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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다시 태어난 듯 (43/171)

43. 다시 태어난 듯2021.09.29.

16558456637866.png“……안.”

나는 안 나오는 목소리를 겨우겨우 쥐어 짜내 다시 안을 불렀다. 멈춰버린 자세 그대로 로아드네스가 나를 보았다. 빛이 꺼져 있던 눈이 전등이라도 켠 듯 번뜩였다. 내 묘지에서 보았던, 그 반쯤 돌아버린 눈이었다. 나는 이미 덜덜 떨고 있던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혼자만의 심증이 로아드네스의 반응으로 완벽한 확신으로 굳어지자 나 역시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로아드네스의 목을 타고 앞섶을 다 적실만큼 줄줄 흐르는 피가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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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아드네스의 메마른 웃음이 춥고 어두운 허공을 갈랐다. 그는 커다란 손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 버석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쉴 새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8456637866.png“……안.”

16558456637885.png“그만.”

그에게서 나온 목소리는 무겁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안’이라는 애칭은 이 세상에서 오직 그와 아드리엔밖에 모르는 이름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별이 쏟아지는 겨울밤, 로아드네스는 차게 식어가는 몸으로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란 힘은 죄다 빠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마지막으로 생을 끝낼 수 있었다. 아드리엔을 향한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시신을 확인하고 무너진 마음, 그리고 아드리엔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와 마지막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모든 마음을 뒤로하고, 홀로 외로울 아드리엔의 곁으로 가는 길. 아드리엔이 그토록 그와 함께 오고 싶어 하던 별빛 언덕에서 숨을 끊는 것은 꽤 의미가 있었다. 하도 피를 많이 묻힌 손이라 아드리엔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굽혀진 무릎에 팔을 얹고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그는 안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곳이 천국이 아니며 자신을 미치게 하는 블리에 아카시아가 있는 현실임을 상기했다. 자신이 정말 미치고, 미치고, 또 미치다 못해 환청이라도 들은 걸까? 아드리엔의 시신을 본 순간, 자신이 혀를 깨물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을 할 수도, 저 여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느냐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것과 달리 흔들림 한 점 없는 블리에 아카시아의 눈을 보자 목구멍이 틀어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16558456637866.png“믿어 줘. 아니 믿어야 해.”

정말이지, 어떤 말도. 로아드네스는 덜덜 떨며 말하는 여자의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꿈 같았다.

16558456637866.png“안, 안 제발…… 믿어줘.”

결국 그는 커다란 손에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자,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이 솟구쳤다.

16558456637885.png“……차라리 꿈이라고 해.”

로아드네스는 몸을 들썩였다. 겉으로 보기엔 우는 건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이었다.  

16558456637885.png‘어쩌면 죽었다는 걸 너무 믿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 여자가…… 사실 본인이 아드리엔이라고 말해주길 미친놈처럼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런 병신같은 소원이나 빌고 있었으니 벌을 받는 게 틀림없다.

16558456637885.png“날 그만 미치게 만들고, 그냥 이대로…….”

눈물도 나지 않는 상태로 로아드네스가 흐느끼듯 말했다.

16558456637885.png“당신에게서 아드리엔을 보면서, 점점 미쳐가는 나를 보고 비웃고 싶은 거라면 마음대로 해.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절대로 아드리엔을 배신하지 않아. 나는, 절대로…….”

  *** 토악질을 하듯 중얼거리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에, 나는 결국 무너졌다.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절망하고 있는 로아드네스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16558456637866.png“안, 안…… 내가 아드리엔이야. 육체는 죽었지만, 내 영혼은 지금 이 몸에 있어.”

로아드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16558456637866.png“너는 미치지도, 나를 배신하지도 않았어. 나쁜 건 나야. 바보같이 속아서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줬던 나.”

로아드네스는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저으면서도 살짝 드러낸 눈을 내게서 떼지 못했다.

16558456637866.png“새벽에 갑자기 발작이 났고, 약을 삼켰어. 온 집안 사람들을 다 놀라게 하고……. 그렇게 죽었어.”

16558456637885.png“…….”

16558456637866.png“분명 죽었는데…… 숨이 끊어지는 감각이 폐부에 선명한데, 분명 그랬는데. 깨어나니 이 블리에 아카시아의 몸에 들어와 있었어.”

로아드네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껏 보아왔던 표정은 그 얼굴에 없었다. 아득히 가라앉은 시선이 내 얼굴을 절박하게 헤집었다.

16558456637866.png“네가 믿어주지 않으면…… 나는 정말 죽은 것과 다름없어.”

아무도 나를 오래 기억해주지 않을 거고, 아무도 죽은 내 감정 같은 건 신경 써주지 않겠지. 내가 슬프게 속삭였다.

16558456637866.png“안.”

나는 멀거니 나를 응시하는 로아드네스의 젖은 손을 꼭 쥐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항상 뜨겁던 손이 차게 식어 있었다.

16558456637866.png“내가 너무 바보 같고, 무뎌서 네가 안이라는 것을 몰라봤어.”

16558456637885.png“나는, 나는…….”

16558456637866.png“……아드리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이 허공을 배회하자 내가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16558456637866.png“아드리엔…… 그렇게 네가 날 불러줬잖아.”

16558456637885.png“!”

16558456637866.png“모두가 내가 죽었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모두가 나를 블리에라고 부를 때도…… 너만은 끝까지 내게 아드리엔이라고 불러주었잖아.”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직도 흐르고 있는 그의 피를 막아주었다. 로아드네스는 그런 나를 막지 않았다.

