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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직접 가한 벌 (21/171)

21. 직접 가한 벌2021.07.14.

아카시아 백작저. 나는 어제부터 계속 침대에 누워 블리에의 일기장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속을 온통 긁어내는 울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내장이 다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는 눈물이 되어 애꿎은 베개만 적셨다.  

16558450846604.png‘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분명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날 이끌고 식당에 들어가 내 손바닥에 박힌 장미 가시와 유리 조각을 직접 뽑고 치료해주었다. 따가울 법도 했건만, 이미 뒤통수를 터질 만큼 세게 맞은 기분이기에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치료하는 내내 돌처럼 굳어 있었다.  

16558450846604.png‘내가 당신을 돕는 것은, 아드리엔의 시신을 확인하는 날까지입니다. 나 역시 아드리엔을 두고 당신을 만난 대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고, 또 분노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당신을 돕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16558450846614.png‘…….’

16558450846604.png‘……대공과 싸웠습니까?’

  차라리 그런 것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로아드네스는 중간중간 이를 악물면서도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대공을 죽일 수는 없다고. 당신의 말대로, 그를 배신해 상처입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고. 꼭 감은 두 눈에서 댐이 터진 듯 눈물이 쏟아졌다. 곧이어 요나의 조심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열렸다. 나는 끌어안고 있던 일기장을 이불속에 감추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누구와도 함께이고 싶지 않았다. 요나가 먹지도 않을 식사를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꼭 틀어막고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였을까. 그가 저택을 떠나고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발작이 일어났고, 그 발작은 정도가 심하긴 했어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조금씩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16558450846622.jpg“저어…….”

나는 눈물을 닦고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요나가 우물쭈물하더니 역시나 번쩍이는 금쟁반 위에다가 초대장 하나를 올려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침실 입구를 보자 마지가 다른 곳을 보는 척 곁눈질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16558450846614.png“……뭐야?”

잔뜩 잠긴 내 목소리에 움찔하던 요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기가 다 빠져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대었다. 얇은 붕대가 감긴 손을 그 초대장으로 뻗자, 요나의 얼굴에 더욱 심한 걱정이 감돌았다.

16558450846622.jpg“도와드릴까요, 마님?”

16558450846614.png“…….”

나는 대답하지 않고 초대장을 펼쳤다. 끝에 분명히 내가 익히 아는, 그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서명이 버젓이 되어 있는 그의 초대장. 이번에는 블리에 아카시아의 이름도 또렷하게 직접 썼다.

16558450846622.jpg“저는 한 시간 뒤쯤, 그러니까 마님의 상태가 좀 더 괜찮아졌을 때 드리자고 했어요. 그런데…….”

요나가 다급하게 변명하며 낮게 속삭였다.

16558450846622.jpg“마지 님이,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니 빨리 전해드려야 한다고…….”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었던 목소리가 저택에 쩌렁쩌렁 울렸던 게 분명하다. 요나가 진심으로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듯 쭈뼛대며 말했다. 하지만 내 귀에 그녀의 울먹임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바빠 연락하지 못했군. 아드리엔의 탄신연에서 내 저택의 하녀들이 그대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을 정식으로 사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 저녁 식사 초대였다. 나는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그 초대장을 도로 금쟁반 위에 올렸다.

16558450846622.jpg“마님?”

16558450846614.png“지금 몇 시쯤 되었지?”

16558450846622.jpg“시간이요? 점심 즈음이에요. 시장하셔요?”

요나가 헐레벌떡 아까 음식을 올려놓았던 테이블로 가서 의자를 빼주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놓인 금쟁반, 그리고 그 위의 초대장으로 향해 있었다.

16558450846614.png“아니, 대공이 내게 저녁 식사 초대를 했어.”

16558450846622.jpg“아……?”

요나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싸운 것 같던 우리가 화해라도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16558450846614.png“지금 당장 갈 거야.”

16558450846622.jpg“예에?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는데요, 마님!"

16558450846614.png“상관없어. 지금 간다고 연락을 보내.”

그 점잖고, 아름답고 뻔뻔한 얼굴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쌍한 아드리엔 트로비카. 결국엔 저가 정말로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제 남편이 저를 죽이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테지.】  

16558450846622.jpg“마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요나가 달려와 안절부절못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16558450846614.png'그런 걸로는 막을 수 없어.'

이 절망과 분노를 다 토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이미 죽어버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당장 그를 만나 무엇이든 토해내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16558450846622.jpg“지, 지금 당장 치장을 해드릴게요! 울지 마셔요!”

문밖에서 그 꼴을 다 보고 있던 마지가 크게 당황하며 요나와 함께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노에비안 트로비카에게 잘 보이려 치장 준비를 하는 그들에게 음울하게 덧붙였다.

16558450846614.png“……블리에처럼 해줘.”

16558450846622.jpg“예?”

16558450846614.png“평소의 나처럼 꾸며달라고. 화려하고 요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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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카시아 백작저의 마차가 대공저로 들어서자마자 멈추어 섰다. 입구까지는 한참 멀었는데도. 요나가 문을 살짝 열어 몸을 뺐다.

