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남편이 전남편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2021.07.31.
나는 유달리 숙제가 많은 오늘을 곱씹으며 손을 놀렸다.
‘……꼭, 트로비카 대공비 같습니다.’
아니, 사실 계속 곱씹고 있는 것은 로아드네스의 목소리였다. 블리에의 몸을 차지하고 난 뒤, 이 몸과 내가 아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오로지 로아드네스와 나, 그리고 노에비안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로아드네스가 처음이었다. 물론 노에비안이야 블리에를 아카시아 백작과 결혼시키기 이전부터 줄곧 그렇게 속삭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뿌각-.
“앗, 새것으로 가져다드릴게요. 마님!”
엘라콘어 사전과 로아드네스가 내어준 숙제로 엉망인 책상 위를 정리하던 요나가 내 손에서 부러진 깃펜을 보고 새것을 찾아 밖으로 나섰다. 잉크가 이리저리 튀었다. 손이며 쓰고 있던 종이까지 엉망이다. 블리에의 건강한 육체와 힘을 나는 가끔 조절하지 못했다.
“하.”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사교계에 가끔 얼굴을 비추고, 어쨌든 지나가지 않은 데뷔탕트 시즌을 아드리엔과 아주 흡사한 모습으로 노에비안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를 절망하게 만들려면 그의 비위를 맞추어놓고 훗날 배신하는 방법도 있지만, 동시에 사교계에 내가 그의 후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심고, 그를 차버려 명예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블리에보다 노에비안에게 치중되어 있으니 타격이 클 것이고. 어찌 되었건 후에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사교계에서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것들뿐이었다. 똑똑-. 손수건으로 대충 이리저리 튄 잉크를 닦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부인-.”
“백작님?”
아카시아 백작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스트레스가 극심한지 한층 쇠약해진 몸으로 비척비척 내 책상 앞으로 와서 섰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눈으로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훑던 백작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연다.
“저는 오늘부터 영지로 가려 합니다.”
“또요?”
“예, 그리고…….”
영지가 멀고, 사건, 사고가 잦아서 백작이 이 저택에서 머무는 기간은 1년에 한 달 정도라 했다. 그러니 별스럽지도 않은 일정 보고다. 그런데 백작이 한참 내 눈치를 살핀다.
“오늘 대공께서 저택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왜죠?”
“제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럼 백작님은 식사 후에 영지로 출발하시는 건가요?”
내가 잠시 이해가 안 가 물어보자 백작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지금 출발합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 충성스러운 노에비안의 가신은 그를 초대해놓고 자신은 쏙 빠지려 한다.
“대공 전하의 요청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요?”
“제가 다 죽어가는 노인네이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억지로 웃는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동시에 가엾기도 했고. 70이 넘은 노인이 젊은 주군의 연애 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여기로 오겠다고?’
“대공비 전하의 장례도 끝나지 않았는데, 대공께서 이곳까지 오시는 게 쉽겠어요? 제가 가도록 하죠.”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아찔한 미래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암암리에 내가 정부라고 소문이 난 것은 차치하고, 이 가엾은 아카시아 백작은 무슨 죄라고. 노에비안이 백작저에 직접 온다면 우습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아카시아 백작 하나다.
“그건 안 됩니다, 부인.”
“왜요?”
아카시아 백작이 사색이 되고선 호박색 눈 가득히 걱정의 빛을 내비친다.
“지금 수도에서, 의문의 부녀자 실종 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공께서도 부인이 저택 밖을 나서는 것에 걱정이 많으시고요, 웬만하면 범인이 잡힐 때까지 외출을 자제하세요.”
“실종이요?”
“예, 그래서 저 역시 영지로 가는 기사들의 수를 반으로 줄였습니다. 혹시라도 외출하신다면 꼭 둘 이상의 기사와 함께…….”
“알겠어요.”
