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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생각하지 마 (44/171)

44. 생각하지 마2021.10.02.

우리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함께 있었다. 마부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별빛 언덕 아래의 마차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참 앉아 있었다. 건장한 몸을 구부리고 있는 로아드네스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나는 조용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그가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딱딱하게 말라붙은 피를 응시했다. 몸 안을 빠르게 돌던 피가 돌연 싸늘하게 식어갔다. 중요한 일들이 연달아 터져서 잠시 정신이 팔린 동안 잠시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뒀던 생각이 떠올라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로아드네스가 나를 따라 죽는 것, 혹은 자신을 경멸해서 죽는 것. 둘 다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로아드네스는 두 손을 관자놀이에 짚고 고뇌에 빠져 있으면서도 이따금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웃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나는 어찌 되었든, 이대로 대공저로 돌아가서 내 또 다른 목적을 이뤄야 한다. 로아드네스와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가 내게 보여준 거대한 사랑과 한때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노에비안의 배신이 첨예하게 내 마음속에서 양 갈래로 파도를 쳤다. 안에 대한 애틋한 마음,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지게 성장해 다가오는 그에 대한 이성적인 끌림. 그 모든 게 내 가슴속에 도장을 찍듯 뚜렷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노에비안과 청산하지 못한 빚이 있는 이상,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아직 없었다. 어쩌면 로아드네스 역시 그런 고민에 빠진 걸지도 몰랐다.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자가 가장 총애하는 아우인 2황자 로아드네스. 그런 로아드네스의 곁에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여자의 지위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레티나 황후께서 돌아가시고, 가장 의지하는 가족인 황태자의 곁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로아드네스가 가족들을 다 저버리고 아드리엔도 아닌 블리에 아카시아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온다고 한들, 내가 행복할까?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자 진실을 밝히고도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16558456844403.png“……하지 마.”

16558456844409.png“!”

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 심각한 표정을 했나 보다. 허리를 펴고 앉은 로아드네스의 눈이 나를 쏘아보듯 직시하고 있었다.

16558456844409.png“뭐, 뭘?”

내가 잘못을 했다 들킨 아이처럼 대답하자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나 내 앞에 섰다. 대공저에서 내어준 마차는 드넓고 커서, 장신의 그가 서 있어도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았다. 까마득히 높은 그를 올려다보자 버석 말라 있던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16558456844403.png“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거.”

16558456844409.png“내가, 내가 뭘 생각하는 줄 알고.”

16558456844403.png“……많이 참고 있으니까.”

분명히 내 정수리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나는 소리인데 마차 전체를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바닥부터 내 심장까지 찌르르 울렸다.

16558456844409.png“뭘 참는데?”

16558456844403.png“사냥감처럼 잡아다 놓고 팔다리를 꽁꽁 묶어서 사저로 가고 싶은 거.”

16558456844409.png“!”

‘사냥감처럼’이라는 말이 유독 크게 박혀 들었다. 론타에서는 다리가 긴 짐승을 잡으면 다리를 뒤로 결박해서……. 예기치 못하게 그를 마주했을 때마다 그가 내 뒤에서 팔을 결박했던 걸 떠올렸다. 하. 심각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탁, 풀어졌다. 그동안 나를 잡아야 하는 사냥감 취급했던 거라니……. 왠지 분해져서 그를 올려다보는데, 이미 로아드네스는 내 키에 맞춰 한쪽 무릎을 굽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구부리고 앉아도 그는 내 앉은키 보다 솟아 있었다. 새삼 그가 아주 많이 거대한 사내라는 게 느껴졌다.

16558456844403.png“그러니까 뭘 생각하는 거든, 멈춰.”

16558456844409.png“내가 뭘 생각하는 줄 알고…….”

16558456844403.png“이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

내가 잠깐 움찔하자, 로아드네스가 내 무릎에 손을 올리고 꽉 틀어잡았다. 아프지 않았지만 강한 힘이 느껴졌다.

16558456844403.png“사내놈 몸으로 옮겨가든, 말도 안 되는 짐승 같은 것에 옮겨가든 나는 상관 안 해.”

