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2021.07.28.
2황자 로아드네스의 궁. 집무실이 있는 1층은 아침부터 부관들이 들락거리느라 분주했다. 로아드네스는 왔다 갔다 하는 부관들의 움직임에도 미동 없이 눈앞에 쌓인 서류를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새벽부터 내내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의 책상 위에는 신문이나 가십지 따위를 스크랩해 둔 책자들과 엘라콘어 교재들, 그리고 한 사람을 뒷조사한 파일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찌나 자주 읽었는지 스크랩북은 끝이 거의 닳아 있었다. 하아-. 빈센토가 마지막 서류까지 올려놓자 삐딱하게 앉아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로아드네스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창문 세 개를 모두 열어도 가시지 않는 술 냄새에, 빈센토는 잔소리를 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아드네스는 방금 올려진 종이를 느릿하게 집어 올려 읽었다. 「이름: 블리에 아카시아 국적: 불명. 나이: 22세(추정) 기혼. 보호자 : 프랭클린 아카시아 백작(72세)」
“서류가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이번 정보상도 예전에 받아보신 것과 완전히 똑같은 내용으로 응답이 왔습니다.”
“…….”
“닐이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말입니다.”
로아드네스의 눈이 서류 위로 슬금 올라왔다. 빈센토가 조심스럽게 마저 입을 열었다.
“승전 기념식에서, 그 부인이 자신이 트로비카 대공의 정부라는 말을 했다던데요.”
“……그 새끼 잘라. 입이 너무 가볍군.”
“전하, 그게 사실이라면 엮이지 않는 게 어떠십니까?”
“내가 엮이려는 것 같나?”
빈센토가 대답 없이 여전히 서류를 훑는 주군을 살폈다. 로아드네스는 요즘 시가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트로비카 대공비와 블리에 아카시아에 대한 정보를 훑는 것 외에는 모든 일에 관심을 껐다 해도 무방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전하.”
“…….”
“트로비카 대공이 우리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황태자 전하의 최측근이고 딱히 척을 질만 한 상대도 아닙니다. 오히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시는 전하와는 아군이라 볼 수 있지요. 아내가 죽기 전에 정부를 둔 것인지 죽고 나서 외로워져 정부가 생긴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대공의 사생활이 아닙니까. 설사 그가 부정을 저질렀다 해도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기혼의 부인이라 귀족 사회에서 크게 책잡힐 만한 일도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된다…….”
로아드네스는 빈센토의 간언을 되뇌며 의자에 몸을 온전히 기대었다. 잘빠진 턱과 오만한 코가 천장을 향했다. 고급스러운 조명에 조각된 아기천사들이 약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천장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로아드네스는 일견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
이해가 안 되는 건 로아드네스 스스로가 가장 심했다. 아드리엔의 죽음부터, 똑같이 생긴 블리에의 등장. 그리고 그 블리에가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라는 사실까지 모조리 악몽을 꾸는 듯 끔찍했다. 꿈에서 깨어나려 아무리 술을 마시고 피를 보고, 지쳐 쓰러져 잠에 들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새로운 악몽이 시작됐다.
‘아드리엔 피레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자신의 껍데기만 이 세상에 남은 것 같은 절망적인 기분이 일었다. 시신을 확인하면 괜찮을까.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밀회를 목격하고, 놈을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면서도 그리되면 영원히 아드리엔의 시신조차 확인할 수 없을 것이란 공포에 휩싸였다. 온갖 계책으로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는 놈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신을 숨겼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저택에 시신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는가. 시신 확인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블리에 아카시아를 일종의 계약관계로 묶고, 제 인생에 도움 안 될 일이나 하고 다니는 행동 역시 스스로 이해 가지 않았지만 로아드네스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자신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볼 때마다, 특히 아드리엔과 완전히 똑같은 그 눈을 볼 때마다 심장이 바닥을 구르는 듯한 기분이 일었다.
“……정말 미쳤는지도 모르지.”
네놈들이 매번 내게 미친개라느니 뭐니 지껄이더니 정말 주신께서 내게 그런 벌을 내리셨는지도 몰라.
“내가 왜 이러지.”
그런데 계속 돕고 싶고. 우는 꼴을 보면 화가 치솟고 아드리엔과 비슷한 행동을 할 때마다 우리의 좋았던 시절이 생각나 돌아버릴 것만 같아. 단순히 아드리엔과 너무나도 닮아서? 노에비안 트로비카처럼 정말 지독히도 한결같은 취향이라?
