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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유 없는 도움은 없다 (36/171)

36. 이유 없는 도움은 없다2021.09.04.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응접실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16558454439804.png“……네?”

16558454439809.jpg“아닌가요?”

도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언감생심 내 위치를 알면서도 비어 있는 대공비 자리를 묻는 게 맞나? 당연히 나는 대공비가 되고 싶지도, 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하지만…….

16558454439804.png‘블리에는 대공비가 되고 싶어 했지.’

노에비안이 분명 그리 말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리스가 몇 번 더 차를 홀짝이더니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16558454439809.jpg“내 생각엔, 부인의 마음 한편에 트로비카 대공과의 미래가 그려져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전혀 악의가 없어 보이는 얼굴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황태자비는 내가 노에비안의 정부라는 것을 알고 묻는 것일까? 블리에가 그런 얼토당토않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도?

16558454439809.jpg“죽은 대공비와 부인이 닮았다는 말, 대공이 혹시 하지 않던가요?”

16558454439804.png“!”

역시, 도리스는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16558454439804.png“……대공께서 따로 말씀은 없으셨어요.”

나는 치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이를 악물고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도리스의 얼굴에 약간 흥미가 감돌았다.

16558454439809.jpg“부인이 죽은 대공비와 정말 많이 닮았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친절을 베푼 거예요. 그 철혈 재상이 말이에요.”

도리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16558454439809.jpg“최근 아카시아 백작저와 대공저 간의 교류가 잦다던데,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대공도 분명 부인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그녀의 확신에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16558454439804.png“……어떻게 그렇게 잘 아셔요? 전하께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나는 조금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본래의 내 얼굴과 닮았다는 이유로, 블리에와 노에비안의 관계를 짐작하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이 치솟기 시작했다.

16558454439809.jpg“대공저에도 제 눈과 귀가 있답니다.”

도리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는 순간, 온몸이 마비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58454439804.png‘대공저에 도리스의 눈과 귀가 있다고……?’

나를 괴롭혔던, 그 대공저 악마들의 수장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대공저의 사용인들이 내게 그리 굴 수 있었던 이유가 어쩌면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 가능성을 대놓고 들으니 당황스럽긴 했다.

16558454439809.jpg“소문은 들어 알고 있을 거예요. 트로비카 대공의 아내 사랑이 지독, 아니 지극하다는 것 말이에요.”

16558454439804.png‘그리도 극진해 정부를 만들었답니다.’

나는 굳어버린 와중에도 조용히 실소했다.

16558454439809.jpg“하도 극진하고 유난스러워서 그 자리를 꿰차는 게 그리 쉬울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부인이 내 사람이 되어준다면, 그 일을 돕겠어요.”

나는 대공비 자리 따위엔 일말의 관심도 없다. 하지만 도리스가 그런 짐작으로 내가 대공저로 가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16558454439804.png“황실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전하의 시녀로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6558454439804.png‘이유 없는 도움은 없다.’

나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아마 도리스 역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 나를 도우려는 것이겠지. 2년간 내게 가해진 교묘한 모욕과 학대. 모두 이 여자의 지시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직접 그 소굴로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도리스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활짝 피어난 작약처럼 웃었다. 나 역시 그녀의 미소를 따라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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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유로운 척했지만, 나는 알현실을 벗어나자마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거대한 산을 홀로 마주하고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잔잔하게 흥분되던 마음이 가시자 긴장과 두려움이 나를 휘감았다.

16558454439804.png‘어차피 거절하지도 못할 자리라면, 최선을 다해 상황을 이용할 수밖엔 없어.’

지금 내가 가진 건 블리에의 건강한 몸뿐이니까. 황태자비 궁에 더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빨리하는데, 기다란 회랑 입구에 큰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

16558454439804.png“……황자 전하?”

16558454500876.png“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회랑 벽에 길쭉한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로아드네스가 굳은 얼굴로 자세를 똑바로 했다.

16558454439804.png“시간이 꽤 흘렀는데…… 설마 에스코트해 주신 이후로 계속 기다리신 건가요?”

16558454500876.png“파트너를 두고 가는 사내도 있습니까?”

굳은 얼굴과 덤덤한 말투와는 달리 내용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다가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자 내 발밑을 잡아끌던 불안감이 저 멀리 도망가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내 모든 사정을 알진 못할지라도, 지금 내게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내 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등줄기를 부유하던 두려움과 외로움도 약간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16558454500876.png“계속 그렇게 서 있을 겁니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남자에게 이상하게 위로받고 있다. 세게 얻어맞아 얼얼해진 뒤통수를 이 남자가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노을이 우리를 비추고,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일까? 가슴이 간질거리고, 도리스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내 등줄기를 가로질렀다.

