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새로운 진실2021.09.11.
기가 다 빠지는 티타임 이후, 나는 퇴궁을 허락받고 황태자비 궁을 나왔다. 새로운 몸으로 이리 진득하게 사교활동을 한 건 처음이라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성과를 얻은 것은 틀림없다. 도리스의 신뢰를 아직 다 얻었다곤 할 수 없지만, 트로비카 대공저에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목표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 로아드네스에게 이 소식을 서신으로 전달할까, 하다가 들뜬 마음으로 2황자 궁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새로운 연인으로 가장했으니 내 방문이 영 어색하진 않을 테니까.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지름길로 가다가 나는 반짝이는 금발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로아드네스!’
어둡고 음산한 개방형의 회랑 끄트머리에서, 로아드네스가 거대한 초상화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초상화의 주인은 레티나 황후 폐하였다. 옛 황후궁의 건물과 연결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치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건장한 사내의 뒷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평소였다면 내 인기척을 금방 알아챌 텐데. 나도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다가갔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어머니의 초상 앞에 있는 이유는 뻔하지 않나. 그리고 불현듯, 나는 로아드네스가 항상 ‘죽은 사람’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드리엔을 그리워하는 모습만 보다가,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자 그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연민이 퐁퐁 솟아올랐다. 이 세계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가도, 로아드네스의 반짝이고 슬픈 뒷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가가서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전하?”
어둠 속에 있던 그의 등이 멈칫하더니 얼굴이 빛으로 반쯤 나왔다.
“!”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의 인간미 없을 정도로 완벽한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정면으로 보았다면 조용히 몸을 피했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말을 걸어버렸으니, 이대로 외면할 수는 없었다.
“괜……찮으신가요?”
“…….”
그는 일그러진 표정을 애써 지우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진 그를 내가 있는 이 햇살 아래로 데려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괜찮으시면…….”
“가던 길 가십시오.”
하지만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쉽게 그를 떠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그저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겹쳐 본 것일까. 누구라도 나를 끄집어내어 주길 바랐던 어린 날의 대공비 아드리엔의 모습이 그에게 보여서? 그저 그의 기분을 조금 더 낫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를 응시하는 눈은 찬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반대로 그의 눈가는 붉게 열이 올라 있었다. 눈물 없이 울고 있는 눈이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
낯선 로아드네스의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아주아주 차가운 얼음 결정처럼 내 가슴에 와닿았다.
차갑고, 아팠다. 그의 말대로 나는 지금 당장은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에게 도움만 받았지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이 없다.
‘아드리엔일 때 노에비안에게 아무것도 못 해줬던 것처럼.’
이렇게 건강한 몸을 가지고서도 고마운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상황이 갑자기 뼈아프게 와닿았다. 로아드네스와 나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그토록 좋아했다던 아드리엔. 그리고 그녀의 연적인 블리에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경멸. 혐오. 분노. 거부감. 나만 아는 진실을 가지고 둘러싸고 있던 방패가 모조리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나는 그에게 블리에 아카시아일 뿐이니까. 벌써부터 아드리엔을 잊게 해주기엔 역부족이겠지. 그런 내가 그를 도와주겠다는 알량한 연민이 우스울 법도 하다.
“죄송합니다, 전하.”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말을 건넸다.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그저…… 괜찮지 않아 보이셔서 돕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
“무례에 대한 용서를 바랍니다.”
나는 그를 향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다 올리지도 못하고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참고 있는지도 몰랐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블리에의 몸으로 들어와, 최근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나는 그를 연민할 자격이 없다. 지독하게 외로운 것은 그가 아니라, 나다. 그의 말대로 블리에 아카시아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서도 고마운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여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 가슴을 찢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블리에 아카시아가 떠났다. 로아드네스는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 섰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고서야 그는 손을 거두어 제 얼굴을 묻었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지독한 경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그 연녹빛 눈동자에 마음이 이끌리고, 저도 모르게 괜찮지 않다고 말할 뻔했다. 제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드리엔을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는 여자. 숙부의 정부라는 생각조차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예상치 못한 위로를 건네려는 사람을 붙잡고 괜찮지 않다고 말해버릴 뻔했다.
‘말도 안 돼.’
‘아드리엔을 닮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기도 전에, 로아드네스는 마음이 동해버렸다.
“말도 안 돼.”
소리 내 내뱉어진 음성은 귀에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얘, 괜찮니?’
‘무도회장은 저쪽인데?’
‘무슨 일 있니?’
매년 있는 신년의 가면무도회.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저히 참석할 마음이 들지 않은 그가 바로 이곳에서 홀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던 그날.
‘도와줄까?’
못마땅한 눈의 또 다른 연녹안의 소년과 함께 지나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소녀. 아카데미에서 보았던 바로 그 소녀. 소녀는 가면 속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가면 속 소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하찮은 색 필름으로 눈을 가린 가면이었지만, 소녀는 아드리엔이 틀림없었다.
‘도와줄까?’
