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저는 새것이 좋아요 (23/171)

23. 저는 새것이 좋아요2021.07.21.

급격히 치솟는 피로감에 노에비안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식사하는 내내 아드리엔이 생각나 입에 아무것도 넣을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는 아드리엔의 얼굴이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노에비안은 양각으로 장식된 유리잔에 얼음과 술을 급히 채워 넣어 마셨다. 아드리엔은 죽었고, 이제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가져야 할 때다.

16558451223433.jpg“전하.”

16558451223438.png“?”

찰랑거리는 술을 한 모금 머금고 관자놀이를 짚는데, 집사 가스팔이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16558451223438.png“벌써 끝났나?”

16558451223433.jpg“이제 시작입니다.”

잠시 미간을 꿈틀대던 노에비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58451223438.png“그리해야 마음이 풀린다니 어쩔 수 없지.”

16558451223433.jpg“…….”

16558451223438.png“나가서 살펴보게.”

가스팔은 노에비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푸른 눈이 순식간에 어둡게 침잠했다. 노에비안은 술을 한 번 머금은 이후로 다시 술에 입을 대지 않았다.

16558451223438.png“……이상하리만치 조용하군.”

며칠 만에 묘하게 변했어. 아드리엔의 죽음 이후, 블리에가 불안정해졌다. 장례식에 초대해 직접 아드리엔의 죽음을 확인하게 하면, 분명 기쁨을 감추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경솔하게 구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경멸하는 행동이었지만 요즘의 블리에는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드리엔의 회고연에서도 하녀의 무례를 그냥 보아 넘길만한 인물이 아닌데 블리에가 숨을 쉬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귀를 의심했던가. 비록 누군가는 천박하다 생각할 만큼 마음대로 행동했지만 제게는 입안의 혀처럼 굴던 여자인데.  

16558451223466.png‘여인들의 대화에…… 사내가 끼어드는 것은 반칙이지요, 전하?’

  콧소리를 내며 일러바치기 바빴을 블리에 아카시아가 본인이 직접 나서더니 제게 그런 말까지. 이 불안한 감정은 뭘까.

1655845122347.jpg

  *** 블리에 아카시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천박한 구석이 있었다. 단순히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 기분이 나쁘면 주변에 있는 물건부터 집어 던지는 행태를 가끔 봐왔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은 뭔가? 집사인 제게 대놓고 이놈, 저놈 하진 않았었는데. 평소 앙금이 있던 사람처럼 차가운 눈을 하며 하녀를 향해 망설임 없이 보잘것없는 것이라 칭하며 자세를 꼿꼿이 세웠다. 나오는 말은 귀족이라기엔 직설적이었지만, 손짓, 발짓, 눈짓이 뭐 하나 평민 같지 않았다. 어린 시절 풋맨으로 이리저리 많은 귀족가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익숙하다니. 귀족의 옷을 입고 날뛰는 블리에만큼 이질적인 것은 또 없었는데 말이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거대한 계단 한 층을 오르자 누군가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16558451223433.jpg“주제를 알겠습니다. 주제를…… 주제를 알겠습니다. 주, 주제를……. 흑.”

16558451223433.jpg“!”

한바탕 뺨이라도 올려붙일 줄 알았던 블리에는 그 자리 그대로 서서 하녀를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다만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애니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그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닥은 애니가 흘린 눈물로 이미 흥건했다.

16558451223466.png“잘 안 들리는걸.”

블리에가 여상히 말하자, 애니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때리려나? 하지만 블리에는 애니의 곁에 서 있던 하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공간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16558451223433.jpg“!”

그 하녀가 애니의 뺨을 찰싹 쳤다. 그리 아파 보이진 않았지만 같은 하녀에게 맞는 수치심은 상당해 보였다.

16558451223433.jpg“저게 무슨…….”

애니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억울함과 분노를 가득 담아 펑펑 울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꼴을 보니 처음 맞은 게 아닌 듯했다. 가스팔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 잔혹한 장면을 보고 있는 블리에를 보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시선을 느꼈는지 가스팔에게 시선을 주었다.

