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게 (20/171)

20. 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게2021.07.10.

16558450352361.png“아아아아악!!”

내 손에서 벗어난 일기장이 카펫 위를 사정없이 구른다. 나는 그 일기장을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쏘아보았다.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었더라면, 앞뒤 생각 없이 던져 넣어버렸을 텐데!

16558450352367.jpg“마님! 무슨 일이에요?”

16558450352367.jpg“마님!!”

갑작스러운 비명에 하녀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점점 거세지는 그 진동이 발길질처럼 내 심장에 그대로 전해져, 짓이겨지도록 지르밟히는 것 같았다.

16558450352361.png“노에비안 트로비카!”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들어 똑바로 응시했다. 이 손으로 이딴 글을 썼을 테다. 내 남편과 함께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16558450352361.png“노에비안 트로비카, 노에비안 트로비카!!”

목구멍이 찢어지고, 핏물이 돋아나는 느낌이다. 그저 정부 하나를 갖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다던 그 남자가. 장례식에서 그토록 울던 그 점잖은 남자가. ……나를 죽였다고! 내가 얼마나 살고 싶어 했는지, 내가 얼마나 건강해지고 싶어 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가!  

16558450352386.png‘나도 얼른 건강해져서, 당신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16558450352391.png‘아드리엔, 당신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힘이야.’

  잘도 그렇게 말해놓고……!

16558450352367.jpg“마님! 마님!!”

16558450352361.png“노아, 노아, 노아!!”

나는 감당하기 벅찬 배신감에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집어던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난폭한 행동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가슴이 먼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블리에의 취향인 분홍 장미가 만개한 꽃병이 사정없이 깨진다. 밖에서 하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그 소리가 내 감정을 더 부추기는 북소리 같았다. 나는 구둣발로 이미 깨져버린 꽃병의 조각을 퍽! 퍽! 짓밟았다. 조각이 으깨져서 가루가 될 때까지.

16558450352361.png“노에비안, 노에비안 당신이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사교계를 잘 모르는 이 집안 하녀들도. 영지라고는 저 변방의 자그마한 땅덩어리 하나가 전부인 아카시아 백작도 뻔히 알고 말해주던 것을. 이 블리에 아카시아가 당신의 정부라고. 이 몸이 당신의 숨겨둔 사랑이라고.

16558450352361.png‘당신이 직접 말해주기 전까지, 다른 이들의 말은 절대 믿지 않고. 당신을 믿으려 했던 대가가 바로 이런 거야?’

침실 여기저기 흩어진 분홍색 장미 줄기를 손에 꼭 쥐고서 하녀들이 두드리는 문을 퍽퍽 때렸다.

16558450352361.png“다 저리 가! 내 근처에! 아무도 오지 마!”

16558450352367.jpg“마님!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16558450352361.png“가! 다 꺼져!! 아무도 내게 오지 마!!”

퍽! 퍽퍽! 장미 꽃잎이 사방팔방 흩날리고, 내 발밑에서 짓이겨진다. 누구든 문을 열면 이렇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파괴심이 솟아올랐다. 잠시 소란스럽던 하녀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그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등에 닿는 문이 너무 차가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동시에 장미 줄기를 꽉 쥐었던 손이 따끔거렸다.

16558450352361.png“으…… 흑…….”

눈물이 구역질처럼 왈칵왈칵 쏟아지는데, 나는 널브러진 장미들을 더 꽉 움켜쥐었다. 날카롭게 돋아난 가시에 깊게 찔린 손바닥에 조금씩 핏물이 배어 나온다.

16558450352361.png“으으으윽……!”

남편이 숨겨둔 정부의 건강한 몸으로, 마음껏 나 자신을 상처입혔다. 심장이 바글바글 끓고, 머릿속이 온통 진창이 되었지만 피가 나는 손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전신거울 앞까지 갔다. 깨끗이 닦여 있는 거울에 블리에 아카시아가 비친다. 구불거리는 관능적인 흑발이 마구잡이로 엉켜 있고, 화장은 얼마나 울었는지 이리저리 번져 있었다. 똑같이 생겼지만, 분명히 내가 아닌 여자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날 보고 있었다.

16558450352361.png“블리에.”

당연하게도 이 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날 바라보며 상처 입은 맹수처럼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16558450352361.png“블리에. 넌 도대체 뭐야. 도대체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는 그 몰골을 보면서 또 한 번 미친 듯이 울었다. 내장을 토해내는 듯한 울음이었다. 건강한 이 몸이 완전히 지칠 때까지 오열하고 나서야, 걱정 가득한 하녀들이 결국에는 이 침실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찾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일말의 미안함 마저 사라졌음을 느꼈다.

16558450352361.png“……넌 절대로 이 몸으로 돌아오지 못해.”

노에비안과는 별개로, 건강한 이 육체를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그 일말의 가책 말이다. 내가 꾸민 일도 아니었고 나 역시 어떤 영문으로 내 영혼이 이 몸에 들어왔는지 몰랐지만 나는 어렴풋이 진짜 블리에를 생각했었다. 지금 그녀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건강한 몸을 잃고 예전의 아드리엔 같은 몸에 들어가 지독한 고통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팔자 좋은 걱정들은 다 집어치우기로 했다.