로아드네스는 그때의 온 세상이 밝아지던 감정을 떠올림과 동시에 지독한 슬픔을 쏟아냈다. 이제는 다 자란 두 손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초상화에 머리를 기대고,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손을 뻗는 아드리엔을 보고 부끄러워 도망가듯 숨어버린 그날의 자신. 그리고 그때와 같은 장소에서 손을 내미는 블리에의 눈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던 자신. 둘 중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도와줘…….’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어서. 손 한번 내미는 것이 그토록 힘들어서.
‘얘, 괜찮니?’
‘괜……찮으신가요?’
괜찮지 않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로아드네스는 지금 전혀 괜찮지 않았다.
*** 드넓은 황궁을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역시 이 황궁에서 가장 익숙한 ‘작은 숲’이었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곳 말고 날 위로해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숲의 입구로 들어서려던 나는, 아무도 없어야 할 별궁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덩굴 속에 몸을 숨겼다.
“이놈아! 가던 길로 가야지! 전하는 오늘 여기 안 계신단 말이야!”
“월-! 월월-!”
“말대꾸하기는! 내가 네 주인님보다 더 자주 산책도 시켜주고 밥도 주는데 배은망덕하게…….”
“월! 월월! 끼이잉! 끼이이잉!”
“네 주인님 상태가 이상하다고 너까지……! 젠장! 야!”
커다란 개가 낑낑대며 짖는 소리와 함께, 개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빼꼼히 내민 나는 곧 익숙한 얼굴을 보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닐 경?”
로아드네스의 부관, 닐이었다. 그는 기다란 목줄을 채운 커다란 개를 데리고 별궁 주위를 돌아다니며 산책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때 그 개잖아……?”
“월! 월월-!”
닐의 모습이 멀어져갈 무렵, 컹컹대며 짖던 개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더니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어, 어어-? 이놈이!”
아차 하는 새에 줄을 놓쳐버린 닐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쫓아왔는데,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월! 월월-!”
코완을 닮은 털을 가진 그 개가 혓바닥을 길게 빼서 팔랑거리며 내게로 아주 해맑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어, 어어?! 조심하십시오!”
당황한 닐이 전속력으로 달려왔지만 어림없었다. 네발 달린 짐승은 그보다 더 빠르게 내게 달려와 나를 덮쳤다. 쿵, 소리가 날 만큼 주저앉은 나는 내 뺨을 미친 듯이 핥으며 낑낑대는 개를 붙잡고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코완! 코완!! 멈춰!”
닐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
그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 닿지 않을 만큼 내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었다.
“방금, 방금 이 개 이름이 뭐라고 했나요?”
“괜찮으십니까? 아니, 코완이 원래 이런 놈이 아닌데…… 무척 순한 편인데 이놈이 초겨울에 더위라도 먹었는지 갑자기 이쪽 별궁으로 저를 끌고…….”
당황했는지 날 보면 늘 경계의 눈빛을 하던 닐이 급하게 코완의 목줄을 주워 꽉 붙들고 횡설수설 말했다.
“이 개 이름이 코완이라고요?”
“예……? 예 코완입니다. 덩치는 이래도 아직 자기가 새끼인 줄 알아서……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말도 안 돼. 똑같은 황금빛 털을 가지긴 했지만, 코완은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데다 다리까지 절뚝이던 아주 작은 강아지였는데……! 노에비안이 코완은 트로비카 영지에 보냈다고 했는데! 나는 그제야 계속 낑낑대며 내 쪽으로 오려는 코완의 눈을 마주했다. 새카만 눈동자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여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코…… 완……?”
“월! 월! 월월-!”
개는 내가 자신을 알아봐 줘서 기쁜 듯 앉은 상태로 앞발을 치켜들고 짖었다. 코완이다. 분명, 코완이다. 털이 꽤 길게 자라고, 빛을 잃었던 털이 황금빛으로 윤기가 흐르고. 새카만 눈이 반짝이고, 잘 먹고 몸을 회복해 어엿한 성견이 된.
“이 개는 트로비카 영지에 있던 개가 아닌가요? 트로비카 대공이 데려왔나요?”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잡고 일어나라는 듯 주저앉은 내게 손을 내밀고 있던 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줄이 느슨해진 틈을 타, 코완은 겨우 일어나서 선 내 치맛자락에 볼을 비비며 낑낑대고 있었다.
“코완은 계속 우리 개황…… 아니, 로아드네스 전하의 개였습니다. 전하께서 거두신 후로 단 한 번도 이 황궁 밖을 벗어난 적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혹시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나는 나를 부축하던 닐의 손을 스르르 놓았다. 손끝에 걸리는 개의 황금빛 털은 무척 부드러웠다. 내 손에 털이 닿기 무섭게, 개가 내 손을 낑낑대며 핥았다. 하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 전체를 빠르게 돌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찌릿찌릿한 감각이 올랐다. 작은 숲의 안. 안이 기르던 코완. 코완의 주인 로아드네스. 혼란밖에 없는 진실이 번개처럼 내 몸을 관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