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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다 (37/171)

37.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다2021.09.08.

16558454618874.jpg“마님, 아침부터 뭘 하시기에 그리 부산스러우세요?”

16558454618881.png“아무것도 아냐.”

아침 일찍, 나는 전서구까지 띄워 온 서신을 불쏘시개로 쓰고 있었다. 노에비안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황태자비의 시녀 자리를 거절해.」 아무런 설명도, 이해도 구하지 않고 단지 딱 그 한 줄만 적혀 있었다.

16558454618874.jpg“앞으로 큰일을 하실 분이! 이런 사사로운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라니까요!”

마지가 내 손에서 부지깽이를 빼앗아 들고 타다남은 종이까지 싹싹 긁어모아 벽난로에 쑤셔 박았다.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로, 입궁은 내가 하는데 마지가 더 들떠 있었다.

16558454618874.jpg“마님-. 마담 르블레아께서 오셨어요.”

요나가 상기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와 아뢨다. 불과 함께 타들어가는 노에비안의 서신을 보던 나는 도리스의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러 저택을 나섰다. *** 마차 안에서 내내 미묘한 표정이던 마담 르블레아는, 황궁에 다다라서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8454618874.jpg“부인, 부인의 부탁이라 황태자비 전하를 뵙긴 하겠지만…….”

16558454618881.png“알아요, 마담. 아까도 여러 번 말했잖아요.”

마담은 기본적으로 사업가이긴 했지만,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칭하며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외골수였다. 그녀가 그리할 수 있는 이유는, 론타가 아닌 카타리난 공국의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16558454618874.jpg“저는 론타에서 의상실을 개업한 이후로, 황태자비 전하를 꽤 오랫동안 먼발치에서 보아왔지만요. 정말! 전혀! 아무런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요. 전형적인 론타의 귀족 영애셨고, 차기 황후가 되신 지금도 그러하고요. 이미 이전에 잘 돌려 말씀드렸는데도, 부인께서 제 뮤즈라는 걸 어찌 아시고 이렇게 곤란하게 하시는지…….”

16558454618881.png“황태자비 전하께서 마담을 직접 지목한 게 아니라, 내가 마담을 신뢰하기에 함께 뵈러 가는 거예요. 주세타 자작 부인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군요. 전하께서 직접적으로 어떤 사람을 데려오라 명하지 않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마담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내가 자신을 돌려 칭찬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담의 말로는, 노우라가 황태자비에게 마담을 소개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지만, 그녀가 번번이 거절했다고 한다.

16558454618874.jpg“차라리 자작 부인을 위해 일해달라 했다면 적당히 했을 거예요. 하지만 황태자비 전하의 옷을 억지로 만들었다가 결과물이 안 좋으면…… 큰 벌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16558454618881.png“결과물은 걱정 말아요. 황태자비 전하를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디자인을 해줘요.”

16558454618874.jpg“……네?”

어느새 우리가 탄 마차가 웅장한 황태자비 궁 앞에 다다랐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지만 우리는 둘 다 일어나지 않았다.

16558454618874.jpg“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16558454618881.png“말 그대로예요. 그분께서는 지금 자신만을 위한 스타일을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16558454618874.jpg“그, 그럼요?”

마담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조금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16558454618881.png“제가 가진 것을 본인 것처럼 빼앗아 두르고 싶으신 거지요.”

크게 흔들리던 마담의 눈동자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번뜩이기 시작했다.

16558454618874.jpg“……제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로군요.”

그리고 이어 주먹을 불끈 쥔 그녀가 기사의 에스코트도 받지 않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16558454618874.jpg“주어는 없이 말했으니, 불경하다 하진 않으시겠지요?”

16558454618881.png“도와줘서 고마워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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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가 질릴 만큼 화려한 알현실로 들어서자 도리스와 노우라, 그리고 처음 보는 영애가 있었다.

16558454618874.jpg“오늘 면접은 형식일 뿐이니, 그저 티타임이라 생각하면 된답니다. 다른 시녀들과 서로 소개를 하는 시간이라 보면 되겠군요.”

노우라는 자신을 주세타 자작 부인이라 다시 소개했고, 처음 보는 영애는 자신을 시스코메틴 백작 영애라 소개했다. 티타임은 꽤 순조로웠다. 시스코메틴 백작 영애는 자신을 아이린이라 불러도 좋다며 이름을 허락했지만 주세타 자작 부인은 자신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 약간의 기싸움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나는 티타임을 가지는 와중에도 도리스는 물론 주세타 자작 부인까지 빠짐없이 관찰했다.

