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문제적 바가지들의 만남2021.08.25.
로아드네스와 연인 행세를 하기로 했다. 노에비안에게 복수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블리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병든 몸으로 누운 채 누가 가져다 떠먹여주는 음식도 삼키지 못하던 지난날과도 이별해야 할 때이고. 누군가에게 뭐라도 해줄 수 있는 지금에 그녀는 감사했다. 똑똑-. 조용히 침실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드리엔은 긴장되는 마음을 꼭 부여잡고 있던 것을 풀고 시선을 돌렸다. 요나가 저녁마다 어여쁜 마님을 관리해드린다는 명목으로 하는 일이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온갖 약초와 오일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기다란 카우치에 몸을 늘어뜨린 아드리엔은 짐짓 진지하게 향유를 섞는 요나에게 입을 열었다.
“요나, 너는 연애해본 적 있니?”
“네에-?”
아직 성년이 채 되지 못한 요나가 빠르게 얼굴을 붉혔다.
“연인끼리는 무얼 하니?”
“그, 그거야 저보단 마님께서 잘 아시지 않을까요?”
주인의 머리에 펴 바를 가루들을 향유에 섞으며 요나가 똑똑하게 답했다.
‘그야 맞는 말이긴 하지.’
사용인들의 눈엔 그 철혈 같은 대공을 꾀어낸 희대의 요부일 것이 아닌가.
“평범한 연인들끼리는 뭘 하는지 궁금해.”
“대공 전하와 마님이 평범한 연애라니, 왠지 안 어울리지만…….”
말을 끄는 요나의 귀여운 얼굴을 보자 아드리엔은 조금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몇 년인지 세어보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를 철혈 재상,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첫눈에 반한 여자라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아드리엔과 노에비안은 아무도 모르게, 아주 긴 연애를 했다. 황족인 그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일반 귀족인 아드리엔은 일반 아카데미에서. 두 아카데미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공간인 도서관에서 처음 만나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했다. 그가 부족한 점은 아드리엔이, 아드리엔이 부족한 점은 그가 채워주면서. 그렇게 서로를 의지했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그와 함께할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던지라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었지. 그게 남들이 말하는 연애와 엇비슷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데뷔탕트가 다가오던 시기에 비앙카에게 사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털어놓았을 때부터였다. 비앙카는 그녀가 했던 게 연애라고 했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 없지만, 대신 편지라면 원 없이 주고받았다. 데뷔탕트에서 실제로 마주한 노에비안은 아드리엔의 상상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이것도 평범한 연애일까?
“음, 높으신 분들께서 평민들의 연애를 궁금해하신다고는 하던데요.”
“으, 으응.”
고민하던 아드리엔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요나를 보았다. 로아드네스와의 연인 행세가 노에비안의 속을 뒤집어 놓을 만큼 진짜처럼 보이려면 보통의 연인들은 뭘 하는지 꼭 알아야 했다. 요나는 다 섞은 약을 그녀의 머리에 치덕치덕 발라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연인이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이나 주고 싶었던 걸 주는 게 무난한 것 같아요. 대공 전하께 선물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 선물!”
아드리엔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짝! 쳤다.
“그래, 선물을 드리면 되겠어!”
연인이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 주고 싶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야 굳이 종이에 적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요.’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노에비안을 바라보지 않았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미소 짓고 행복해하는 걸 보고 싶었다. 요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드리엔은 퐁퐁 솟아나는 생각들을 종이에 주욱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에비안과는 이전에도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못 할 일들. 로아드네스와 한다면 노에비안의 심기를 충분히 거스를만한 일들.
“마님, 이게 다 뭐예요?”
“연인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
“음…….”
하던 일을 끝마치고 앞치마에 손을 슥슥 닦아낸 요나가 직접 그 목록을 살폈다.
“아, 이거 좋네요.”
“뭔데?”
아드리엔이 눈을 빛냈다.
“마침 내일이 초콜릿의 날이에요. ‘쿠키 만들어주기’라고 쓰신 이거. 내일 아침에 저희가 만들어드릴 테니 가져가셔요. 탄신연의 두 번째 날에 대공 전하와 함께 가시는 거지요? 그날 전해주시면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자세히 읽어보렴. ‘직접’ 만들어주기잖아!”
“마님이…… 직접이요? 굳이요?”
요나의 낯설다는 시선은 이제 아드리엔에게 아주 익숙했다. 본래 블리에라면 남이 구워다 주는 쿠키에 트집을 잡기 바빴을 테니까. 아드리엔은 늘 상상만 하던 것을 건강한 몸으로 직접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흥분했다.
