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입을 맞추기라도 할 듯2021.10.06.
상관이 출근하지 않은 집무실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닐은 웬일로 늘 집무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던 로아드네스가 없자 서둘러 창문을 열고 아침 햇살을 만끽했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혼자 맞이한 게 언제던가. 매일 술병 치우는 게 일이오, 아침부터 캐비넷에 처리해야 할 서류 대신 새로운 술을 채워 넣던 지난날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퍽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렇지, 이게 집무실이지.”
약간 쌀쌀하지만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집무실에 들어오자 날아갈 것 같았다. 주인 없는 집무실을 룰루랄라 닫아놓고 응접실에 앉아 여유를 즐기던 닐은 매일 아침의 시작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단꿈을 꾸고 있었다. 벌컥-! 좀만 더 느긋하게 출근해줬다면 좋았을 주군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파에 늘어져 쿠키를 오독오독 씹고 있던 닐은 갑작스러운 로아드네스의 등장에 허겁지겁 먹던 것을 정리하고 일어나 경례를 했다. ‘한가하게 뭘 처먹고 있느냐’는 말이 나와야 했는데, 흘끗 살펴본 로아드네스는 어딘가 넋이 나가 있었다.
‘휴.’
자연스럽게 밖에 있는 시종을 불러 먹던 찻잔을 처리하고, 입가에 묻은 쿠키 흔적을 털어낸 닐이 멍하니 서 있는 로아드네스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전하. 오늘은 침실에서 제대로 주무셨나 보군요.”
“전하?”
어느새 잔뜩 일거리를 가지고 들어온 빈센토 역시 경례를 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응접실 중간에 서서 허공을 응시하던 로아드네스가 그들을 훑어보더니 인상을 왈칵 구겼다.
“닐.”
“예!”
“저번에 가져간 것들은 다 어쨌나.”
“예? 무엇 말입니까?”
“아드……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내게 보낸 것들 말이다.”
배 속에 있지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찌 물으십니까?”
닐은 자신을 경멸하듯 훑고 있는 로아드네스에게 급하게 대꾸했다.
“다 내놔라.”
“하이고, 전하. 받자마자 홀랑 다 먹어버린 걸 어찌 달라십니까? 전하 단 것도 안 좋아하시잖아요? 배라도 열어 가져가시렵니까?”
“닐!”
방금 마지막 남은 쿠키까지 알차게 먹은 참이기에 괜스레 말이 길어졌다. 빈센토가 변명하는 닐을 보며 말리듯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집무실로 따라와. 배라도 열어서 가져가야겠으니까.”
진심으로 말하는 듯한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진지했다.
“저, 전하!”
“빈센, 빈센토! 자네가 뭐라 말 좀 해보게!”
“전하! 제게 푸딩은 남아 있습니다!”
빈센토가 급하게 소리치자 검을 뽑아 들 기세로 집무실로 앞장서던 로아드네스가 우뚝 멈춰 섰다.
“당장. 다 가져와.”
“다, 단 거 좋아하신다고 미리 말씀하시지. 하여튼 전하께서는 멋진 것만 하려고 하시니까…… 닥치고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로아드네스의 손이 검 손잡이에 닿기가 무섭게 투덜거리던 닐이 부리나케 부관들의 집무실 쪽으로 달려갔다. 짜증이 서린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예전보다 몇 배는 더 피곤해 보였지만 이상하게 요 며칠 중에 가장 좋아 보이기도 했다. 로아드네스가 집무실 책상에 기대서서 종을 대충 울리자, 곧장 시종이 튀어 들어왔다.
“세수할 물 가져와.”
“예!”
폐인처럼 살던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세수라니. 빈센토가 오랜만에 보는 주군의 깔끔 떠는 모습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하……!”
그리고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탁, 탁 풀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목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섰다. 한눈에 봐도 크게 다친 목이었다. 날카로운 검에 베인 듯한 상처. 피를 어찌나 흘렸는지 재킷 안에 감춰져 있던 셔츠 앞섶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입을 꾹 다물고 그새 시종이 가져온 금색 대야에 얼굴을 묻었다. 급히 구급상자를 찾아온 빈센토가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언듯 치명상처럼 보였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탓이었다.
“정신 사납게 왜 그래.”
“전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급습이라도 받으신 겁니까?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전하의 목을……!”
“내가 한 거다.”
“!”
섬뜩한 말을 한 것 치고, 로아드네스는 너무 담담하게 시종에게서 받은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말끔하게 세수를 끝낸 얼굴은 아침 햇살에 도자기처럼 빛났다.
“걱정 마, 죽으려다 실패했으니까.”
“전하!”
로아드네스가 아무렇지 않게 재킷과 셔츠를 벗고, 눈치 좋게 새 옷을 가져온 시종의 도움을 받아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는 옷을 갈아입었다. 설마설마했던 상처가 적나라하게 보이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빈센토가 황급히 소파에 몸을 묻은 그에게 다가갔다.