16558451223433.jpg“!”

가스팔은 그 순간, 자신도 이유 모를 소름이 팔에 오소소 돋았다. 귀부인이 저를 향해 생긋 웃자 멀찍이서 종소리가 울리고 있는 착각이 일었다. 그는 저 귀부인의 관능적인 모습에 한순간 마음을 빼앗겨 명백히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블리에의 눈이 그를 향한 호의나 이 상황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는 것을. ***

16558451223466.png‘그다음은 너다, 가스팔.’

나는 멀찍이서 나를 보는 집사를 향해 그리 생각하고 다시 애니를 보았다. 그리 울면 누가 와서 도와줄 것이란 희망이라도 품고 있는 듯 한참 엉엉 울던 애니는 그게 에너지 낭비라는 것을 알았는지 훌쩍이고 있었다. 눈이 부르트고, 서너 번 맞은 뺨은 붉게 달아올라 부어 있는 모습이었지만 내게 그리 처참해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그런 것보다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는 뺨과 손, 방금 갈아입은 듯 깨끗하고 잘 다려진 하녀복이 눈에 들어왔다. 제 주인은 말라비틀어지게 해놓고, 며칠 동안 옷도 갈아입혀 주지 않아놓고, 여전히 이렇게 잘살고 있는 하녀를 보자 마음이 마구잡이로 비틀렸다. 동시에 갑자기 이런 체벌을 가하는 내 모습이 생경해 번쩍 정신이 들었다.

16558451223466.png‘블리에니까. 본래의 블리에라면 이 정도로는 안 끝났겠지. 그러니 괜찮아.’

누군가에게 잔인해 본 적 없던 나는 그리 생각하며 떨리는 손과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충격으로 멍해져 있는 애니를 보다가 조용히 곁에 있는 종을 딸랑였다. 숨이라도 찬 것처럼 거칠게 호흡하는 가스팔이 예전보다 한층 기름진 눈으로 단번에 다가왔다.

16558451223466.png“저것을 저리 치우게.”

16558451223433.jpg“예, 부인.”

16558451223466.png“아, 그리고 네가 부축하렴.”

나는 방금까지 애니의 뺨을 수차례 쳐야 했던 하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정하게 웃으며 뒤끝은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내 지목을 받은 하녀는 다름 아닌 실제로 회고연에서 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하녀들을 불러 모았던 마리였다. 즉, 본래의 취지로 매를 맞아야 했던 하녀는 마리였다는 뜻이다. 애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어둑해진 얼굴이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축을 받은 애니가 저를 감싼 팔을 꽈악 잡자 마리가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따뜻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마리나 다른 하녀들에 대한 벌은 애니가 충분히 주리라. *** 옅은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노에비안은 내게 별말 하지 않았다. 애초에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으니 사용인들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고.

16558451223466.png‘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으면 몰랐던 거겠지.’

생각해보면 참 무심한 주인이 아닌가. 난 피식 웃으며 그가 나를 이끄는 대로 따랐다. 어느새 사용인들은 따라오지 않고 노에비안과 나만 3층으로 올라가 드레스룸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오늘은 내게 뜨거운 눈을 하고 있지 않으니 별다른 일이 없을 것 같기는 한데. 뭣 하러 드레스룸으로 가는 걸까.

16558451223438.png“여기는 내 아내의 드레스룸이야.”

그가 이제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 드레스룸의 문을 손수 열었다. 내가 이 드레스룸에 들어온 지가 까마득해서인지 처음 와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옛 기억처럼, 아주 거대하고 우아한 곳이었다. 드레스룸 한가운데의 유리로 된 장식장에는 각종 보석이 즐비했고, 그 주위 3면의 벽에 빼곡히 계절에 맞는 드레스가 가득했다. 하나같이 고급품이었고, 아드리엔의 취향이었다. 고전적이고, 우아하고 뭐 그런 것들.