“나 쿠키를 직접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잖아……!”
“예, 엄청 건강하시긴 하죠!”
들뜬 듯 보이는 주인의 얼굴에, 요나가 덩달아 밝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제가 저택에서 과자를 가장 잘 굽는 하녀들을 모아 내일 대기시킬게요!”
“그래, 잘 좀 부탁한다고 전해주렴.”
어떻게 포장하면 좋을까? 아드리엔은 요나가 할 일을 끝내고 나가자마자 두근대는 심장을 꼭 잡고 침대에 누웠다. 슬슬 사교계며 가십지에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이름을 자극적으로 내비칠 때였다. 무도회에 몇 번 파트너로 간다고 해서, 이미 탕아로 소문이 자자한 로아드네스와 자극적인 기사가 날까? 염문설이 났던 수많은 여인들 중 한 명이 아닌, 정말 불같은 사이로 보이려면 차별성이 필요하지 않나?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는 정부가 이런 식으로 자꾸 입에 오르내리면, 노에비안은 자신의 영역에 블리에를 들여서라도 감추려 들 게 뻔했다. 하루빨리 대공저로 들이려 할지도 모르지. 아드리엔이 아는 노에비안은 그랬으니까. 노에비안에게로 생각이 튀자, 건강한 몸으로 뭘 할지 하나하나 생각해보던 들뜸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렇게 갑자기 입을 맞추려 할 줄은 몰랐어.’
그녀의 목표는 노에비안을 자극해, 그가 말하는 시간이 흐른 뒤가 아닌,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대공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노에비안이 도대체 어떻게, 왜 자신을 죽였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동시에 그를 무너뜨릴 만한 정보가 있는지 직접 뒤져봐야 했다. 시신을 찾아 로아드네스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아야 했고. 그리고 로아드네스가 더 이상 그토록 아파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도 이번에 추가되었다.
‘고마운 사람.’
아드리엔 피레타를 그렇게 좋게 기억해주는 아름답고 고마운 사람. 아드리엔은 백작저의 서고로 가 베이킹 책을 찾아 뒤적였다. 긴장도 풀고, 건강한 몸으로 고마운 사람에게 뭐든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의욕이 솟구쳤다. 아드리엔은 자신의 마음을 새카맣게 태우는 노에비안을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당분간 로아드네스와 결속을 다지며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 마지는 아침부터 분주한 저택의 안주인을 질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일찍 일어나 몇몇 하녀들과 함께 ‘새벽 시장’에 다녀온 백작 부인이 생전 들어오지도 않던 주방에 들어와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예쁜 옷에 실오라기 하나만 묻어 있어도 생난리를 치던 전적을 생각하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얼굴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하녀들에게 쿠키 만드는 법을 배우는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이제 더 먹여볼 약도 없는데, 어쩌누.’
띵! 띠링! 삼삼오오 모여서 화덕 앞에서 재잘대던 이들이 미리 맞춰놓은 종 모양의 시계가 울리자마자 화덕을 열어 쿠키를 꺼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하트 모양과 별 모양의 쿠키들이 뿌옇게 오르는 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백작 부인과 하녀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만들었어……!”
일견 감격한 듯한 블리에 아카시아의 얼굴은 단연 압권이었다. 언제 묻었는지 화덕에서 묻어나온 검댕을 코에 묻힌 그녀가 손으로 입을 턱 가리고는 주위 하녀들에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우리가 만들었어! 고맙구나. 너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금세 만들지 못했을 거야.”
“마님이 손재주가 이렇게 좋으신 줄은 처음 알았네요!”
“맞아요, 잔실수도 거의 없으시고 이러다가 과자점이라도 하나 차리시는 거 아닌지 몰라요!”
‘저런.’
안주인에게 친구에게나 할 법한 말을……. 백작 부인에게 일 잘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닌 것을 모르는 어린 하녀들의 말실수에 마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감정 기복이 심한 블리에가 단번에 한소리할 줄 알고 혀를 차던 마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게로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았다.
‘응……?’
“마지, 마지가 제일 처음 먹어봐.”
‘독약이다. 분명 독약을 탄 거야.’
아니면 설사약일지도 모르지! 머리로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환하게 웃으며 가장 처음 시식을 권하는 블리에의 얼굴이 너무 천진난만해서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제, 제가요?”