“어쩌면 죽었다는 걸 너무 믿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 여자가…….”
사실 본인이 아드리엔이라고 말해주길 미친놈처럼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드리엔, 그 애는 날 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나는 그 애를 버릴 수가 없어. 버려지지가 않아. 혼잣말이 끝나자 로아드네스가 실소했다.
“개 잡놈의 새끼가 노에비안 트로비카 한 놈은 아니로군.”
“예……?”
“대공비가 이 여자의 존재를 알고 죽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
알고 죽었다면 이 여자 역시 단죄의 대상이다. 로아드네스는 삐딱하게 늘어져 천장을 보던 자세를 똑바로 하고, 서류를 구겼다.
“……빈센토.”
“예, 전하.”
“대공비의 장례 기간이 끝나고, 시신을 확인하고도 내가 계속 이런다면…….”
금세 평소의 서늘한 눈이 된 로아드네스가 제 앞에 서 있는 빈센토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땐 네가 내 목을 쳐라.”
“전하!”
아무런 삶의 미련도 없다는 듯 떨어지는 명령에 빈센토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빈센토가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집무실 문으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전하.”
빼꼼 얼굴을 내민 닐이 로아드네스를 찾았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과의 수업 시간입니다.”
*** 오늘은 평소처럼 프라이빗한 식당이 아닌, 마담 르블레아의 의상실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마담 르블레아는 쉽사리 얼굴을 볼 수 없는 소문의 2황자와 동행한다는 내 말에 아예 가게 전체를 통으로 빌려주고, 그도 모자라 보안을 위해 로아드네스가 앉아 있는 자리의 3면을 파티션으로 둘러놓았다. 나는 오늘 성실히 로아드네스의 과제를 수행했고, 스스로 나름의 작문까지 해서 그에게 제출했다. 로아드네스와의 수업은 유익했지만, 사실 수업 이외에 다른 말은 거의 하지 않아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그가 채점하는 동안 어색한 공기가 돌지 않도록, 그리고 마담 르블레아에게 내 영향력을 좀 블러핑할 목적으로 부러 로아드네스를 이 의상실에 데려온 것이었다. ***
“브라보! 브라보!!”
“최고예요, 부인!”
“맙소사.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시던 레티나 황후 폐하가 살아 돌아오신 줄 알았어요! ”
조금은 요란스러운 분위기. 로아드네스는 별안간 터지는 환호성에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어 단상 위에 올라 핑그르르 도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응시했다.
“그렇게까지인가요?”
“어머, 그럼요 부인!”
조금 어색한 듯 아닌 듯 오묘한 표정을 짓던 귀부인이 곧이어 하녀 하나가 내미는 부채를 손에 쥐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뒤돌아 거울을 보았다.
“여기, 황자 전하께서도 놀라 벌떡 일어나셨을 정도잖아요!”
“아.”
로아드네스는 그제야 자신이 벌떡 일어나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는 블리에가 옷을 입고 부채를 쥐자마자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 일었다.
“오늘 가봉하고 한 번 더 가봉할 거예요, 부인.”
“이것으로 부족한가?”
“드레스의 완성은 정성 어린 가봉이랍니다.”
마담 르블레아는 전에 없이 열정적으로 드레스의 드레이핑을 수정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백작 부인의 모습에서 로아드네스는 눈을 떼지 못했다. 곧은 자세. 부채를 쥐고 턱을 괴는 습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벗지 못하는 평민의 태가 있다는 소문과는 달리, 블리에는 이곳의 누구보다 귀족적인 품위를 가지고 있었다. 꼭 단어를 외우는 것처럼 ‘새것을 좋아한다.’라는 입버릇과는 달리 수도 최고의 의상실에 와서도 사치를 부리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이왕 온 김에 한꺼번에 피팅하려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전하?”
“…….”
로아드네스는 블리에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채점하던 종이를 슬쩍 들어 보였다. 블리에가 잠깐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커튼 뒤로 들어갔다. 한편 이 가게의 주인인 마담 르블레아는 줄곧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슬쩍 다가가 황자 로아드네스의 입도 안 댄 차를 따뜻한 것으로 손수 바꾸어주었다. 이런 가게가 처음인 듯 입장하자마자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황자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얼굴이 바뀌는 걸 떠올리자 다시 예술혼이 샘솟았다.
