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온몸이 조여드는 긴장감2021.09.01.
이렇게 환한 파티홀 가운데서 이런 짓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밀착할 줄은 몰랐다.
“일단은…….”
“일단 이렇게 있으십시오.”
등줄기가 찌릿찌릿한 감각이 가시질 않아, 나는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벗어나려 할수록 날 감싸 안은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숨이 막힐 만큼 끌어안은 것도 아니건만. 나는 거대한 바위틈에 끼인 사람처럼 겨우 숨을 내쉬었다. 발그레 달아올랐을 게 분명한 내 뺨이 그의 가슴에 살짝 붙어 있었다. 너무 놀라 손을 짚은 곳은 그의 명치 언저리였는데, 바위 위에 손을 얹은 것처럼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쿵쿵대는 심장은 그의 소리인가, 내 것인가? 나는 그것이 내 심장 소리라는 데에 가진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다. 비단 닿아 있는 몸 때문이 아니었다. 정수리에 쏟아지는 그의 숨결, 그 숨결을 따라 귓가를 쓰다듬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 재킷 틈으로 보이는,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셔츠에서 나는 특유의 라벤더 향기까지. 내가 서 있는 자리에만 지독한 가뭄이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공의 개가 우리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입안이 바짝바짝 메마른 채, 나는 반쯤 안겨 눈을 꼭 감았다.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어떻,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미소가 사라진 로아드네스의 붉은 눈동자에 내가 가득 담겼다. 그의 눈동자 때문인지, 아니면 내 얼굴이 정말 붉어져서인지 그 안에 담긴 나는 무척 볼썽사나워 보였다.
“이렇게…… 할까요……?”
마른침을 꼴딱 삼킨 내가 조금 더 그의 가슴에 뺨을 갖다 대고 아양 떨 듯 머리를 살짝 비비적거렸다. 재킷 바깥으로도 느껴지는 두툼한 가슴이 크게 움찔하더니, 그가 나를 바로 떼어냈다. 그리곤 내가 다시 그를 쳐다보기도 전에 주세타 자작 부인이 있는 쪽으로 내 몸을 가볍게 돌렸다.
“……주세타 자작 부인이 우리가 꼴값하는 걸 다 지켜봤습니다.”
“꼬, 꼴값이요?”
“……젠장.”
낮게 중얼거리던 로아드네스는 뒤에서 내 양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뜻 같았다.
“꼴값도, 젠장도 부인에게 하는 말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 알아요. 어깨에서 손 좀…….”
천천히 다시 돌아보자, 로아드네스가 어느새 시종 한 명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목덜미를 붙잡힌 채 앞으로 끌려온 시종이 트레이 위에 있던 샴페인을 모조리 그에게 빼앗겼다. 연거푸 샴페인을 들이켠 로아드네스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에게 하던 것처럼만 하면 앞으로도 문제없겠습니다.”
“대공에게 하던 것처럼요?”
“방금 그런 거 말입니다. 개도 아니고…….”
음산하게 중얼거린 로아드네스가 어딘가를 노려보더니 지나치는 다른 시종의 목덜미를 단번에 잡아채 거의 들 듯이 제 앞에 세우고 샴페인 잔을 비웠다. 독수리가 쥐를 잡듯 가볍고 산뜻한 동작이었지만 당하는 시종 입장에서는 공포심을 일으키기 충분했는지 시종은 떨고 있었다.
“더 가져와.”
“예?”
“술. 더 가져오라고. 귀가 먹었나?”
“예, 예! 전하!”
가엾은 시종이 빈 잔을 챙겨 달아나자 내가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조용히 속삭이려 한 것인데 로아드네스가 한걸음 멀찍이 물러나 버렸다.
“……전하?”
“술 냄새 나니까, 거기서 이야기하십시오.”
“저, 대공에게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방금 대공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문제없을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전하의 품에서 조금 머리를 움직여서 그런 것 아닌가요?”
“조금 머리를 움직였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친밀했습니다.”
그전까지 안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불쾌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저 그런 거 대공에게 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나는 거리를 유지한 로아드네스에게 성큼 한 걸음 다가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뒷걸음질 치지 않은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 거리는 허락해주세요. 방금처럼 떨어져서 이런 대화를 계속 나누다간 계획에 차질이 생기잖아요.”
사실 그가 방금 거리를 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오늘 로아드네스와 마차에 탔을 때부터 느꼈던 간질간질함에 질식되었을 것이다. 노에비안 외에 다른 남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행동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긴장한 게 사실이니까. 노에비안과 있을 때 느꼈던 안정감과는 다른, 사뭇 낯선 긴장감에 나는 명백히 당황했다. 절벽 위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전기로 가득한 옷장에 벌거벗고 들어간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 빤히 내려다보는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벌레에 물렸을 때 바르는 화한 약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내 심장 소리가 귓전을 둥둥 울리고 있었지만, 이런 기분에 취해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짐스커 경은 대공의 충실한 부관이니, 확실히 우리의 ‘꼴값’을 전달할 거예요. 그러니…….”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서히 그의 팔로 손을 뻗었다. 따라붙는 시선에 긴장감이 더 커졌지만, 오늘 파티에 온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제 계획에 전하를 좀 이용해야겠어요. 협조해 주시겠죠?”
연인의 가벼운 부탁이니까요. 내가 속삭이듯 덧붙이자 그의 단단한 팔이 다시 움찔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꾹 참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박사박 드레스 자락이 스치고,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주세타 자작 부인.”
아까부터 우리를 주시하던 노우라 주세타의 앞이었다.
*** 귀부인들이 모인 자리에 황자를 데려온 아카시아 부인의 등장으로 수군대던 입들이 일시에 멈췄다. 노우라는 제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귀부인을 보고 잠시 굳어 있다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아카시아 백작 부인.”