16558450352361.png“만에 하나 네가 돌아오더라도…… 네 영혼을 담아줄 그릇 따윈 이제 없어. 알아?”

나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독한 말을 서슴없이 그녀의 얼굴에 대고 내뱉었다. 독기로 가득 찬 연녹빛 눈동자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거울 속 나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16558450352361.png“이제 너는…… 진짜 나야.”

나는 책에나 나오는, 사람을 속이는 주술사들이나 하는 빙의 따위가 된 게 아니야. 신께서 이 엿 같은 상황도 모르고 죽어버린 내가 불쌍해서, 블리에 네게 벌을 내리신 거지. 나는 내게 익숙한 모습 그대로, 다시 태어난 거야. 그러니 이것은 환생이야. 기회이고.

16558450352361.png“이건, 환생이야.”

내가 짓씹듯 내뱉었다. 블리에 아카시아가 야차 같은 눈으로 나를 본다.

16558450352361.png“이제 네 몸은, 진짜 내 거야.”

이제는 내가 블리에인 거야. 그녀가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그리고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보란 듯 웃었다. 아무도 그것을 미소라고 생각하지 않았어도 블리에 아카시아의 영혼 한 자락이나마 이 꼴을 보고 미쳐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쓸모없는 방황과 혼돈의 시간은 끝났다. 나는 아직도 노에비안의 배신을 믿을 수가 없어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하면 나 역시 그를 배신하고 상처 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 역시 나처럼 아팠으면 좋겠다. 단순히 내가 그를 떠나거나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상처 입는 것 말고, 정말로 그가 아팠으면 한다. 나처럼 절망했으면 한다. 나처럼 내장을 토해낼 만큼 울부짖었으면 한다. 중간에 그만두었던 아카데미였지만. 성적도 그리 좋지는 못했지만. 『남편의 정부로 환생해버린 심정을 서술하시오. (10점)』 만약 교수들이 그런 문제를 냈었다면, 나는 꽤 좋은 점수를 얻지 않았을까.

16558450413579.jpg

  ***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아주 이른 시간이었지만, 로아드네스는 「레스토란테 젠디카」의 문 앞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 제시간에 맞춰오던 아카시아 백작저의 마차가 아주 이른 시간 등장하자, 놀란 듯 눈을 끔뻑이다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마차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 때문에 조금 늦은 시간 만나서인가. 어둑해진 바깥과 똑같이, 마차 안은 어두웠다.

16558450413584.png“부인.”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부르는데, 블리에 아카시아는 대답이 없었다. 로아드네스가 마차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았다. 무릎에 손을 얹고 얌전히 앉아 있는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떨고 있었다.

16558450413584.png“부인?”

기묘한 분위기에 놀란 그가 주변을 살피고는 마차 안에 훌쩍 탔다. 그가 마차 문을 닫자 멀찍이 서 있던 부관 빈센토가 마차 문 앞을 지키고 섰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블리에가 그제야 얼굴을 살짝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반짝이던 연녹빛 눈동자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혀 감히 입조차 떼지 못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싸늘한 정적이 계속되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급히 정리한 듯한 머리카락. 조금 흐트러진 차림새. 간헐적으로 떨리는 가느다란 손이 짚고 있는 무릎 부분을 조금씩 피로 적시고 있었다. 그는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그녀의 손을 덥석 들어 올렸다. 미약하게 반항하던 블리에 아카시아가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끝내 손바닥을 보였다.

16558450413584.png“이게 뭡니까?”

그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노을빛에 물든 블리에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온통 젖어 있었다. 뾰족한 것에 찔리고,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손은 기본적인 처치조차 되어 있지 않고 핏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16558450413584.png“무슨 일입니까?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노쇠한 아카시아 백작이 갑자기 이혼하고자 하던 마음이 바뀌어 부인을 이렇게 잔인하게 대한 것일까? 아니면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블리에가 이혼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사람을 시킨 것일까? 어쩌면 백작저의 괘씸한 하녀들이 평민 출신인 블리에를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제 손을 로아드네스에게 내어주고는 남의 손을 보듯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16558450413584.png“내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까? 말을 좀 해보십시오.”

아드리엔과 똑같은 얼굴로 파리한 안색을 한 블리에를 보자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로아드네스가 급하게 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상처 입은 작은 손을 감싸주었다. 이윽고 블리에의 도톰하고 파리한 입술에서 이름 하나가 나왔다.

16558450352361.png“노에비안…….”

16558450413584.png“……그가 이리 만든 겁니까?”

그러자 돌연, 블리에 아카시아의 눈이 그의 새빨간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16558450352361.png“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죽이고 싶어요.”

16558450413584.png“!”

무슨 이유에선지 로아드네스는 그 눈빛에서 절망을 보았다.

16558450352361.png"어떻게 하면……."

그리고 블리에 아카시아의 눈 안에서 거짓말처럼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내린다.

16558450352361.png"……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게 죽일 수 있죠?”

1655845044407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