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뭐 하니 꿇지 않고?2021.07.17.
대공저의 다이닝룸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적막이었다.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물이 든 주전자나 와인병, 물잔, 냅킨 등을 받쳐 들고 서 있었는데 받쳐 든 손보다 고개가 더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다.
“그 손, 왜 그랬는지 말 안 해줄 건가?”
“그냥…… 꽃꽂이하다 좀 다쳤어요.”
꽃을 만진 것은 맞으니까. 그 꽃으로 백작저의 벽을 온통 두들겨 팼다. 노에비안, 당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말은 크리스털 잔에 담긴 물과 함께 삼켰다. 그는 미심쩍은 듯 미간을 좁히다가 이내 포기한 듯 차려진 음식들을 향해 손짓했다.
“뭘 좋아할지도 모르겠고, 생각보다 일찍 온다길래 다 준비하라 일렀는데…….”
숨겨놓고 제 아내를 죽이기 위해 작당 모의까지 한 사이인 주제에 저녁 식사 한번 해본 적이 없나? 꽃꽂이를 했다는 말에도 놀라지 않고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백작저의 하녀들이라면, 블리에가 꽃꽂이를 했다고 하는 순간 이마에 손부터 올려볼 텐데. 나는 대답 대신 테이블을 둘러보는 척, 주변에 서 있는 하녀들의 목을 살폈다. 역시 목걸이를 한 하녀는 없다.
“맛있어 보이네요, 고마워요.”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는 척 미소 지었다. 덤덤하던 노에비안의 얼굴에 약하게나마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먹지.”
그는 잠긴 목으로 말해놓고,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거대한 고깃덩이를 잘게 잘게 썰었다. 나 역시 입안으로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거든. 그러면서 노에비안 근처에 있는 하녀들까지 샅샅이 살피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대공저의 건방진 사용인들은 모두 노에비안이라면 어느 정도 무서워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네.’
하녀며 시종이며 할 것 없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손목이나 목덜미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개중에는 절뚝이는 이들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이는 이들까지. 쨍-. 내가 요란스럽게 포크를 내려놓자, 시선이 집중됐다.
“분위기가 영 안 좋군요.”
“그런가?”
그가 내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집사 가스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우리를 살피던 그가 구석에 놓인 턴테이블로 가 음악을 재생시킨다. 웅장하고 멋진 음악. 로맨틱하고 달콤한 음악. 차례대로 음악을 넘기다가 적당히 잔잔한 음악이 나오자 노에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팔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다. 이제는 뭔가를 입에 넣을 마음이 생기느냐는 듯한 움직임이다. 그럴 리가.
‘내가 당신 얼굴을 보고, 어떻게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겠어?’
하지만 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고기를 짓이기고 먹는 척하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 누구도 배부르지 못한 식사 자리가 끝까지 지속되었다.
*** 식사를 다 하고 다른 곳으로 에스코트 받는 동안, 나는 다이닝룸의 사용인들만 분위기가 안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일 때문인가?’
내가 되찾아온 내 보석들.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해 모조리 매를 맞은 것인가. 귀족의 사유재산을 도둑질하면, 최대 손목이 잘리는 형벌까지 내릴 수 있다. 이 대공저에서 나는 물론이고 노에비안이 매질이나 형벌을 내린 경우는 없었다. 내 경우에는 저택 안에서 도둑질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을 뿐더러 알아서 벌을 내려도 집사가 명령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을 테고, 노에비안 역시 저택 안의 일을 잘 몰라서였다. 그가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이 대공저 악마들의 실체를 봤을 수도 있지.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심한 벌을 받아야 할 사용인들도 분명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내가 조금만 틈을 주면 빙긋 웃으며 기름에 담갔다가 뺀 눈깔을 한 저 집사 가스팔 같은 놈 말이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목이 잘린 이는 없었지만, 대부분이 모진 매질을 당했는지 집사 가스팔이 지나가거나 노에비안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그 안에는 애니도 있었다. 빛바랜 밀빛 머리카락을 가진, 2년간 나를 제일 가까운 곳에서 괴롭히던 그 하녀 말이다. 이미 어제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나는 두려워 떨면서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웃었다. 블리에의 화려한 외양과 반짝이는 하얀 이는 이럴 때 참 쓸모가 있다. 애니의 탁한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그녀가 부들부들 떤다.
‘아…….’
애니와 마주치면 얼마 전 하녀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더 공포에 질릴 줄 알았는데.
‘별것 아니잖아.’
건강한 몸으로 떨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니 하찮고 가소롭기 그지없다. 고작 저런 초라한 하녀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던가, 나는.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이유로 부들부들 떠는 애니의 모습을 보자 내가 바랐던 것이 바로 저 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아드리엔이 아니잖아.’
블리에는 이런 것에 기뻐해도 되는 거잖아. 귀족의 지고한 품위 따위 벗어던져도 되는 거잖아. 그리고 나는 그들이 단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나였다. 바로 나!
“왜 그러지?”
“잠깐만요.”
잠자코 노에비안이 이끄는 대로 계단을 오르던 내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자기 피가 끓었다. 온몸에 넘치는 힘과 분노를 지금 당장 어딘가에 분출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나는 노에비안의 손을 놓고, 방금 지나쳐온 애니를 향해 걸어갔다.
“거기, 너.”
계속 나를 힐끔대던 애니가 모으고 있던 두 손에 힘을 꽈악 주더니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
“너, 나를 알지?”
“왜 그러지?”
“대답해보렴.”