이런 부인도 부인이라고 걱정이 가득한 백작에게 나는 얼른 대답했다. 진실을 몰랐다면 정말 괘씸한 가신이겠지만, 그야말로 이 치정극에서 가장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그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
“걱정 마세요. 기사 20명씩 데리고 다닐 테니.”
“그럼 안심하고 떠나겠습니다, 부인.”
그리고 그가 책상 위에 열쇠 꾸러미들을 놓았다.
“본래 백작가의 안주인이 저택 내부의 열쇠를 관리합니다.”
“이건…….”
“이전까지는 드리지 못했지만, 요즘 들어 노집사도 그렇고 부인을 신뢰하는 사용인들이 늘었더군요.”
“아…….”
“언젠가는 떠나시는 것을 압니다만. 보시다시피, 제가 늙고 기력이 쇠하여 집안일까지 모두 돌보기는 힘이 듭니다.”
“그럼 제가…….”
“예, 성가신 일들은 노집사에게 맡겼으나 이 열쇠만큼은 안주인인 부인께서 맡아주십시오.”
속도 없는 노인네 같으니라고. 나는 약간의 신뢰가 담긴 백작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 열쇠 꾸러미를 챙겼다. 사용인들이 점점 나를 잘 따르기 시작하는 것은 그저 이전의 블리에가 개차반이었기 때문이었지만.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나는 입속 여린 살을 꼭 깨물고 답했다.
“걱정 마세요.”
*** 아카시아 백작이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노에비안의 부관 짐스커가 도착했다. 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어 올린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왜 그러죠?”
“아, 아닙니다. 부인.”
그토록 신뢰하는 부관인 짐스커 경에게도 블리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건가. 나는 그가 그토록 놀라는 이유를 짐작했지만 모른 척했다. 짐스커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까지 닦았다.
“다리가 좀 아픈데, 손님맞이 좀 대신해줄 수 있나요?”
“예?”
나는 그의 대답을 채 듣기 전에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노에비안이 무엇이라고 내가 그를 입구에서부터 맞이한단 말인가. ***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 뒤는 요나만 따랐고 나머지 사용인들은 모조리 백작저의 거대한 현관 앞에 시립하고 서 있었다.
“병아리콩 수프는?”
“예, 주방장이 거의 다 만들어간답니다.”
“스테이크는 꼭 레어로.”
“빠짐없이 전달했습니다!”
노에비안은 병아리콩을 아주 싫어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꼭 다 익혀서 먹었고. 요나는 나와 대공과의 저녁 식사를 볼 생각으로 들떠 있는 듯했다. 이미 정부라고 이 저택에서 소문이 났고, 정부와의 관계야말로 ‘진실한 사랑’이라고 떠드는 작자들은 수도에 넘쳐났으니 아마 이 아이 역시 늙은 아카시아 백작보다는 젊은 대공과의 연애에 흥미가 돋겠지. 현관 쪽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노에비안이 도착했나 보다. 이 손바닥만 한 저택에 기사를 얼마나 들여오는지는 몰라도,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백작 부인.”
“오셨어요, 전하.”
나는 그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동안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마중 나와 있지 않아 심기가 불편해 보이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뒤따라 들어와 그 꼴을 보고 있던 마지가 손으로 입을 턱 막으며 쉴 새 없이 사용인들끼리 수군댔다. 정말 미남이시다. 저택에 들어서시는 순간 압도되는 기분이 든다. 마님과 정말 잘 어울리신다. 콧대가 어쩜 저리 우뚝 솟고 턱이 어찌 저리 깎아놓은 듯 근사하실까.
“……그만.”
사용인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거슬리자 나는 견딜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다이닝룸이 조용해졌다. 나는 보란 듯이 그에게 다가가 외투 벗기를 권했다.
“그만, 편히 자리에 앉으세요.”
“이런 건 시종에게 시키지.”
“제가 해드리고 싶어요.”