“응. 우리는 만들면서 단 걸 많이 집어먹었거든! 마지가 먹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을 거 같아.”
맙소사. 만약에 저게 연기라면. 그동안 좀 격 없이 굴었던 자신을 설사약이나 독을 탄 쿠키로 응징하려는 아주 고도의 수법이라면……! 마지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아직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하트모양 쿠키를 집어 들었다.
“어서 드셔보세요, 하녀장님!”
“마지 님, 어서요!”
‘내가 저번에 청소 똑바로 하라고 너무 혼냈나? 저것들도 한패일지 몰라.’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냄새만큼은 황홀할 만큼 고소한 버터 향이 났기 때문에, 마지는 먹고 죽자는 생각으로 쿠키를 오독 씹었다.
“음?”
“어때? 마지.”
“어…….”
이렇게 맛있는 쿠키는 처음이었다. 고급 재료로 만든 쿠키를 먹어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파티가 끝나고 남은 것들을 버리기 전에나 몰래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입안에서부터 콧속까지 휘감는 버터 향과 그 안에 녹진하게 퍼지는 초콜릿은 마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정말 과자점을 차리셔도 되겠군요.”
“와아-!”
“거봐요, 마님! 정말 소질이 있으시다니까요?”
“쿠키 안에 어떻게 초콜릿을 넣을 생각을 하셨어요? 초코칩을 뿌리는 건 봤어도 이런 건 처음이에요!”
환호성으로 가득 찬 주방. 이윽고 소란에 놀라 달려온 노집사에게 쿠키를 담아낸 바구니를 건네는 블리에를 보며, 마지는 아직 삼키지 못한 쿠키를 꼭꼭 씹어 삼켰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약 같은 건 이제 안 찾아야겠어.’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노집사와 눈을 맞춘 마지는 결심했다.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정말로 어느 날부터 미친 상태라면, 저 상태 그대로 두는 게 이 집안의 평화에 더 나으리라고. *** 예쁘게 포장한 쿠키보다 더 예쁘게 포장된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오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마담 르블리에는 아카시아 백작저로부터 직접 출장을 요청받았고,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루임에도 군말 없이 백작저로 달려와 전력으로 그녀를 꾸며주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릴 만큼 천박하고 요란한 차림이었던 지난날에 비하면 썩은 호박 덩굴에 금칠을 하고 다이아몬드를 박아넣은 것과 같은 변화였다. 사용인들 모두가, 아내의 상 중에도 홀딱 반한 정부를 데리러 오는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기대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웅장한 사륜마차의 다각거리는 소리가 활짝 열어놓은 백작저의 입구에서 멈췄을 때 마지는 콧구멍을 벌름거릴 만큼 흥분한 상태였는데, 곧이어 마차 안에서 뻗어지는 길쭉한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던 그녀의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커졌다. 너무 충격적인 얼굴을 보아서였다.
“대공 전하가 아니야……?”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론타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사내였지만, 눈앞의 남자는 노에비안이 가진 지적인 문관 느낌이 아닌, 주위 사람을 압도하는 체구로 기를 죽이는 무관의 느낌을 물씬 자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쭉 뻗은 몸을 따라 시선을 더 위로 올리면 섬세하게 조각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마지가 태어나 본 인간 중 가장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떼지 못하는 몇몇 사용인들을 제외하고 요나와 마지의 시선이 가까스로 대기하고 있던 안주인에게로 향했다. 활짝 웃고 있는 귀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아름다운 남자를 입구에서 맞이하며 매끄러운 미소를 흘렸다.
“마님……?”
그리고 그들에게 살짝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적막한 돌풍이 백작저 앞을 지나고,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멍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금발에, 붉은 눈…….”
“설마 우리가 말로만 듣던 그…….”
“론타의 문제아를 실제로 본 거야?”
머리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하녀들이 그제야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와, 와…….”
“마, 마님이 바람을 피우시는 거야?”
“애인은 이미 따로 있으셨는걸.”
“대공 전하는 뭐야?”
“다들 조용히 해라! 말하려거든 들어가서 해.”
“마지 님, 코에서 피가 나요.”
“피곤해서 그래.”
요나가 건네는 손수건으로 코를 대충 틀어막은 마지가 역시 입을 벌리고 있는 노집사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이제 좀 찾아오려는 집안의 평화가 흔들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마지와 노집사의 눈은 그만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끼리끼리라더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이던 문제아가, 밖에서 이미 질질 새고 있는 바가지인 문제아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