노에비안은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크게 당황해하며 내 곁에 섰다. 내가 여유롭게 부채질을 하며 애니를 내려다보았다. 애니는 나를 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다른 하녀들은 몰라도 애니가 이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된다. 노에비안은 내 몸에 바짝 다가와 은밀히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그를 보았다. 그 눈이 그를 자극한 듯,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네 주인께서 가신의 부인인 나를 이 저택으로 친히 부르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
주위에 있던 사용인들 몇이 기함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공식적으로 초청받았지만, 눈치가 있는 자들이라면 노에비안과 내가 묘한 사이라는 것도, 대공비 아드리엔과 닮은 귀부인이라는 것도 어디서 주워들어 알 테지. 위아래를 모르는 대공저 아랫것들의 입은 다른 이들보다 특히 가벼울 테다. 예전이었다면 노에비안의 체면을 위해 하지 않을 말을 지금의 나는 뭐든 말할 수 있고. 건강한 이 몸으로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호승심이 일었다.
“위아래를 모르더니, 귀라도 먹어 그랬던 거니?”
나는 탁 소리 나게 접은 부채로 애니의 이마를 꾸욱 밀었다. 휘청하던 애니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그녀의 눈은 혼란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파르르 떨리는 얼굴이 경련이라도 난 듯 보였다.
“부인.”
노에비안이 말리듯 말했지만 얕게 흥분한 내 귀에는 닿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예요. 대공비 전하의 회고연 때, 대공가의 충성스러운 가신인 아카시아 백작가의 안주인에게 감히 무례하게 군 아이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전하!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저는 그날 이 부인을 대공비 전하의 침실에서 처음 뵈었어요!”
“……보는 눈이 많소, 일단…….”
“저 역시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그런 수치를 겪었죠.”
대공비 아드리엔은 체면을 위해 입을 다물었고, 괴롭힘을 감내했다. 대공저 안에서 누가 어찌하든, 그것이 밖으로만 새어나가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할 사용인들이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던 시절의 내게 반드시 내 몸을 의지해야 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공포였으니까.
“사과의 의미로 저를 이 저택에 초대해주셨죠, 감사해요.”
“백작 부인.”
“하지만 저는 누구에게도 사과받은 적 없는걸요. 설마 황족이신 대공 전하께서 저 하녀를 대신해 사과하신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저는 단지, 보잘것없는 아이의 보잘것없는 사과면 충분하답니다.”
“…….”
노에비안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블리에 아카시아는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여인들의 대화에…… 사내가 끼어드는 것은 반칙이지요, 전하?”
“……끝나면 보고하게, 집사.”
“예, 전하.”
노에비안은 체념한 듯 자리를 비켜주었다. 순식간에 2층 계단에는 집사 가스팔과 나, 그리고 애니와 하녀 몇만 남았다. 애니는 부들부들 떨며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 대공 전하께서는 대쪽 같으신 분이라 그런 거짓말로 아무리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으실 거예요.”
잇새를 짓씹으며 말하는 내용은 뜬금없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그렇구나. 그래서 너를 그리 대쪽 같이 내게 맡기고 모른 척하신 거였어.”
“저는, 저는 믿지 않아요. 부인이 대공 전하의 정부라느니 숨겨둔 연인이라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주먹을 꽈악 쥐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하는 꼬락서니가 딱 배신당한 본부인이 따로 없었다.
“여기 대공비 전하 같은 바보가 또 있네.”
나는 망설임 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처연하게 울면서 뜬금없이 노에비안의 부정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애니의 얼굴이라니! 이보다 꼴 보기 싫은 장면이 또 있을까?
“부인……!”
지켜보던 가스팔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한 발을 불쑥 내밀었다.
“왜 그러는가.”
“어찌 지고한 대공저 안에서 그런 말씀을……!”
이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어쩜 이리도 위아래를 모르는지.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그를 비웃었다.
“네 놈이 무엇인데 끼어들어. 여인들의 대화에 사내가 끼는 것은 반칙이라는 내 말을 대공께서도 알아들었는데. 멍청한 놈.”
늘 기름진 얼굴이던 가스팔이 충격으로 눈을 크게 뜨고 살찐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은 통쾌한 듯, 두려운 듯 미묘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서 있었다.
“부인, 저를 모욕하는 것은 이 대공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자네가 무엇인데?”
“저는, 트로비카 대공가가 세워지던 그 역사적인 순간부터 함께한…….”
“멍청해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다르게 물어봐 주겠네. 자네 눈엔 내가 뭐로 보이지?”
“!”
“나를 모욕하는 것은, 누구를 모욕하는 것이지?”
예전부터 나와 노에비안의 사이를 알았던 듯한 가스팔의 눈에서 순식간에 반항기가 사라졌다. 아마 이 대공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블리에 아카시아가 제 주인의 정부라는 것을. 그녀를 모욕하는 게 누구를 모욕하는 것인지를. 대공이 떠나면 편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사용인들에게 몸을 의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드리엔이다. 블리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
“끝나면, 사람을 시켜 종을 울리십시오. 부인.”
가스팔이 이를 악물고선 허리를 반쯤 접고 사라졌다. 대공 없는 대공저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자이니, 사용인들 앞에서 이리 큰 망신을 당하는 게 수치스럽겠지.
“자, 그럼…… 우리는 하던 일이나 마저 해볼까?”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애니의 탁한 눈동자가 나를 멀거니 응시했다.
“무, 무슨 하던 일을…….”
“뭐 하니?”
나는 접은 부채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닥을 정확히 가리키며 웃었다.
“꿇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