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미래를 약속한 사이 (32/171)

32. 미래를 약속한 사이2021.08.21.

정적. 지독히도 무겁고 오랜 정적이었다. 로아드네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얼굴로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에 대한 건으로 황제와 약간의 말다툼을 했던 불쾌한 기억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머릿속이 점등과 소등을 반복하다가 술기운과 함께 생각 전체를 날려버린 것만 같았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여자 역시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보고 있었다. 언젠가 그런 상상을 했다. 아드리엔의 앞에서, 어린 시절 그녀의 바람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만큼이나 강한 남자가 되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날을. 어린 날의 미성이 아니라, 낮은 울림이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로 아드리엔을 부르고. 네가 꿈꾼다는 그런 사내가 되었으니 내 반려가 되어달라고 말하는 상상 말이다. 낯간지러운 말들을 혼자 몇 번이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16558453358742.png‘이제는 아무 소용 없지만.’

아드리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도 했다. 아드리엔이 없는 세상은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드리엔이 살아 있다면 저 여자가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블리에 아카시아. 아드리엔의 묘지에서 발견한 그의 기적. 그리고 그의 절망.  

16558453358747.png‘저는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예요.’

  가슴에 쿡 박혀 있던 그 말이 피를 토하며 솟아 나오자 몽롱하던 정신이 급격히 맑아졌다. 저 여자가 아무리 아드리엔과 같은 얼굴과 행동을 하고 그 필체까지 같다고 해도…….

16558453358742.png‘아드리엔은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 화려한 차림새. 눈 밑의 눈물점까지. 아드리엔은 죽었다. 모두가 제게 그리 말했다. 몸의 병으로 고통스럽게 살던 아드리엔의 마지막 모습은 잠든 듯 평안해 보이고 아름다웠다고. 자신만 확인하지 못한 그 시신을 누군가는 봤다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16558453358742.png“젠…… 장…….”

술에 취해서, 이상한 분위기에 취해서 하면 안 될 말을 해버렸다. 아드리엔을 따라 하며 그녀의 대용품으로 살고 있는 여자에게 큰 빌미를 제공한 꼴이지 않은가. 로아드네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등을 기대고 있던 나무를 짚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여자 역시 석상처럼 앉아 있다가 휘청이는 그를 허락도 없이 잡아 주었다. 로아드네스는 순간 극렬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 손을 휙 쳐냈다. 감히. 노에비안의 정부인 주제에.

16558453358742.png“아드리엔은 당신의 친구가 아닙니다.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 사이를 덥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려졌다.

16558453358742.png“내가 그녀였다면 당신에게 절대로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로아드네스의 눈이 다시 불을 품었다. 순간 정신이 나갈 만큼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시 중심을 찾았다.

16558453358742.png“실언을 했습니다. 나도. 당신도.”

로아드네스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실종사건을 맡고 싶지 않다는 말을 아비에게 전하자마자 맹렬한 비난이 날아왔다. 근 2년간 그토록 보기 싫었던 노에비안과 아드리엔이 함께 있는 모습까지 블리에 아카시아를 통해 두 눈으로 보고야 말았다. 애써 눌러두었던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이라 그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놓고 싶었다. 하지만 발이 저절로 아드리엔과의 추억을 찾아 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숨죽여 울었다. 별궁에서 기르고 있던 코완을 데려와 주절주절 말을 걸었다.  

16558453358742.png‘이제는…… 대공과 함께 있는 아드리엔이라도, 보고 싶다.’

16558453358742.png‘그 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절망보다, 그 애가 어디든 이 세상이 있는 채로 절망하는 게 나아.’

