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가2021.08.28.
이른 아침. 로아드네스의 궁도 분주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들의 주인이 몇 년간 참석하지 않던 황태자의 탄신연에 이틀이나 연속으로 참석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으니. 로아드네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침대 위에 놓인 재킷 몇 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별도의 목욕시중도 없이 씻고 나와 대충 수건만 두른 채 서 있었다. 근육으로 꽉 짜인 로아드네스의 등이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 햇빛에 반짝였다. 새로운 옷을 찾아 황자의 침실을 박차고 들어온 닐은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화려한 옷은 많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잘 안 입으셔서 그렇지.”
“제일 화려하고 보기 좋은 걸로 골라.”
고민하던 것을 멈춘 로아드네스가 자신의 몸에 비해 턱없이 작은 카우치 소파에 몸을 길게 늘여 누웠다.
“이런 일은 시종을 좀 시키시지. 2황자 궁의 시종들은 좋겠습니다. 저들이 할 일을 전부 이런 고급인력이 대신하니.”
“닥치고 좀 골라.”
“뭐, 제가 심미안이 있긴 하지만요.”
시커먼 사내들만 득시글한 황실 제 2기사단 내에서 최고의 심미안을 자랑하는 닐이 실실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사실 뭘 입혀도 그림 같은 주군이긴 했다.
‘입만 닫으면.’
“근데 원래 시종이 입혀주는 대로 대충 입지 않으십니까? 아침부터 왜 저까지 불러서……. 탄신연에는 이틀 연속이나 참여하시고…… 다른 황족분들은 다 참석하지도 않으실 텐데. 데이트하시는 것도 아니고. 진정 신붓감이라도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운지 닐이 킥킥대며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는 로아드네스를 꾸밀 생각에 즐거워했다.
“데이트라…… 뭐 그 비슷한 거긴 하지.”
“……예?”
입매를 비틀어 웃는 로아드네스를 보며 닐은 소름이 돋았다.
“데…… 뭐요?”
“아카시아 백작 부인과 데이트하니까 최대한 화려하게 만들어라.”
“맙소사!”
재킷을 집어 던질 뻔한 닐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조각상처럼 누워 있는 로아드네스에게 성큼성큼 걸었다.
“결국! 결국! 그렇게 얽히는 겁니까? 이 나라가 아무리 좀 방탕한 구석이 있고! 전하께서 그 정점에 있다고 다들 떠들기는 하지만! 트로비카 대공이 반쪽짜리 숙부라곤 하지만! 그래도 숙부님이신데! 어찌! 그 정부와……!”
닐이 낮게 소리치면서 진줏빛 재킷을 집어 들고 팔딱이자 실눈을 뜨고 잔소리를 들어넘기던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나 그것을 집었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절대 재킷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듯, 닐이 그것을 꽉 쥐었다. 닐에게는 평소 보여주지 않던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은 로아드네스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뺏어 들었다. 데이트하는 남자가 저런 미소를 짓던가?
‘이 분위기는, 설마……?’
“……데이트가 아닌 거지요?”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설렘은 없고 여유로운 미소만 흐르자 잠시 진정한 닐이 입을 열었다.
“미인계……?”
“이제 좀 일을 할 만한 생각이 드나 보군. 한 번만 더 조잘거렸으면…….”
“제 정수리가 땅에 박혔겠지요. 정강이뼈가 두 동강 나던가요.”
닐이 상기된 얼굴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셔츠 하나를 가져다 바쳤다. 로아드네스가 별말 없이 그의 시중을 받아들이고 셔츠를 긴 팔에 꿰입었다. 항상 성나 있는 등짝이 꿈틀거리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닐은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로아드네스의 젖은 금발을 멍하니 보았다.
“네 놈 보라고 있는 얼굴은 아닌데.”
“미, 미인계로 그 부인을 어떡하시려고요?”
“그쪽이 그리 나오려 하니, 이쪽에서 먼저 선수 치는 것뿐이다.”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다는 감정이 구겨진 미간으로 표출되자, 닐이 귀신같이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 거짓말쟁이 부인이 전하를 유혹하려 했군요!”
여인들 생긴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망언을 하는 개황자를 감히, 꼬드기려 하다니! 홀로 중얼거린 닐이 비장하게 주먹을 꾹 쥐고 재킷을 달라 손을 뻗는 로아드네스에게 재킷을 내밀지 않았다.
“?”
“전하.”
“뭐.”
“전하는 사실, 아무것도 안 입는 게 제일 보기 좋습니다.”
“?”
재킷을 고이 카우치에 놓은 닐이 달아오른 얼굴로 끝까지 채운 셔츠의 단추를 빠르게 풀고 셔츠 깃을 양쪽으로 팟! 펼쳤다.
“완벽합니다!”
걸치지 않을수록 아름다운 남자. 그게 바로 황실 최고의 탕아, 로아드네스 코즈마 드 론타였다. ***
“전하?”
로아드네스는 아침의 상황을 떠올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탐스러운 흑발을 반쯤 틀어 올린 블리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귀부인의 차림새는 정숙하진 않았어도 누군가를 작정하고 유혹하려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름답습니다.”
빤히 바라보며 뜬금없이 말하자 블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웃었다.
“오늘 조금 신경 썼거든요. 아무리 연인 행세를 하는 거라지만 전하의 체면도 있고요. 아직 데뷔탕트 시즌이기도 해서…….”