16558451223466.png‘혹시 어머니의 목걸이도……?’

나는 보석이 전시된 장식장에만 홀린 듯 다가가 정신없이 목걸이를 찾았다. 그 모습을 본 노에비안이 낮게 웃는 것이 들렸다. 놀랍게도, 나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그리고…….

16558451223466.png‘아.’

장식장 유리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조금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에서 반짝이는 것은 분명, 내 어머니의 목걸이였다. 액세서리라고는 전혀 하지도 않던 그가 돌연 저런 것을 목에 걸고 있다니.

16558451223466.png‘하녀가 훔쳐 간 걸 찾았나, 아니면 처음부터……?’

나는 내 몸 안의 피가 빠르게 도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뒤돌았다. 아마도 상기된 표정이었을 것이다. 노에비안은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고.

16558451223438.png“갖고 싶은 것이 있나? 당사자의 사과를 직접 받고 싶어 했지만, 내 저택에서 벌어진 일이니, 사과의 의미로 선물하고 싶은데.”

바로 이렇게. 확실히, 블리에 정도의 귀부인이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급이 높은 물건들뿐이다. 게다가 아드리엔은 저런 값비싼 보석을 선물 받아도 그것을 걸치고 나갈 곳도 없었고. 그러니까……. 새것이나 마찬가지란 이야기지. 하지만 노에비안의 생각과는 달리, 내 눈은 오로지 그의 셔츠 안쪽에서 반짝이는 금줄로 향했다. 저 금줄을 따라 내려가 펜던트를 열면 내 어머니의 유일한 초상이 나온다. 그 어머니의 생명을 먹고 태어난 나를, 그렇게 살고 싶었던 나를 죽인 내 남편이 버젓이 그것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당장이라도 목걸이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블리에처럼 웃었다.

16558451223466.png“당신 목에 걸린 목걸이…….”

내가 한 발짝 다가서자, 그가 거짓말처럼 한 발 물러났다.

16558451284377.jpg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16558451223466.png“못 보던 건데, 뭐예요?”

16558451223438.png“이건 아내의 것이야.”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그가 답했다.

16558451223466.png“여기 있는 전부가 그녀의 것이잖아요.”

16558451223438.png“대공비 전하.”

16558451223466.png“?”

잔잔하던 그의 눈동자에 약한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서서히 싸늘하게 얼려지는 눈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것은 내 쪽이었다.

16558451223438.png“대공비 전하라 불러.”

나는 노에비안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었다. 이 지독하고 근사한 남자는 도대체 아드리엔을 얼마나 더 비참하게 해야 할까? 정부를 원한다고 하면서, 그 정부가 제 아내에게 ‘그녀’라 지칭하는 것은 들어넘기질 못하니. 노에비안은 두어 개 풀려 있던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게서 그 목걸이를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서 있는 나를 한참 내려다보다 한숨처럼 내뱉는다.

16558451223438.png“이건 줄 수 없어. 대신 여기에 있는 건 다 가져도 좋아.”

우리 둘 사이에 싸늘한 긴장감이 돌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드리엔의 목걸이를 그렇게 지킬까? 제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찌 되었건 블리에의 입장에서는 갖고 싶은 것 몇 개를 고르는 것보다 이 드레스룸에 있는 모든 것을 갖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16558451223438.png“내일 백작저로 사람을 보내서…….”

16558451223466.png“아니요.”

나는 노에비안의 말을 턱 가로막았다. 이미 한번 가졌던 물건들에, 나는 도저히 흥미가 없었다. 아드리엔이었을 시절에도, 나는 저런 반짝이는 물건들보다는 내 눈앞의 남자를 더 원했으니까.

16558451223438.png“……싫은가?”

그리고 블리에라면 저 남자의 아내가 쓰던 물건보다는…….

16558451223466.png“전부 새것으로 주세요.”

16558451223438.png“뭐?”

블리에라면, 그 여자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16558451223466.png“저는 새것이 좋아요, 전하.”

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노에비안을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