  그게 트로비카 대공저라고 해도. 뻥 뚫린 가슴이 메워지지 않아 술을 입에 쏟아 넣고 말을 밖으로 쏟아냈다. 그의 곁을 지키던 개는 다른 사람의 기척이 들리자 헥헥대며 풀숲으로 숨어버리더니 이내 이 여자가 등장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튀어나와 애교를 부려댔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언을 한 것이다. 자꾸 이 여자가 아드리엔과 같은 얼굴을 하고, 아드리엔과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니까. 아드리엔이 그랬던 것처럼 코완을 쓰다듬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니까. 그의 사과에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드리엔이 맞다면 어쩔 거냐 폭탄 같은 말을 던져놓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다. 로아드네스는 괜히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16558453358742.png“사람들은 가끔 내게 미쳤다 하기도 합니다. 그 광증이 오늘은 심해진 모양입니다. 말도 안 되는 광증에 장단을 맞춰줘서 고맙습니다.”

16558453391301.jpg

  ***

16558453358747.png“……광증, 이요.”

16558453358742.png“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아드네스는 지독히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아직도 한참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옷 밖으로도 선명히 보이는 단단한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한참 충격과 혼란으로 가득한 표정이던 그는 이제 내가 아닌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역시, 내가 아드리엔이라는 말 같은 걸 누군가 믿어줄 리가 없지. 반대의 상황이라면 나라도 상대방을 경멸하며 상종도 안 했을 테니까. 특히 자신의 첫사랑을 사칭하는 것 같다면 괘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나는 손을 대고 있던 개를 놓아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로아드네스가 어둑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16558453358747.png“……무슨 사이였나요?”

겨우 몸을 일으켜 일어났지만 큰 키의 그를 올려다보려면 이 정도 거리에서도 까마득히 올려봐야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어차피 그가 믿어주지 않을 거라면 계속 궁금해하던 의문이라도 풀고 싶어 용기를 냈다.

16558453358747.png“아드리엔, 아니…… 대공비 전하와 무슨 사이세요?”

주제넘게 뭘 알려 하냐고 모욕을 줘도 받아들일 준비는 단단히 되었다. 개가 내 발밑에서 낑낑대며 치맛자락에 얼굴을 부비적거렸지만 나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아드네스는 그늘 아래에서 한참이나 날 내려다보았다.

16558453358742.png“……미래를 약속한 사이.”

그리고 불현듯 대답했다.

16558453358742.png“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었습니다.”

16558453358747.png“!”

16558453358742.png“아니,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대답해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정말로 트로비카 대공비와 2황자는 서로의 첫사랑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당연한 듯이. 아무리 곱씹어도, 나는 노에비안 외에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이 없는데.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진심으로 분노하던 그 눈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도 이상하게 욕심이 난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라면, 바보같이 남편의 외도도 모르고 죽어버린 허약한 아드리엔보다는 그가 말하는 ‘사려 깊고, 현명하며, 용기 있는’ 아드리엔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어쩌면 날 그렇게 기억해주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 주고,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 이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격렬히 아드리엔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겨났다.

16558453358747.png“대공비 전하의 시신을 꼭 확인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나는 환생 후 처음, 블리에처럼이 아닌 본연의 나처럼 웃었다.

16558453358747.png‘노에비안이 아니라 이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턱도 없는 바람이 가슴을 채우고, 심장을 눈물로 적신다. 블리에와 이 남자와의 사이를 의심하며 질투를 감추지 못하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깨져서 내 심장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드리엔을 그리워하며 우는 이 남자의 얼굴을 보자 위로가 됐다.

16558453358747.png‘좀 더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자.’

시신을 확인시켜주고,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해서 점점 망가져 가는 이 사람에게서 아드리엔의 존재를 끊어주자. 내가 내 시신을 확인하고 마음을 다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 역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면 저렇게 술에 취해서도 경멸해 마지않는 블리에 같은 사람과 손을 잡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시신을 확인하면, 아드리엔도 블리에도 그렇게 이 사람 인생에서 사라져주면 된다.

16558453358747.png“제게 계획이 있는데요.”

16558453358742.png“…….”

