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새로운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가요?2021.07.24.
“또 트로비카 대공저에 다녀오신 건가요?”
황태자비 도리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불 밝힌 침실을 가로질렀다. 외출 후 돌아와, 시종의 도움으로 겉옷을 벗던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침실에 있는 그녀를 보고는 살짝 놀라더니 반갑게 웃었다.
“부인.”
“대답해주세요.”
“안 그래도 몸을 정결히 하고 황태자비 궁으로 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보는 눈도 있으니 이리 불쑥불쑥 연통도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은 조심해달라 하지 않았던가요.”
“언제까지 침실로 내외하실 생각이세요? 그리고 이게 전하 혼자만의 침실인가요?”
“법적으로는 그러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바르데날도가 곤란하다는 듯 눈을 접어 웃고는 답했다. 그는 시종이 손 씻을 물을 대령하자마자 내보내고는 따뜻한 물에 손을 담갔다. 도리스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법적으로’라는 말은 도리스가 가장 싫어하는 바르데날도의 입버릇 중 하나였다.
“요즘 대공과 사이가 아주 좋으시던데요.”
“이 나라의 대소사에 대공께서 연관되지 않은 일이 없는지라…… 상 중인 숙부에게 매번 입궁을 요청할 수 없으니 내가 가야지요. 조카 된 도리로서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숙부께 자주 들러야 하는 게 맞고요.”
숙부는 개뿔. 피가 섞이면 얼마나 섞였다고. 도리스가 입매를 비틀었다.
“근래 제 아버지와 대공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계시고요.”
“비, 카스타냐 공작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부황께서 계신 이상, 그 책사인 대공과 협력하는 게 내게도 중요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바르데날도는 입고 있던 튜닉 셔츠를 벗어 젖은 손을 닦고는 얌전히 시종에게 건넸다. 유순한 얼굴과는 달리, 잘 관리되어 다져진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안주인도 없는 저택에서 무에 그리 대단한 대접을 받으신다고 뻔질나게 드나드시는 거예요? 상 중이라 하나 전하께선 이 론타의 황태자시잖아요. 대공이 황제 폐하의 책사라 한들 훗날 전하의 책사가 된다는 보장이 있나요? 제 아버지가 서부의 지배자라 불리고 있는 것은 잘 아시지요? 서쪽의 골칫거리를 2황자 전하께서 매번 처리해주시는지라 그쪽에선 2황자 전하의 위명이 하늘을 찌르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비.”
“전하께서 자주 만나셔야 하는 책사는 대공이 아니라, 제 아버지란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라고요. 이미 황제께 충성을 맹세한, 전하의 사람인 대공은 이제 그냥 두시고, 신뢰를 얻어야 할 제 아버지를 섭섭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내 명심하겠습니다.”
졸지에 숙부와 장인의 사이에 끼여서 난처한 신세가 되어버린 바르데날도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도리스가 이번엔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2황자 전하가 탕아라는 소문이 도는 것처럼, 항간에 황태자 전하가 ‘남색가’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아요. 그것도 알고 계시나요?”
창백하게 질린 바르데날도의 얼굴이 제 부인에게로 향했다. 도리스는 입고 온 실크 나이트가운의 끈을 은근히 만지며 다가왔다. 그 모습을 멀거니 서서 바라보던 바르데날도가 당황하더니 다가오는 도리스를 휙 지나쳐 침대 쪽으로 향했다. 솟구치는 모욕감에 도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께서 그리 조급하신 이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입니까?”
“뭐라고요?”
“원한다면 증명해줄 수도 있지만…….”
도리스는 기가 막혔다. 혼인한 지 근 5년이 다 되어가는 부부. 우습게도 기억에도 없는 초야 이후로 그들의 합방은 전무하다. 뭘 어떻게 증명하겠다는 건지. 그녀는 말없이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는 바르데날도를 응시했다.
“나는 부인이 무리하게 후계를 낳다가…….”
“저는 그리 약하지 않아요.”
“내 어머니, 레티나 황후께서도 로아드네스를 낳기 전까진 건강하셨습니다.”
“그건……!”
“나를 낳기 전까지는 더 건강하셨고요.”
바르데날도는 오래전 죽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지 한참 괴로워하는 눈을 하다가, 축 늘어뜨린 어깨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자신이 반쯤 누운 침대 옆을 가리켰다.
“나는 연약한 부인이 내 곁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매번 저런 식이다.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생식 능력이 없다거나 남색가가 아니냐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입이 아닌 바로 도리스 자신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생각이다. 저리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남자의 품에 누가 안기고 싶겠는가?