그가 아름답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여인들은 빠르게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곤 했다. 그럴 때 말을 걸면 백이면 백 횡설수설하며 원하는 정보를 줄줄 말해놓고도 말한 줄도 모를 만큼 얼이 빠졌고. 그런데 이 여자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받은 칭찬이 아닌 것처럼 여상하고 조금은 의연하기까지 했다.
“내 체면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알다시피 제국에서 내 평판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니까.”
“그렇더군요. 하지만 그만큼 위명도 높으시니, 아주 약간은 이미지 관리가 필요할 것 같기는 해요.”
허.
‘그렇더군요?’
싸우자는 건가? 하지만 블리에의 얼굴은 너무나도 침착했고 마치 그에게 조언이라도 해주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이미지 관리 같은 건 할 생각 없습니다.”
“?”
“‘새로이 시작하는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 새로이 시작하는 연인이라. 나는 그 말에 로아드네스가 이 연극에 생각보다 훨씬 더 진심임을 깨달았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연인’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내 목을 바짝바짝 메말렸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자연스럽게 그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황태자의 탄신연은 총 3일 동안 열리는데, 첫날에는 수도의 모든 귀족들과 황족들이 함께하고, 두 번째 날에는 황족들은 거의 빠진다. 당연히 첫날에는 모두가 과할 정도로 완벽한 차림으로 온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고 조금은 고전적인 스타일로. 두 번째 날에는 조금 더 자유롭고 유행하는 스타일로 입고 오는 분위기인데, 남자들의 옷을 잘 모르지만 로아드네스처럼 저렇게 자유분방한 차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며져 있지 않은 셔츠에 자꾸 눈이 갔다. 재킷은 주인의 무관심 속에 마차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크라바트는 어디에 있는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떡 벌어진 그의 어깨 때문에 벌어진 셔츠 틈 사이로, 움푹 팬 쇄골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해도 존재감이 아주 대단했다. 그가 입은 하얀 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각 잡혀 잘 다려져 있었는데, 그의 몸집에 맞게 약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래서 답답한 걸까.’
건장한 몸에 비해 옷이 작아서? 진지하게 벌어진 셔츠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는데 찌를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
남자의 살결을 너무 빤히 보았다.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눈과 정확히 딱 마주쳤다. 향기 없는 조화같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술이 살짝 늘어났다. 눈썹을 살짝 까딱하던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쓸어넘기며 느릿하게 셔츠를 여몄다.
“……?”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만족스럽게 식사를 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마치, 목적 달성을 끝낸 사람처럼…….
‘……무슨 목적?’
마차가 멈추자 혼란스럽게 쏟아지던 생각들이 동시에 뚝 멈췄다. 어느새 크라바트며 재킷까지 대충 걸쳐 입은 로아드네스가 마차에서 훌쩍 내려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가 내리자마자 주변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 낮은 비명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바깥은 이제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아틸차드홀의 입구는 반짝이는 조명과 장식품들로 로맨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실까요, 부인.”
그가 내민 손은 내게는 턱없이 크고 마디가 굵으며 길쭉해 아름다웠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맞닿는 얇은 장갑 틈으로 굳은살이 배긴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머리가 조금 새하얘졌다. 예의상 잡는 손이 아니라 누가 봐도 친밀하게 눌러 잡은 손안에 느껴지는 열기가 무척 뜨거워서, 손이 녹진하게 녹아버리는 느낌이 날 정도였다.
*** 아틸차드홀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가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잠깐의 정적 이후, 다시 홀은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난히 눈을 빛내며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주세타 자작 부인이 우리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주홍빛 머리카락의 부인이, 주세타 자작 부인인가요?”
“노우라 주세타.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이기도 합니다.”
그제야 어제 도리스에게 불려 갔다 온 내게 그녀가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로아드네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눈이 내 눈과 다시 마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싱긋 웃었다. 내가 그리할 줄은 몰랐던지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무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굳이 파티에 참여하고자 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노에비안 트로비카에게 보이는 것 말고.”
그가 살짝 턱짓하는 곳에는 아주 낯익은 사람이 구석에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왜……?”
노에비안의 부관, 짐스커 경이었다.
“그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눈을 두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짐스커 경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가십지에 우리가 나란히 등장해 대공의 신경을 긁겠다는 계획은 꽤 똑똑하고 배짱 좋은 방법이지만, 난 굳이 돌아가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
“그게 무슨……?”
“때로는 그의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단 말입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로아드네스가 샴페인 잔이 가득 찬 트레이를 들고 지나는 시종을 손가락 하나로 불러세웠다. 그가 세운 것은 시종 한 명인데, 주변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그의 손끝으로 집중됐다.
“마십시다. 우리의 연애를 위해.”
“!”
로아드네스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보란 듯이 내게 쥐여준 샴페인 잔과 자신의 잔을 들어 맞부딪혔다. 에스코트를 해주던 손으로 자연스럽게 내 팔을 끌어당기고 팔을 얽어 사적인 자리에서나 할법한 자세로 술을 마셨다. 나는 그의 돌발행동에 거품을 머금고 찰랑거리는 술을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입만 겨우 잔에 갖다 댔다. 반면 단번에 잔을 비운 로아드네스는 반짝이는 금발을 쓸어올리며 낮게 탄식하는 이들의 시선을 즐겼다. 그리고 슬금슬금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그의 늘어진 입매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시작인데…….”
로아드네스는 내 곁을 바삐 지나는 시종에게서 나를 보호하며 내 어깨를 힘 있게 감싸 쥐었다. 뜨거운 온기에 놀라기 무섭게 더운 입김이 귀에 닿았다.
“……이렇게 굳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의 입술은 분명 손가락 몇 마디쯤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귀에 갖다 붙이고 말하는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