16558454618881.png‘나랑 비슷하잖아.’

나는 어제 나를 진득하게 훑어보던 주세타 자작 부인의 무리를 기억해냈다. 내 몸에 걸친 것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죽겠지만, 자존심 때문에 절대 물어보지 않는 듯 보이던 얼굴들을 말이다. 묘하게 고쳐 입은 티가 나는 드레스. 나는 곧바로 그것이 마담 르블레아가 나를 위해 디자인한 옷의 카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헐겁게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은 물론이고 귀에 건 것, 목에 건 것 하나하나 어제의 나와 매우 흡사했다. 기분 탓이라 여기기에도 민망할 만큼 똑같았다. 나는 찻잔만 어루만지는 도리스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58454618881.png“전하, 저번에 맡겨주신 일 말인데요.”

1655845468364.jpg“……아, 참 그랬죠. 그 창의적인 인재는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요?”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노우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도리스의 눈 역시 흥미로 반짝였다.

16558454618881.png“수도에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마담 르블레아를 아시나요?”

16558454618874.jpg“어머, 부인! 알다마다요! 마담 르블레아의 드레스를 입으려면 반년 전부터 예약은 필수예요! 전하! 전하께서도 아시지요?”

아이린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자 노우라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1655845468364.jpg“분명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군요. 그럼, 나 역시 반년쯤 기다려야 할까요?”

마담 르블레아의 고집을 아는 듯, 도리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16558454618881.png“오늘 저와 함께 입궁했는데, 만나보시겠어요?”

1655845468364.jpg“!”

내가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고, 알현실의 문을 다시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르블레아가 예의 능숙한 사업가의 얼굴로 알현실에 들어서자 노우라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 되었고, 아이린은 눈을 비비며 서서히 일어나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16558454618874.jpg“제국의 별을 이제야 뵙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마담 르블레아입니다.”

마담은 도리스와 노우라의 복장을 보고 눈이 세차게 흔들리긴 했지만, 노련한 사업가답게 동요를 재빨리 감췄다.

16558454618881.png“어떠세요, 비 전하?”

나는 수줍은 듯 웃으며 도리스를 향해 말했다. 미미하게 웃던 도리스는 마담 르블레아를 아래위로 훑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내게 답했다.

1655845468364.jpg“아무리 대공이라도, 유능한 인재를 곁에 두고자 하는 진심을 무시할 순 없을 거예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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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스는 어느새 마담이 가져온 디자인 북을 정신없이 살피며 말을 이었다.

1655845468364.jpg“축하해요, 부인. 오늘부터 정식으로 내 시녀가 되었으니 축하를 받아 마땅해요.”

  *** 다음을 기약한 마담 르블레아가 떠나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도리스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참이 또 지나서였다.

1655845468364.jpg“아, 오늘 이렇게 다 부른 이유는 절차상 아카시아 백작 부인의 면접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일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16558454618874.jpg“뭔가요, 비 전하?”

1655845468364.jpg“곧 엘라콘과의 일로 트로비카 대공이 수도를 떠나야 한답니다. 상 중에 있는 사람에게 일거리를 맡기는 게 썩 보기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지만 어쩌겠어요? 이 나라에 인재가 그리 없는 것을.”

도리스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16558454618874.jpg“어머, 그럼 트로비카 대공저나 묘지에 방문하는 조문객은 누가 대접하나요?”

1655845468364.jpg“아이린, 바로 짚었어요.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황실에서 임시로 사람을 보낼 예정이랍니다.”

황실을 대표해 황실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일. 꽤 명예로운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계속 얼굴이 흙빛이던 노우라가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듯 열렬한 눈빛을 도리스에게 보내는 걸 보면. 안타깝게도 도리스는 아예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1655845468364.jpg“그래서 말인데, 부인.”

16558454618881.png“네, 전하.”

1655845468364.jpg“나는 황후 폐하께 부인을 추천해 그곳에 보낼 생각이에요.”

16558454618881.png“!”

1655845468364.jpg“딱 일주일. 트로비카 대공저에서 조문객을 맞이하고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줘요.”

노우라의 돌처럼 굳어진 얼굴과 아이린의 놀란 얼굴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사교계의 정보통은 주세타 자작 부인이, 세력가의 힘은 아이린 시스코메틴이. 도리스는 블리에 아카시아의 무엇을 원할까?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는 도리스를 보며,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도리스가 좋아하는지 서서히 감이 잡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16558454618874.jpg“감이라도 좀 잡히는 게 있느냐?”

16558454745481.png“어떤 감 말입니까?”