‘약해 빠져가지고…… 후계를 만들어 위치를 더 공고히 해도 모자랄 판국에!’
“피곤해서 돌아가야겠어요. 아까 제가 한 이야기 명심해주세요, 전하. 제 아버지는 손해 보는 장사를 매우 싫어하시니까. 이번 전하의 탄신연에서는 누가 황태자파의 진정한 수장인지 보여주시라는 말이에요.”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도리스는 나이트가운의 끈을 오히려 꽈악 조여 매고 쏘아붙였다. 팩 토라져 나가는 도리스를 응시하던 바르데날도의 얼굴에는 난처함만이 떠올라 있었다.
*** 대공저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려한 물건들이 백작저에 도착했다. 하녀장 마지와 노집사는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원단들을 날라 오는 사람들을 보며 기가 질린 듯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계단에 서서 입구에서 들어오는 끝없는 사람들의 행렬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마담 르블레아……!”
내 곁에 서 있던 요나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수도 유행의 중심인 마담 르블레아가 직접 저택을 방문한 것이다. 그녀의 직원인 마티어스만 보아왔던 이들은 그 유명한 마담 르블레아가 직접 이 협소한 백작저를 방문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요나처럼 눈을 끔뻑였다.
“안녕하세요,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
마담 르블레아는 입구에서 가볍게 예를 갖추며 계단 위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외출할 때나 쓰는, 앞을 망사로 드리운 모자를 쓴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르블레아는 손뼉을 짝짝 치며 같이 들어온 직원들이 손님을 위한 세팅을 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분주한 르블레아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내려갔다. 얼굴을 반쯤 가린지라, 곁에는 요나가 찰싹 달라붙어 에스코트 중이었다. *** 마담 르블레아는 눈앞의 귀부인이 쓴 모자를 보고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신가.’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보낸 이를 떠올렸다.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 현 황제의 이복동생. 황태자파의 젊은 수장이며 황제의 책사라 불리는 남자. 냉소적이고 차가운 매력을 가졌으나 가십이나 소문에 의하면 아픈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사랑했던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마담 르블레아는 블리에 아카시아가 그의 정부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한 채, 그저 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복지라고 생각한 듯 싱긋 웃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얼굴은 반쯤 가렸지만, 슬쩍 보이는 코와 입매, 턱선만 보아도 꽤나 미인임을 알 수 있다. 보기 좋은 체형에 모양 좋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반듯한 자세. 우아한 걸음걸이. 영감이 오는 자태에 마담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다 물러가게.”
“예?”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식은땀을 흘려대던 마티어스가 제일 먼저 되물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입매를 비틀어 웃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계단 난간에 그녀의 손을 얹어놓은 요나가 마지와 함께 다른 사용인들을 다이닝룸 쪽으로 데려가자 이제 온전히 남은 이는 르블레아와 그녀뿐이다.
“늦었습니다, 마담.”
“예……?”
가면같이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던 르블레아의 의아한 표정에 마티어스가 사라진 쪽을 흘긋 살피던 귀부인의 입꼬리가 더 가늘어졌다.
“나는 지난 1년간 꾸준히 마담의 의상실과 거래를 하고 있는데…….”
“예,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사실 수많은 고객 중 한 명일 뿐이지만, 대공가의 집사가 직접 출장을 지시한 귀부인인 만큼 르블레아는 공손한 척 고개까지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낮은 웃음소리. 웃음소리? 르블레아가 고개를 번쩍 들자, 백작 부인이 얼굴 앞을 드리운 망사가 펄럭이도록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담의 장사수완이 꽤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직원 관리가 소홀한 것이 매우 유감이네요.”
“부인, 실례지만 저희 직원이 뭔가 실수라도……?”
공손한 대답이었지만 자신의 직원이 그럴 리 없다는 약간의 확신을 담은 목소리. 블리에 아카시아가 한쪽 손에 돌돌 말아쥐고 있던 명세서를 펼쳤다. 그리고 메인홀 한쪽에 그대로 전시해두고 있던 마담 르블레아의 드레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르블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단 밑에서 명세서를 받아들고, 그녀가 가리키는 드레스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 어머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마담의 귀중한 평판이, 푼돈에 팔려나가고 있는 일이에요.”
“진즉 제게 말씀을 해주셨다면……!”
르블레아는 상황 판단이 끝난 것인지 명세서를 잔뜩 구겨버릴 듯 꽉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인.”