16558454439804.png“이거…….”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품속에 가지고 있던 쿠키 꾸러미를 그에게 내밀었다. 기세가 올라 만들긴 했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자 줄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아드네스는 꾸깃꾸깃해진 봉투와 리본으로 포장된 내 쿠키 꾸러미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16558454439804.png“짐스커 경의 앞이나, 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드리는 게 더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16558454500876.png“…….”

도리스 앞에서도 떨리지 않았던 손이 조금 떨렸다. 나는 여전히 내 꾸러미를 받지 않고 보기만 하는 로아드네스를 바라보지 못하고 손을 더 내밀기만 했다.

16558454439804.png“역시, 그런 의도로 드리는 것보다 좀 더 순수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고 싶어졌어요.”

16558454500876.png“……이게 뭡니까?”

한참 있다가 나온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직접 그의 손에 꾸러미를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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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54439804.png“오늘이 초콜릿의 날이래요. 연인끼리 달콤한 걸 주고받는 그런 날이요.”

여전히 그는 대답이 없었다.

16558454439804.png“제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든 쿠키예요.”

그래서 나는 그의 손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처럼 굳어 있거나, 혹은 홀에서처럼 여유로운 표정일 줄 알았던 그의 얼굴은……. 어딘가 미묘하게 무너진 얼굴을 하고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

16558454534427.jpg“전하, 오늘 어땠습니까? 전하의 가슴으로 기선을 제압…….”

쾅! 튼튼하고 화려한 마차 문이 부서질 듯 세게 닫혔다. 닐의 앞머리가 펄럭일 만큼 바람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이시지? 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치껏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전에 나갔을 때와는 정반대의 표정으로 돌아온 로아드네스의 심기를 거슬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허! 마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마차 안에 있던 로아드네스의 정신이 조금 선명해졌다.

16558454500876.png“말도 안 돼.”

로아드네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쿠키 꾸러미를 보며 중얼거렸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 창문으로, 어느새 더 붉어진 노을빛이 새어 들어왔다. 부글부글 끓는 용암 같은 눈동자가 빛을 받을 때마다 번쩍거렸다. [동부에는 유명한 제과점이 많아. 기념할 만한 날이면 제과점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은 쿠키나 푸딩 같은 것을 만들어 친구나 연인에게 선물하기도 해. 나도 더 건강해지면, 하녀들이나 유모와 함께 하나하나 재료를 골라 사고, 쿠키를 구워보고 싶다는 상상을 해. 만들 때도, 선물할 때도 달콤한 향기가 날 테니 행복할 거야. 언젠가 내 몸 상태가 좋아져서 직접 쿠키를 만들 수 있다면…… 네게 선물해도 될까? 맛있게 먹어준다면 정말 기쁠 거야.]  

16558454500876.png“말도……안 돼.”

자그마한 쿠키 꾸러미일 뿐이었지만, 로아드네스는 시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되뇌었다.  

16558454439804.png‘제가 태어나 처음으로 직접 만든 쿠키예요.’

  분명히 유혹은 자신이 했다. 노에비안의 정부는 분명히 그를 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순진한 구석이 있는 척 연기할지라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나 목까지 달아오른 얼굴, 가늘게 떨리는 몸까지 모두 연기할 순 없다. 그의 계획은 순조로웠다. 다른 여인들처럼 쉽게 유혹당한 노에비안의 정부는 자신이 가진 진짜 의도를 언젠가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여자의 수줍은 눈동자에서 아드리엔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로아드네스는 가파른 돌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거칠게 손으로 얼굴을 비벼보아도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들었던 심장 소리가 블리에 아카시아의 것만이 아니라면? 감히 자신을 쳐다도 보지 못하던 여자가 가슴에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리고 자신을 올려봤을 때, 그때 아드리엔을 떠올리지 않았나?

16558454500876.png‘……아니.’

떠올렸다.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엔을. 그런 얼굴로 노에비안을 바라봤을 아드리엔을. 별안간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죄 없는 시종을 닦달해 연거푸 술을 들이켠 것은 노에비안의 정부가 아니라 자신이다.

16558454500876.png“하.”

로아드네스는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구르는 쿠키 꾸러미를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16558454500876.png‘내가 지금 미쳐 있는 상태라는 걸, 인정했잖아.’

정확히 아드리엔의 죽음을 서쪽에서 접한 그날부터. 그의 감정이나 정신 상태는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블리에 아카시아에게서 자꾸 아드리엔이 보이는 것만 같은 환각 역시. 그 미친 상태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런데…….

16558454500876.png‘그 여자의 의도대로, 내가 자꾸 이렇게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점점 그 여자를 진짜 아드리엔의 대신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틸차드홀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과거 아드리엔의 편지와 블리에의 악의 없는 표정, 그리고 빌어먹을 쿠키 꾸러미 따위가 제 눈앞에서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쉴새 없이 굴러다녔다. 로아드네스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계획이 첫날부터 아주 완벽하게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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