이건 진심이었다. 그토록 아팠던 때, 나는 노에비안의 외투를 받아드는 하녀에게도 부러운 감정을 느꼈으니까. 감정은 그때 같지 않아도 이 정도 일은 식은 수프 먹기 정도로 할 수 있는 이 육체를 느끼자 불안정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노에비안은 싫지 않은 듯 얌전히 내 시중을 받았다. 마지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마지.”
“예, 예! 아카시아 백작 부인 마님!”
“전하의 외투에 먼지 하나 없도록 잘 신경 쓰도록 해.”
“예! 예!”
흥분해서 자신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도 모르는 마지가 냉큼 외투를 받아들고 하녀 몇과 다이닝룸을 달려 나갔다.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반 이상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려 했다.
“앉으세요, 전하.”
“그러지.”
“방문 소식을 늦게 전달받는 바람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급히 준비하라 일렀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것이나 잘 먹으니 그런 걱정은 말아.”
그는 새롭다는 듯 내 얼굴을 응시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이건……?”
그리고 내가 자리에 돌아가는 동안 그리 말하던 노에비안에게서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하녀가 날라 오는 샛노란 병아리콩 수프를 보는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피부미용에 좋다길래 자주 먹는 수프예요.”
“……그런가.”
쳐다도 보기 싫은 듯 올라오는 냄새에 미간만 찌푸리던 노에비안이 노집사가 따라주는 포도주로 목을 축인다.
“시장하시죠?”
“조금.”
곧이어 스테이크가 나왔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슬금 풀린다. 나는 여상하게 병아리콩 수프를 떠먹으며 그를 주시했다. 병아리콩 수프를 뒤적이던 노에비안이 스테이크를 잘라 한입에 넣는다. 그리고.
“윽.”
“왜 그러세요, 전하?”
“…….”
씹지도 넘기지도 뱉지도 못하는 상태의 입 모양. 노에비안은 차마 고기가 익지 않아 먹기 싫다는 말은 할 수 없는지 가만히 물고만 있었다.
“입에 안 맞으세요?”
“아니, 아주 좋아.”
그리고 큰 결심을 한 듯 그것을 꿀꺽 삼킨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미간에 경멸과 혐오의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사그라들었다. 그는 익히지 않은 것을 아주 싫어하니까. 반면 나는 식사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병아리콩 수프는 굵은 소금과 후추, 그리고 꿀을 넣어 적당히 달달 짭조름했고 살짝 덜 익은 소고기 스테이크는 육즙이 풍부해 맛이 아주 끝내 줬다.
“저는 가끔, 이렇게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썰어서, 입에 넣고 씹어 넘길 수 있는 것을 감사할 때가 있어요.”
“…….”
당신은 모르겠지. 멀쩡하고 힘 있는 몸을 가지고도 고작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먹지 않는 당신은. 나는 그가 보란 듯이 쓱쓱 고기를 썰어 입에 가득 넣고 꼭꼭 씹었다. 노에비안은 내가 기껏 신경 써서 준비했다는 식사를 망치고 싶지는 않은 듯 묵묵히 취향에 맞지도 않는 것들을 입에 밀어 넣고 있다.
“짐스커 경.”
“예, 전하.”
“백작 부인과 조용하게 할 말이 있는데.”
“아, 예! 알겠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짐스커가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눈치를 준다. 식사를 반 이상 남긴 노에비안이 노집사가 가져다 놓은 물로 입을 헹궜다. 식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식사를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먹고 나서야, 나는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그를 마주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억지로 빙긋 웃었다. 노에비안은 깍지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툭툭 두드렸다. 조금은 초조해 보였다.
“예전에 대공비가 되고 싶다 했었지.”
“!”
“하지만 그건 곤란해.”
“…….”
“대신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대공저에서 살 수 있게 해주지.”
워낙에 넓은 곳이니 그대 하나가 들어와 산다 하더라도 별관에 머문다면 본관 사용인들은 알지도 못할 테고. 노에비안이 그 답지 않게 주절주절 말을 하는데, 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대공저로 왔으면 좋겠다 하는 말을 언젠가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이 블리에가 대공비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