마담 르블레아는 군말 없이 허리를 거의 반쯤 접었다. 굴욕적이라는 생각보다는 진심으로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형편없는 보석이 달린 드레스를 받은 고객에 대한 사죄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마담의 직원이 자신이 직접 책임지겠다고 한 지, 꽤 지났는데…….”
“전액 보상하겠습니다.”
“그보다…….”
젊은 백작 부인이 자박자박 걸어 얼어 있는 르블레아에게로 다가왔다. 걸음에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다.
“앞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싶은데요.”
“물론입니다, 부인!"
대공이 직접 신경 쓰는 가문이라면, 아카시아 백작가 역시 희미한 존재감이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가문이다. 눈앞의 블리에 아카시아가 대공이나, 훗날 새로운 대공비가 될 여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흘리는 날에는…….
‘20년간 쌓아온 내 명성에 금이 간다!’
망할 마티어스! 르블레아는 입속 여린 살을 꾹 깨물고는 메인홀의 소파로 가서 앉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따랐다. 이미 제 직원들이 올려놓은 카탈로그를 무심한 듯 뒤적이던 백작 부인의 손이 여러 책을 지나 가장 아래에 있는 카탈로그로 향한다. 그리고 부인의 취향을 고려해 가져온 카탈로그들을 멀찍이 밀어버렸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기존에 입던 ‘과할 만큼’ 요란한 차림을 모조리 눈앞에서 치우고 정숙한 귀부인의 취향에 가까운 디자인이 많은 카탈로그에서 몇 가지를 손으로 툭툭 짚었다.
“저, 부인…….”
부지런히 메모하던 르블레아가 당황스러워하며 입을 뗐다. 구색이라도 갖추려 가져온 그 카탈로그는 요즘 스타일들이 아니다. 어울린다면 죽은 대공비 정도나 될까.
“요즘 수도의 귀부인들이 선호하시는 스타일은 이쪽에…….”
살며시 끌어오는 카탈로그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귀부인이 피식 웃는다.
“내게 잘 어울리는 건, 내가 가장 잘 아는데요.”
르블레아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언젠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영애 하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앉은 자세 하며 부채를 쥔 모양새 하며……. 영감이 떠오른 듯한 르블레아가 즉석에서 메모하던 종이 위에 이리저리 드레스를 그렸다. 가슴을 반 이상 드러내는 요즘 스타일이 아니라, 적당히 골이 보일 만큼만 파고 어깨를 드러내되 팔을 감싼 모양은 너풀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라인. 앞뒤로 사정없이 부풀린 치마가 아닌, 적당히 부풀린 치마. 죽은 대공비, 아드리엔이 즐겨 찾던 스타일을 블리에의 본래 스타일에 맞게 변형한 형태였다.
“이런 스타일은 어떠세요?”
“음…….”
“돌아가신 트로비카 대공비 전하께서 선호하셨던 스타일이랍니다.”
르블레아가 방금 그린 그림을 제 자식처럼 쓰다듬더니 말을 잇는다.
“원래도 자세가 곧고 우아한 멋이 있는 분이라, 뮤즈로 삼으려 했는데 병세가 깊어지신 이유로 새 옷을 맞출 일이 거의 없으셔서 아쉬웠던 차였지요.”
“그런가요?”
우아한 귀부인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보이는 르블레아의 얼굴을 한참 응시하다가, 얼굴을 감추었던 망사를 슬그머니 걷어 올렸다. 한동안 자신만의 감정에 휩싸여 눈물까지 핑 돌던 르블레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곧이어 굳은 표정으로 귀부인과 마주하던 마담 르블레아의 얼굴이 쩌저적 갈라졌다.
“음, 뭐라 해야 할까요. 분위기는 묘하게 다르지만, 제 눈이 틀리지 않다면 부인께서 트, 트로비카 대공비 전하의 외양과 아주, 아주…….”
“닮았나요?”
여유로운 미소. 묘하게 관능적인 여인의 느낌은 르블레아가 기억하는 트로비카 대공비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지만 얼굴선, 이목구비, 눈동자는 물론이고 그 안에 담긴 눈빛까지…….
‘닮은 정도가 아니잖아!’
“예, 예…… 네, 네!”
기도하듯 꼭 붙잡은 두 손이, 의자 끝까지 바짝 다가와 앉은 귀부인에 의해 따뜻하게 감싸였다.
“새로운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가요?”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관능적인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살살 녹이기에 충분했다.
“예, 예!”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마담 르블레아의 작품 활동에, 완벽하고 건강한 뮤즈가 부활하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