16558456844409.png“……갑자기 무슨 소리야?”

16558456844403.png“네 영혼. 아니, 너. 어디로 옮겨가든 상관없으니까…….”

단단해 보이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괜찮아진 게 아니었을까? 턱에 힘을 준 로아드네스는 눈에 보일 만큼 목에 힘줄을 바짝 세우고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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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56844409.png“뭐, 뭐 하는…….”

16558456844403.png“……그러니까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사라지려 하지 마.”

16558456844409.png“!”

16558456844403.png“첫 번째도, 두 번째도 너무 힘들었는데…….”

16558456844409.png“안!”

안이라는 이름에, 로아드네스가 곧바로 반응해 나를 더 세게 단단한 가슴팍에 가두었다.

16558456844403.png“나를…… 세 번이나 버리려 하지 마.”

바보같이 노에비안을 안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마음을 줘버렸던 일.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죽어버린 일. 그 두 번 다, 자신을 버린 것이라 표현하는 로아드네스가 가여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16558456844403.png“생각하지 마.”

16558456844409.png“!”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건지,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16558456844403.png“내가 다 생각할 테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꼼지락대지도 못할 만큼 세게 끌어안긴 통에, 나는 조금 숨을 가쁘게 쉬어야 했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내 귀에 또렷이 박혀 들어서 얼굴이 착실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16558456844403.png“……그냥 내 눈에 보이는 데 있어.”

  *** 마차가 대공저에 앞에 멈췄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내리지 않았다. 한참 끌어안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로아드네스는 담백하게 떨어져 맞은편에 앉아 날 감시하듯 보았다.

16558456844403.png“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너 하나 대공과 엮이지 않게 하는 건 일도 아니야.”

16558456844409.png“……도망이라도 보내려는 거야?”

16558456844403.png“널, 혼자?”

로아드네스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굳어 있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16558456844403.png“내가 데리고 가야지.”

16558456844409.png“황자 전하께서, 혼인해 남편까지 있는 귀부인을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하겠다는 거야?”

16558456844403.png“내가 하면 다들 그러려니 생각할 거야, 문제아니까.”

너무 진지한 얼굴이라 어이가 없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창밖으로 보이는 대공저로 잠깐 시선을 던졌다.

16558456844409.png“안.”

그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16558456844409.png“나는 내가 정말 아파서 죽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왜 죽었는지…….”

갑자기 목이 메왔다.

16558456844409.png“노에비안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알고 싶어.”

16558456844403.png“내가…….”

16558456844409.png“넌 못 해.”

우리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나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입을 뗐다.

16558456844409.png“노에비안은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잖아.”

16558456844403.png“…….”

로아드네스의 입이 곧장 다물리자 내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16558456844409.png“어떤 식으로든 네가 움직이면 너, 황태자 전하 모두가 불편해질 거야.”

로아드네스가 아무리 날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엔 이건 나의 싸움이다. 내가 밝혀내고 응징하지 않으면 절대 털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이 지리멸렬하고 지저분한 감정들을 깨끗하게 털어내지 않으면 아무리 안이라고 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16558456844409.png“이 일들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인 거지?”

16558456844403.png“……친구.”

로아드네스가 나를 응시하며 낮고 음산하게 되뇌었다.

16558456844403.png“……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조금 한기가 들었다.

16558456844403.png“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

16558456844409.png“뭐, 뭘……?”

16558456844403.png“그러니 날 이용해.”

16558456844409.png“!”

16558456844403.png“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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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아드네스가 대공저의 마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나도 왠지 숨이 막히던 마차 안의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공저로 함께 들어오려는 그를 겨우 뜯어말리고 돌아온 참이었다.

16558456966716.jpg“아침부터 어디를 그리 다녀오십니까?”

16558456844409.png“…….”

본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따라붙는 집사 가스팔에게 나는 말 없이 외투를 벗어 건넸다.

16558456844409.png“하녀들은 어디 있니, 요나?”