‘가장 반짝이는 정복을 입혀 마네킹처럼 세워두고 싶네.’
‘전장의 악마’라는 소문과는 달리, 그의 외양은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녀의 예술혼이 샘솟는 것은 당연했다. 조명이 밝은 것도 아닌데 홀로 황금을 가루 내 뿌린 것 같이 반짝이는 저 황자를 보라지. 대충 쓸어넘긴 백금발 아래로 보이는 루비같이 쨍한 붉은 눈은 정말 그 자체로 보석이었다. 거만한 콧날과 황홀한 입술 선까지 훑어내리던 마담 르블레아는 마구마구 떠오르는 디자인을 스케치하면서 생각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과 더 친하게 지내야겠어.’
백작 부인의 의상 소화력은 최고였다. 본인에게 무엇이 잘 어울리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던 말답게, 그리고 죽은 대공비와 놀랄 만큼 닮은 얼굴답게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고전적인 디자인을 잘만 소화했다. 너무 답답한 느낌을 피하고자 목이나 어깨는 드러내고 주위를 시폰과 보석으로 장식하자 그녀가 말하던 ‘우아하고 화려한’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이건 분명 히트야, 히트!’
백작 부인은 영감을 주는 뮤즈일 뿐만 아니라, 거물급 인사들과 인맥도 상당하다. 세기의 로맨티스트로 칭찬받는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요청뿐만 아니라 이제는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는 2황자 로아드네스까지 달고 나타나지 않았나. 귀족들은 제 짝이 있더라도 정부를 두기도 하고, 가볍게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대공은 몰라도 로아드네스 황자라면 소문난 탕아라지 않던가. 매력적인 귀부인의 유혹에 굴복해 잠시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고.
‘악당이든 영웅이든 미인에겐 약한 법이니까.’
안타깝게도 마담 르블레아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로아드네스의 가벼운 데이트 상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아까부터 묘하게 드는 위화감을 애써 외면하며 블리에의 엘라콘어 과제를 마저 채점했다. 블리에 아카시아에 대한 소문이란 소문은 다 수집하고 다녔는데, 어찌 맞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천박하다던 평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삭제시켜 버린 정보였으며 무식하며 괄괄하다는 평 역시 수업을 진행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 처음 해온 작문 과제를 보면, 여러 번 망설이고 수정한 부분이 많았다. 이미 완전하고 괜찮은 문장을 쓰고 난 후 그것을 외국어로 어찌 바꾸어야 할지 고민한 흔적이었다. 교육받지 않은 평민이라면 절대 구현해낼 생각도 못 했을 문장을 시도한 게 돋보였다.
“!”
그리 생각하던 로아드네스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물속에 가라앉은 듯 귀가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와아 부인, 황궁에 가실 일이 있다면 꼭 이걸로 선택하셔야겠어요!”
“맙소사, 정말 아름답군요.”
커튼 밖으로 다시 블리에 아카시아가 나왔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잠시 얼굴을 붉히던 귀부인의 시선이 슬며시 로아드네스로 향했다.
“무슨 일 있나요, 전하?”
“아닙니다. 잘 어울리는군요.”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를 보고 걱정하던 귀부인에게 로아드네스가 가까스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잠시 멀뚱멀뚱 큰 눈을 깜빡이던 백작 부인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붉은 시선을 느끼고 살짝 얼굴을 붉힌다.
“……꼭, 트로비카 대공비 같습니다.”
대공비 같다는 말에 백작 부인의 하녀들은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의상실의 직원들은 빙긋 웃어 보인다. 잠깐 백작 부인의 연녹빛 눈이 흔들리더니 다시 커튼 뒤로 쏙 들어간다. 로아드네스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보듯 떨리는 손이었다. 짧은 일기를 써보는 간단한 문장 몇 개. 하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블리에 아카시아의 별것 아닌 일상을 적은 내용이 아니었다.
‘아드리엔의 필체다.’
그것은 수년간 자신과 아드리엔이 주고받았던 쪽지와 서신 속, 아드리엔의 단정하고 우아한 필체였다. 부정할 수 없는, 그라면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없는. 지난 수년간 그리워서 읽고 또 읽었던, 품에 끌어안고 자기까지 했던 서신에 빼곡했던 필체. 틀림없는,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의 필체. 로아드네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진정 미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