삐딱하게 답하는 로아드네스의 태도에 황제 율리어스가 표정을 굳혔다. 수도에 와서 아비와 독대하는 것을 그토록 피하던 아들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파티홀에서 얼굴을 붉힌 이후로 독대는 처음이라 황제는 아들이 반가웠다. 반가운 제 마음과는 달리 로아드네스의 얼굴에는 얕은 경멸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황제는 침음을 삼키며 아들에게 말을 이었다.

16558454618874.jpg“부녀자 실종 사건 말이다. 이 일을 믿고 맡길 자가 너밖에 없다.”

16558454745481.png“수도경비대장과 황실기사단장의 봉급은 왜 주시는 겁니까?”

16558454618874.jpg“로안.”

16558454745481.png“제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좀처럼 말하지 않는 ‘휴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황제의 입이 다물렸다. 로아드네스 본인의 말대로,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어린 나이에 전장으로 나가 수도에 단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하고 굴렀다. 유일한 목적이었던 그의 첫사랑은 제 숙부와 혼인하여 지금은 세상에 있지도 않고. 그 내막을 익히 아는 황제는 미안한 듯 아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깎아놓은 듯 아름다운 옆얼굴은 쓸쓸함과 허망함으로 가득했다. 황제는 누구보다도 저 마음을 이해했다.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 생각했던 레티나 황후가 죽은 이후로 그도 한때 느꼈던 감정이었으니까.

16558454745481.png“그리고 제가 요즘 귀를 더럽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16558454618874.jpg“…….”

16558454745481.png“사람들이 아버지께서 그토록 제게 부탁하시는 그 사건의 피해자,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사실 아버지의 정부라 지껄이더군요. 모조리 혀를 뽑으려다가 아버지께 직접 여쭈어보아야 할 것 같아 이리 왔습니다.”

로아드네스는 이미 조사를 통해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제 아비를 향해 그리 말했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16558454618874.jpg“부탁한다.”

16558454745481.png“황실의 수치입니다.”

16558454618874.jpg“로안.”

16558454745481.png“어머니가 지하에서 통곡하실 겁니다.”

16558454618874.jpg“너도 언젠가는 아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황제는 회한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아비를 이해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16558454618874.jpg“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쿠로세다 남작 부인에게도 못 할 짓을 했다.”

회한에 젖은 목소리는 어머니, 레티나 황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은밀히 찾아달라 부탁한 그 ‘정부’를 향한 것이었다.

16558454618874.jpg“사람으로 인한 상실과 상처는, 또 다른 사람으로밖에 치료할 수 없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로아드네스는 불현듯 치솟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16558454745481.png“죽은 사람은 치료해야 하는 병 같은 게 아닙니다.”

16558454618874.jpg“로안.”

16558454745481.png“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 그런 것이 사랑 아닙니까?”

16558454618874.jpg“…….”

16558454745481.png“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한 게 아닙니다.”

노쇠한 황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흐려지고 굵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를 외면한 로아드네스는 테이블에 놓인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초상을 보고 얼굴을 마저 일그러뜨렸다. 반짝이는 금발. 요정처럼 아름다웠던 제 어머니, 레티나 황후와 비슷한 인상. 잇새로 거친 숨이 연달아 터져 나오고, 가슴이 씨근덕거렸다.

16558454745481.png‘진짜가 죽고. 대용품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자신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이 있나? 불현듯, 끝이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6558454618874.jpg“……나는 레티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쿠로세다 남작 부인 역시…….”

16558454745481.png“……듣기 싫습니다.”

로아드네스가 급기야 벌떡 일어났다. 황제는 아들의 장성한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레티나를 닮은 그 얼굴이 비난과 경멸로 물든 채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16558454618874.jpg“로안. 너 역시 언젠가는 이 아비를 이해할 게다.”

결국 로아드네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는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일었다. 이 제국에 사는 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빠진 사람들밖에 없다. 소리 없는 비난을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내던 로아드네스는 어떤 시종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복도 끝에 결국 우뚝 멈추어 섰다. 별안간 떠오르는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존재가 그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16558454745481.png‘내 눈에는 왜…… 도대체 왜…… 나는 그대가 아드리엔으로 보이는가.’

  불과 얼마 전에 그런 말을 한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로아드네스는 멈춰선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복도의 끝에는 그의 어머니, 죽은 레티나 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자애롭게 웃고 있는 레티나의 눈이 그를 향하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일었다. 그리고…….

16558454618881.png“……전하?”

거짓말처럼 그곳에서, 블리에 아카시아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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