“부인께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를 소개해 드리려고요. 괜찮을까요?”
이미 데려와 놓고 허락을 구하다니! 노우라의 무리는 새로이 시작하는 연인을 연신 훔쳐보고 있었지만 입을 딱 다물고 모른 척했다. 노우라는 귀부인의 뒤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보며 억지로 웃었다. 블리에 아카시아를 무시하려 해도, 2황자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부인의 사업 수완이 대단한 걸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얼떨결에 로아드네스를 소개받고, 뭔가에 홀린 듯 짧은 대화를 나누던 노우라는 은은히 미소 짓고 있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힐끔 보고 정신을 차렸다. 저 굴러들어온 돌이 황태자비의 시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상상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데, 2황자 앞이라 망신을 줄 수도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제 샤프롱께서 계속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예?”
“황태자비 전하께서, 제 샤프롱을 맡아 주시기로 한 건 다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로아드네스를 소개받고 싶어 모여드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아드리엔이 여상히 웃으며 말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반짝이는 입술로 홀린 듯 따라붙던 눈들이 점점 커졌다.
“화, 황태자비 전하께서 부인의 샤프롱을 맡아 주신다고요?”
“저번에는 대공께서 샤프롱으로 나오셨다고…….”
“대공께서는 상 중이시고, 성별이 다르니 어려움이 좀 있었답니다. 여기 계신 자작 부인께서 제 곤란한 상황을 이미 부인들께 알려주셨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자신에게 주목하기 시작하는 시선들을 살피던 아드리엔은 보란 듯이 로아드네스의 팔짱을 끼고 노우라에게 바짝 다가갔다.
“제 새로운 샤프롱께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자작 부인?”
*** 나는 황태자비 궁의 입구까지 에스코트해준 로아드네스 덕분에 주세타 자작 부인을 따라 무사히 황태자비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응접실 소파에 똑바로 앉아 있는 도리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잠시간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서 있었다.
‘저 옷은…….?’
도리스는 어제 내가 입고 왔던 드레스와 놀랄 만큼 비슷한 느낌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담 르블리에가 저택까지 직접 와서 신경 써준 복장이기에 나는 그 디테일 하나하나를 기억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걸친 악세사리들도 내 것보단 당연히 더 고급품이었지만 아주 비슷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도리스에게 예를 갖췄다.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아카시아 백작의 처, 블리에 아카시아입니다.”
“우리 통성명은 어제 하지 않았던가요?”
도리스는 반들거리는 얼굴 가득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이어 예를 갖추는 주세타 자작 부인과 내게 착석을 권했다.
“미리 알현 신청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인가요 부인? 황태자 전하께서도 출궁하신 참에 심심했는데 잘 되었군요.”
“무례에 용서를 구합니다, 전하. 어제 제안해주신 것에 대해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그만…….”
“아, 그것……. 그런데 어쩌죠. 트로비카 대공이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아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던 참인데.”
“!”
“어제저녁에 돌아오자마자 부인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말이죠.”
“어제, 말씀이신가요?”
“못 받은 건가요?”
나는 흔들리는 노우라의 시선을 무시하고, 도리스의 말에 집중했다. 노에비안이 황태자비의 서신을 중간에서 빼돌린 걸까?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는 전하의 제안을 지금 당장이라도 받아들이고 수행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급했다. 도리스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아래위로 살폈다. 그리고 순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우라.”
“예, 전하.”
“내가 부탁한 일은 끝냈나요?”
도리스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노우라에게 질문했다.
“예? 아, 그것이…….”
도리스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던 노우라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부인. 나 역시 부인을 내 곁에 두고 싶어요. 하지만 대공의 눈치도 아주 조금은 볼 수밖에 없답니다.”
도리스는 퍽 다정하게 내게 변명했다.
“부인의 능력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게 증명해준다면, 나 역시 반대를 무릅쓰고 부인을 곁에 둘 수도 있지요. 무슨 뜻인지 아나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도리스가 내는 시험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
“황궁의 사용인들은 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요. 차기 황후가 된다고 해서 벌써 황후 폐하 같은 스타일을 고수할 필요는 없지요. 안 그런가요?”
나는 도리스가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파악하려 애썼다. 나는 도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파악하자면, 도리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의 스타일을 카피했다. 본인인 내가 몰라볼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험일까? 그녀가 날 따라 한 것을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주세타 자작 부인에게 시킨 일이 무엇이냐 물어봐야 하는 걸까? 나는 도리스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도리스는 황태자 바르데날도처럼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 순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그녀의 녹빛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황태자비로서의 자존심이 빛났다.
“물론, 황태자비 전하께서 황후 폐하를 따라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은 넓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은 많으니까요. 다만.”
“다만……?”
나는 진지해 보이지 않게 아주 여상하고 가볍게 말을 꺼냈다.
“황태자비 전하의 격에 맞으면서도 창의적인 스타일을 만들어줄 인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 시녀로서, 부인의 첫 번째 관문은 결정된 것 같군요.”
도리스 역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 응접실에서 가벼운 대화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노우라의 표정은 안쓰러울 정도로 희게 질렸다.
“잘만 해준다면……. 부인이 원하는 것도 하나 들어주겠다고 약속할게요. 요즘 내 스타일에 아주 질린 참이라.”
도리스는 이어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과 나를 번갈아 보는 노우라를 밖으로 내보냈다. 공손한 손짓이었지만 제법 단호했다. 주저하던 노우라가 입술을 꾹 깨물고 군말 없이 나갈 만큼. 순식간에 둘만 남은 응접실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신 도리스가 돌연 눈을 빛냈다. 그리고,
“부인이 원하는 건 아마도…… 비어 있는 대공비의 자리일까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 머리통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