16558450846622.jpg“왜 그래요, 장 아저씨?”

16558450846622.jpg“입구에 황가의 마차가 있어서!”

나는 창문을 열어 고개만 내밀었다. 곤란한 듯 보이는 집사 가스팔이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정중한 척 인사를 했다. 나는 못 본 채 창문을 탁 닫아버렸다.

16558450846622.jpg“아무래도 너무 빨리 왔나 봐요.”

16558450846614.png“누가 왔는데?”

16558450846622.jpg“집사가 알려주지는 않는데, 황가에서 사람이 온 건 확실한가 봐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데요?”

반대편 창문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요나 역시 창문을 닫고는 내게 말했다. 나는 노에비안을 배려하여 조금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16558450846614.png“그냥 내려서 걸을래.”

16558450846622.jpg“예?”

16558450846614.png“너는 마차를 지키고 있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건 당사자인 나 혼자로 충분하니까. 묘하게 단호해진 내 태도에, 요나가 우물쭈물하다가 얌전히 있었다. 내 마차의 문이 열리자, 가스팔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16558450846622.jpg“부인!”

나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팔이나 달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블리에가 지었을 법한 표정으로 쏘아보자 가스팔이 후드득 떨더니 얌전히 팔을 내밀었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듣던 그 집사가 맞나 싶을 만큼의 얌전한 태도였다. 내 마차 앞에는 황가의 마차는 물론이고, 기사들이나 탈 법한 기골이 장대한 커다란 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16558450846614.png“누가 왔나?”

16558450846622.jpg“아, 그것이…….”

가스팔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나를 안내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꼴이 너무 보기 싫어 손에 힘을 꽉 줘서 그의 팔을 비틀어 잡았다.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가스팔이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16558450846622.jpg“황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

16558450846614.png“그래서, 네놈이 내게 훈계질이라도 하려고?”

도저히, 입에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16558450846622.jpg“예?!”

표정은 잔뜩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가스팔 놈이 하는 말은 건방지기 짝이 없다. ‘네가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온 탓이다’라는 귀족의 언어를 집사 주제에 잘도 쓰고 있었다. 평민인 블리에는 가스팔이 그저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줄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16558450846614.png“일찍 올 경우도 대비했어야지. 집사?”

16558450846622.jpg“아…….”

16558450846614.png“나와 대공 전하의 사이가, 시간을 딱딱 지켜야 할 만큼 딱딱한 사이는 아니잖나?”

이만한 대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준비성 없기는. 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가스팔이 입을 바보같이 벌리고는 나를 멀뚱히 보았다. 그러고는 곧 정신을 차리고 주둥이를 연다.

16558450846622.jpg“아, 예…… 송구합니다. 부인.”

정원을 가로질러 걷는데, 저택 현관에서 노에비안과 함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나왔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황태자 바르데날도였다.

16558450846622.jpg“죄송합니다, 부인.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나를 정원수 뒤에 감추다시피 놔두고, 가스팔이 전속력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정수리가 땅에 처박히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황태자를 뒤따라 나오는 황실 기사단의 마지막 한 명까지 제 앞을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든다. 그 사이 황태자는 노에비안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항상 그랬듯이 따뜻하게 웃다가, 황금으로 만든 빛나는 황가의 마차에 올라탄다. 황태자 일행이 커다란 정원을 돌아 저택의 입구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흙먼지만 남은 곳에는 어느새 노에비안은 없고, 가스팔만이 내게 이제 와도 된다는 듯 한껏 갸륵한 눈깔로 팔을 내밀고 서 있었다. 이어지는 가스팔의 느끼한 시선을 참고 메인홀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은 노에비안이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곧바로 소리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아야했다.

16558450966014.png“일찍 왔군.”

16558450846614.png“…….”

16558450966014.png“직접 데리러 가지 않아서, 서운했나.”

그는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서운했냐고 물어놓고는 되레 자신이 서운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단정히 묶어놓은 긴 흑발. 반듯한 이마와 날카로운 눈매. 내게로 향한 서늘한 푸른 눈. 잠시 신문이라도 보려 했던 듯 끼고 있는 외알 안경 너머의 눈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지 그늘이 져 있었다. 그가 피곤하면 나오는 얼굴이었다. 그를 마주하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일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배신당한 나보다 더 퀭한 몰골을 보자 떨리는 몸과는 반대로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노에비안은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리게 시선으로 훑었다. 여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나는 아마 좋은 구경거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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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눈썹을 비틀던 그가 낮게 한숨 쉬며 내뱉었다.

16558450966014.png“그대는 그렇게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16558450846614.png“……화려한 것이 좋아요.”

16558450966014.png“참, 그랬지.”

취향도 잘 아나 보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8450846614.png“그리고, 당신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어서요.”

나는 그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심장이 바르르 떨린다. 하지만 나의 그런 긴장감 따윈 눈치도 못 챈 노에비안이 피식 웃고는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16558450966014.png“……이게 뭐지?”

내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걸 본 노에비안의 얼굴이 이제는 확연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58450846614.png“별것 아니에요.”

뭐긴 뭐야. 네 정부의 몸에 내가 직접 가한 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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