16558456637885.png“말도…… 안 돼…….”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비친 감정은 불쾌함이 아니었다.

16558456637866.png“블리에처럼 살아야 하는 내게, 네가…… 아드리엔으로 살고 싶게 했잖아.”

너무 놀라 잠시 들어갔던 눈물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떨궜다. 내가 환상이 아닌지, 이곳이 현실이 맞는지 고뇌하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이제 더 일그러질 수도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버석하게 메말라 있던 그의 눈가가 왈칵 구겨지더니 곧 뜨거운 눈물이 댐이 터진 듯 터져 나왔다. 다른 의미로 절박하게 변해버린 로아드네스의 눈을 본 나는 그대로 그에게 더 다가갔다.

16558456637866.png“……!”

동시에 로아드네스가 제 손을 잡고 있던 나를 끌어당겼다.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나는 순식간에 로아드네스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팔이 나를 강하게 옥죄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그를 목격한 나만큼이나 덜덜 떨고 있었다. 삼키지도 못한 울음소리가 그의 목 아래 언저리에서 절절 끓고 있었다. 이토록 누군가에게 절박하게 안긴 것은 처음이었다. 소리 없는 울음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숨이 막힐 만큼 끌어안긴 나는 내 목을 타고 흐르는 그의 눈물을 느끼자마자 그를 잠깐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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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하늘을 배경 삼아 별이 부서지듯 반짝이는 안이 내 눈앞에 있었다. 늘 관능적이라 생각했던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열렸다.

16558456637885.png“네가…… 정말로 죽어버린 줄 알았어.”

아.

16558456637885.png“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는데.”

아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정말 믿어 주는 걸까? 로아드네스가 나를 믿는 듯 이야기를 시작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16558456637885.png“네 결혼식이라도 갔었다면, 가슴을 죄다 도려내는 것 같더라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라도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병신 같은 생각만 하면서 매일 괴로워했어. 속삭이는 로아드네스의 젖은 얼굴은 가슴 속에 쌓여 있던 울분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16558456637885.png“네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매일 밤 잠들지도 못했어, 잠들면 꿈에서 네가 울었어.”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죽어갔어.

16558456637885.png“그리고 블리에 아카시아…….”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늘 넓다고 생각했던 어깨가 위태롭게 떨렸다.

16558456637885.png“이 여자의 눈에서 너를 볼 때마다…… 너를 만났을 때처럼 자꾸 돕고 싶고, 눈이 가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날 저주했어.”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16558456637885.png“네 시신을 확인하는 순간, 널 그렇게 춥고 어두운 지하감옥에 혼자 둬선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어. 그래서…….”

내가 따라가서 곁에 있어 줘야 한단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어.

16558456637885.png“그런데 네가, 네가…….”

16558456637866.png“안.”

안이라는 한 마디에 다시 왈칵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끝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16558456637885.png“별빛 언덕에 데려가 달라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계속해서 울먹이는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별빛에 반짝이는 눈물은 처연한 만큼 아름다워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6558456637885.png“……다행이야.”

아. 내가 상상하던 안의 목소리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제는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16558456637885.png“정말…… 다행이다. 내가…… 내가…….”

바닥을 기어가듯 낮지만 다정하고 감미로운, 그런 안의 목소리.

16558456637885.png“……널 저버린 게 아니라서.”

내가 다시 이끌린 게 너라서. 작게 읊조리는 그의 혼잣말이 내 모든 것을 부수고 으깨어 다시 만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시 내게 이끌리기 시작한 게 나를 배신한 게 될까 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의 거대한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질식시키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부서지고 으깨진 내 영혼을 정성스럽게 빚어 블리에 아카시아가 아닌, 아드리엔 피레타로 만드는 힘이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블리에 아카시아라 해도, 이 남자 앞에서 나는 아드리엔이 될 수 있었다. 그 어떤 연기도, 그 어떤 거짓도 말하지 않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았던 지독한 외로움이 저 머나먼 하늘 끄트머리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

16558456637885.png“노에비안 트로비카, 내가 죽여.”

16558456637866.png“!”

16558456637885.png“너는 이제 위험한 일에서 뒤로 빠져 있어.”

흠뻑 젖었던 얼굴이 얼어, 딱딱하게 굳은 로아드네스가 입김과 함께 내뱉은 말은 퍽 충격적이었다. 내가 간략하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한 이후였다. 무너지듯 앉아 있던 로아드네스는 내 팔을 아프지 않게 꼭 잡고 일어나 눈을 빛냈다. 동트기 직전,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엄지로 그것을 힘주어 쓰다듬는 로아드네스는 다른 의미로 모든 걸 끝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아주 약간만 고개를 끄덕인다면 금방이라도 명령을 하달받은 기사처럼 말을 타고 튀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과오로 안의 손을 더럽히고 싶진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까 봐 안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은 것인데.

16558456637866.png“도움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뒤로 빠져 있어야 할 건 너야.”

로아드네스의 고개가 곧장 내게로 돌아왔다. 일렁이는 눈은 아주 위태로워 보였다.

16558456637866.png“기만으로 가득한 사랑의 끝을…….”

내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로아드네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기만으로 가득한 ‘사랑’이 노에비안을 의미하는 것임을 그는 곧바로 눈치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로아드네스를 직시하며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16558456637866.png“어리석고 순진했던 내 지난 과오들을…….”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꽉 잡아 오는 로아드네스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16558456637866.png“……내가, 내 손으로 끝내게 해줘.”

떨리는 그의 손을 감싸며, 이번에는 내가 두 눈을 빛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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