16558456966716.jpg“다들 방에서 쉬고 있어요.”

16558456844409.png“너무 오래 쉰 것 같구나.”

요나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하녀들을 데리러 달려갔다. 가스팔은 아직도 내가 외투를 맡기고 제 말을 무시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16558456844409.png“집이 분주한 것 같은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아침부터 묘하게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16558456966716.jpg“오늘 오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행차하실 예정입니다.”

16558456844409.png“황태자 전하께서? 왜 내게는 미리 언질해 주지 않았지?”

16558456966716.jpg“행차하신다는 기별을 아침에 받은 참입니다. 워낙 자주 오시기 때문에 대공저에서는 일상이기도 하고요.”

아. 응접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기 시작하는 하녀들을 보며,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16558456844409.png‘도리스가 날 굳이 대공저로 보낸 이유가 하나는 아닌 것 같아.’

황태자가 대공과 도대체 뭘 하는지 궁금한 거야.

16558456844409.png‘이유 없는 도움은 없다.’

굳이 턱도 없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대공비 자리로 들여보내려는 이유가 남편의 감시를 위해서라면? 나는 떨고 있는 하녀들 앞으로 걸어가 애니의 앞에 섰다. 가늘게 떨면서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꼴은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공손해진 모습이었다.

16558456844409.png“용케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다니, 고맙구나.”

애니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거칠거칠하고 새하얗게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던 애니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16558456966716.jpg“저, 저…….”

그리고 나는 뭐든 들어줄 것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16558456966716.jpg“정말 그곳에 시신이 있었나요……?”

16558456844409.png“어머, 넌 날 뭐로 보는 거니?”

나는 가스팔과 다른 사용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근처 소파에 몸을 묻어 앉았다.

16558456844409.png“그렇게 어두운 밤에 무섭게 내가 뭣 하러 시신을 찾아 뒤져보겠니? 생각해보니 이 저택에서 있을 날도 며칠 남지 않았고…….”

마지가 우려낸 차를 홀짝 마신 내가 귀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16558456844409.png“대공께서도 반기지 않으시는데 굳이 대공비 전하의 시신을 찾아 미움 살 필요가 없다는 걸 떠올렸지 뭐야. 그 시간에 대공저를 방문하는 대귀족들과 안면이나 트는 게 낫지.”

이전보다 확연히 기가 죽은 표정의 애니가 내 표정을 면밀히 살피는 듯 보였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애니의 무리를 훑어보았다.

16558456844409.png“돌아가신 주인에 대한 너희의 충성심은 꽤 인상 깊었단다. 그리 오래 버틸 줄은 몰랐어.”

움찔움찔 놀란 눈들이 모조리 내게로 향했다.

16558456844409.png“하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주인을 섬겨야 하지 않겠니? 앞으로도 협조한다면…….”

나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16558456844409.png“황후 폐하께 잘 아뢰어주마. 무슨 뜻인지 알겠니?”

신분 상승을 원하는 대공저의 악마들. 이들의 세 치 혀와 오지랖 넓은 눈과 귀를 이용하면 도리스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16558456844409.png“그리고 애니.”

16558456966716.jpg“예, 예?”

16558456844409.png“특히 너를 좀 더 큰일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당황으로 물든 애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럴수록 내가 더 짙게 웃었다. 아파서 끙끙 앓고 있을 때, 노에비안의 외투를 받아들며 내게 미소 짓던 애니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16558456844409.png“이것도 무슨 뜻인지 알겠니?”

주제를 모르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 안달 난 하녀는 쓰임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 후, 나는 하녀들에게 자유시간을 주었다.

16558456966716.jpg“마님, 애니가 대공저 밖으로 나가려 하는 걸 보았어요.”

요나의 속닥임에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상기된 얼굴의 애니가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입구로 향하는 게 보였다.

16558456844409.png“이대로 외출할게.”

16558456966716.jpg“네?”

16558456844409.png“황태자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돌아올 거야.”

그리고 나는 애니를 따라갈 준비를 마쳤다. 과연 애니는 이 소식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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