 예감이 좋았다. 지금 시험을 본다면 A+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C+정도는 받을 수 있을지도? 신이 나서 문제를 푸는데, 힘 조절이 되지 않아 깃펜이 뚝, 부러져버렸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블리에의 튼튼한 몸에 익숙해진 나는 마지를 불렀다.
“마지. 내가 계속 쓰던 깃펜은 어디 있어?”
“예? 버렸는데요?”
“……뭐?”
잔뜩 길들여놓았던 깃펜 하나를 마지가 홀랑 버렸단다. 오랜만에 공부 좀 하려 했더니, 버르장머리 없는 하녀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가져다 버린 것이다. 나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표정조차도 짓지 않고 도리어 나를 이상하게 보고 말을 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새것’이라며 쓰던 것은 항상 내다 버리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말이 돼?”
펜은 주인이 길들일수록 부드럽게 잘 써진다. 무조건 새것이라고 좋은 게 아닌데!
“예에-. 저도 뭐 말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요. 마님께서 몇 번 쓰신 물건이나 누가 쓰던 것을 보시면 화를 내셨잖아요.”
“내가?”
“예, 마님이요.”
이 역시 블리에가 싸놓은 똥이겠지. 나는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버리지 말라고 하며 잠자코 요나가 찾아온 새로운 깃펜을 받아 들었다.
“‘나는 새것이 좋아, 나는 새것이 좋아.’ 늘 그러셨으면서 정말이지, 변덕 하나는 제국 제일이시라니까.”
“마지, 나 아주 잘 들려.”
마지가 콘솔을 정리하던 요나를 향해 대놓고 나를 씹어대다가 내가 반응하자 움찔했다. 좀 친근해지고 나를 더 챙긴다 한들 본성이 변하지는 않는 모양이지. 이제는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그저 픽 웃음만 나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먹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챙기니 밉지 않았다. 나는 내가 공부하는 것을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던 하녀들이 응접실 밖으로 떠나자, 조용히 침실로 넘어와 문을 잠갔다. 블리에의 분홍색 일기장은, 보석을 넣어두는 금고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대공저에서 훔쳐 온, 아니 가져온 내 보석들 사이에 이물질처럼 끼어 있는 낡은 분홍색 일기장.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계속 신경 쓰이던 정부의 일기장. 나는 긴장감에 혓바닥으로 입술을 적시고 문제의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다른 손에는 두꺼운 엘라콘어 사전도 들려 있었다. 로아드네스의 말대로, 엘라콘어의 문법은 쉬웠기 때문에 그가 기초라며 짚어준 단어들만 잘 기억하면 일상을 적는 일기 정도야 금방 해석할 수 있겠지. 나는 그동안 아카데미 시절에 앞부분만 깔짝였던 <초급 엘라콘어>를 벌써 반 이상 독파했다. 꽤 두꺼운 일기장을 그날 이후 다시 펼치자, 태반이 낙서나 그림이다. 중요한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날짜가 적힌 부분을 찾아 뒤적이다가, 유독 꾹꾹 눌러쓴 부분을 발견했다. 블리에는 대단한 악필이라 나는 손가락으로 그 글을 덧그리며 알아보려 애썼다. 그리고 드디어, 일기장의 첫 줄을 해석했다. 단어를 다 알지는 못해서 사전을 찾아가며 하는 바람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다. 그 첫 문장은 기가 막히게도, 다음과 같았다. 【불쌍한 아드리엔 피레타.】
“하!”
피가 싸늘하게 식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내가 자신의 친구도 아닌데. 뻔뻔하게 노에비안의 부인인 내 이름을 함부로, 이렇게……. 게다가,
“……불쌍해?”
그래, 불쌍하기도 하겠지. 싸늘하게 식어가던 심장이 다음 문장을 해석하려 다시 그 일기장을 덧그리자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깃펜을 쥐고 있는 손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와, 나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긴장을 가라앉혀야 했다.
“노에비안…… 마침내…… 구하다…….”
나는 홀린 듯 일기장의 빈 부분을 벅벅 찢어 깃펜을 놀렸다. 항상 반듯하게 글을 쓰던 내가, 블리에만큼이나 엉망인 글씨로 제대로 된 문장을 휘갈겨 썼다. 겨우 알아볼 수 있게 적은 문장의 단어 뜻을, 가지고 온 사전으로 미친 듯이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문장을 해석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마침내 약을 구했다.】
“뭐야…….”
별것도 아닌 문장이다. 그는 항상 나를 위한 약을 구해 보내왔으니까. 그 값비싼 약들이 없었다면 숨이 넘어갈 만큼이나 힘든 상황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조금씩 긴장을 풀고, 차분하게 다음 문장들을 해석해 나갔다. 해석은 어려웠고 나는 결국 사전으로 찾은 단어들을 붙잡고 조합해야 했다.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차피 아드리엔은 오래 살지 못한다. 죽음의 징후는 이미 아주, 아주 많이 보이고 있다. 시간이 없다.】 나도 몰랐던 내 죽음의 징후들을…… 이 블리에 아카시아는 나를 한 번 만난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알고 이렇게 쓴 걸까.
【불쌍한 아드리엔 트로비카. 결국엔 저가 정말로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다시 긴장하며 덜덜 떨던 나는 마지막 줄에서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제 남편이 저를 죽이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