내가 웃는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로아드네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려 할수록 서늘하고 오만한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듯했다. 나는 마음은 눈물로 차오를지언정 머리를 차게 식혔다.

16558453358747.png“트로비카 대공이 생각보다 질투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16558453358742.png“…….”

16558453358747.png“제가 전하와 묘한 관계인 것처럼 행동해도 될까요?”

16558453358742.png“묘한 관계.”

16558453358747.png“연인이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샅샅이 훑어내렸다. 나는 파티장에 오기 전부터 생각했던 계획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16558453358747.png“전하와 제가 함께 있는 걸 못 견뎌 하는 걸 보니, 조금만 더 그를 자극할 수 있다면 대공저로 더 빨리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어요. 대공저에 들어가서 잠시라도 살 수 있다면, 시신을 찾는 게 더 빠를 거예요.”

16558453358742.png“그 연극을 도와주는 대가는?”

16558453358747.png“시신을 확인하실 수 있겠죠.”

16558453358742.png“아니, 시신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은 최초의 요청이었지. 내가 불필요한 연극까지 하며 부인의 장단에 맞춘다면 나는 뭘 얻을 수 있습니까?”

16558453358747.png“제가 전하께, 대공비 전하의 대신이 되어드릴게요.”

16558453358742.png“!”

아드리엔은 죽었다. 이제 블리에로서 살아가야 하는 나는 이런 방법밖엔 없다. 블리에가 힘을 키우기 위해선 믿을 수 있는 세력가는 필수다. 아직 노에비안의 권력 아래에 있는 나는 이 남자가 필요하다. 동시에 도움을 받은 만큼 나 역시 도움을 줘야 하고. 가진 것 없는 평민 출신의 블리에는 돈으로도 명예로도 그에게 보답할 수 없다.

16558453358747.png“이제 대공비 전하에게서 벗어나고 싶으시지 않나요? 저를 대신이라 생각하시고 잊기 위해서든 미련을 버리시기 위해서든 시신을 확인하실 때까지 전하도 저를 이용하세요.”

16558453358742.png“…….”

16558453358747.png“서로 돕고, 이용하고…… 그러기로 했잖아요. 그러시다 보면 언젠가는 괴롭지 않으실 수 있을 거예요.”

  *** 로아드네스의 굳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 여자의 의도가 뭘까. 이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도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혼자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된다. 연인 관계로 엮여 자연스럽게 관찰하고 감시할 수 있으니까. 제 발로 늑대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맛을 보라는 말에 로아드네스가 서늘한 웃음을 삼켰다.

16558453358742.png‘아드리엔에게서 벗어나고 싶지 않냐고?’

아드리엔의 죽음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녀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자신은 그녀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걸 모르는 여자의 제안은 그에게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16558453358742.png‘만에 하나 아드리엔이 제명에 죽지 못한 것이라면? 이 여자의 요구에 응해 시신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확인할 수 있다면? 감히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노에비안의 정부가 만약 아드리엔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면?’

차갑게 얼어 있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완전한 탕아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처음 아드리엔의 묘지에 갔을 때처럼 어딘가 은은하게 맛이 간, 그러나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사람을 홀리는 얼굴로 눈을 휘었다. 로아드네스는 벗어 던져뒀던 흰 장갑에 느릿하게 손을 끼우고 언제 뿌리쳤었냐는 듯 여자의 손을 쥐고 입술을 가져갔다.

1655845347999.jpg

  아드리엔을 핑계로 자신을 유혹하려는 이 여자를 오히려 자신이 유혹한다.

16558453358742.png‘그래서 아드리엔을 둘러싼 모든 진실을 이 여자를 통해 밝혀낼 수만 있다면…….’

이 가녀리고 더러운 손 위에 기꺼이 입술을 묻으리라.

16558453358742.png“부인의 뜻대로.”

설령 아드리엔의 죽음에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은 만족하리라. 그리되면 아드리엔이 없는 이 세상을 등지는 데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을 테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