“피는 거의 멎은 듯 보이나 많이 벌어져 있습니다. 치료하셔야 합니다.”
“호들갑은. 이 정도로 안 죽는 거 알잖아.”
“보통의 인간은 그 정도로 의식을 잃습니다.”
시종이 챙겨 나간 옷가지에 묻은 피는 보통의 양이 아니었다. 로아드네스가 깊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길게 몸을 늘어뜨리자, 빈센토가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체만체한 로아드네스가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팔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감으면,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빈센토.”
“예.”
조용히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던 빈센토는 독한 약을 발라도 끄떡도 안 하는 주군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중이었다.
“지금 이거, 현실…… 맞나.”
“예, 전하의 피가 너무 잘 보입니다. 여기까지 걸어 오신 게 용할 정도로요.”
웬일로 멀쩡한 정신으로 있다 했더니 곧바로 실없는 소리를 하는 주군을 보며 빈센토가 답했다. 그때 닐이 집무실 문을 노크하더니 곧바로 튀어 들어왔다.
“전하, 가져왔습니다.”
“입 다물고 책상에 모조리 올려놔.”
“혹시나 해서 꽃바구니도 다시 가져왔는데 설마 이것도 필요하십니까?”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로아드네스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누워 있자, 닐이 대놓고 입을 삐죽였다. 빈센토가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그 모습을 보고 타박하듯 눈짓했다.
“아, 맞다. 그리고 오는 길에 들었는데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아차, 그 부인 소식은 다 무시하라고 하셨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책상에 꾸러미들을 올려놓은 닐이 재빨리 말을 정정하자 로아드네스가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걷어냈다.
“뭐지?”
“그쪽 동향을 살피기 위해 보내놓은 자에게서 온 기별입니다. 근데 그 부인에 관한 소식이라…… 그쪽에서 오는 소식은 다 무시하라고 하셨으니…….”
“이 놈 안 자르고 뭐 한 거야, 빈센토.”
“죄송합니다.”
아니, 이번엔 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억울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던 닐이 체념한 듯 약간 퉁명스럽게 말을 전했다.
“그 부인이 호위 없이 혼자 외출했다 합니다.”
“뭐?”
로아드네스가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하! 아직 치료가!”
“그걸 왜 이제야 말하지?”
새하얗게 질린 로아드네스가 낮게 욕을 씹어뱉으며 곧바로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가 너무 빨라,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뭐, 뭐야 이거? 빈센토, 전하께서 이번엔 좀 다르게…… 미치셨나?”
“닐!”
벙찐 닐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자 빈센토가 닐을 말렸다.
“호위 없이 나갔다는 소식에 왜 직접 나서시지? 이제 그쪽은 직접 안 살피겠다고 딱 잘라 다 거절하시더니 도대체…….”
심각하게 고민하던 닐이 곧이어 무릎을 탁! 쳤다.
“……호위가 없을 때 직접, 처리해 버리시려고?”
*** 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애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바로 보이는 전서국에서 애니가 제법 비장한 표정으로 나왔다. 나는 곧장 전서국으로 들이닥쳤다.
“여기. 하녀의 실수로 잘못 보낸 서신이 있으니 지금 보내는 서신들을 당장 대령하게!”
갑자기 들이닥친 나 때문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입구 직원은 곧이어 내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대공저의 마차를 보더니, 혼비백산해서 다가왔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렇게 고생을 시키다니.”
“부, 부인! 어쩐 일이십니까?”
“방금 서신을 보내러 온 하녀가 심부름을 잘못했네. 황실과 관련된 일이라 내 직접 이리 나왔네.”
나는 챙겨 나온 대공저 관리인 승인서를 보여주었다. 황후 폐하의 인장을 보고 퍼렇게 질린 얼굴의 직원이 서신 더미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서신 더미의 가장 위에서 애니가 보내는 게 분명한 서신 하나를 발견했다.
“……확인했네. 내가 착각을 한 것 같아.”
“예?”
나는 직원의 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황실의 뜻이네. 자네는 오늘 나를 못 본 것이고. 알겠나?”
커다란 눈만 끔뻑이던 직원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던 일 하라는 내 속삭임에 중요한 임무라도 하달받은 기사처럼 다른 직원들에게도 하던 일을 하라고 외쳤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조용히 전서국 밖으로 나왔다.
“하.”
다 비슷하게 생긴 봉투 중, 애니의 서신을 알아본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 그냥 넘어가기 힘들게 됐잖아.”
봉투를 봉한 밀랍의 인장이, ‘대공비’의 인장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장과 같은 인장을 가지고 있어야 전서국에서 서신을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러려면 내 신분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고.
‘내 인장을 쓰고 있었다고? 감히?’
게다가 그 서신의 수신지는 도리스의 아버지, 카스타냐 공작이었다. *** 한참 전서국 입구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건물을 벗어났다.
“부인-.”
“!”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사내 몇몇이 거대한 벽처럼 나를 에워쌌다.
“무슨 일이지?”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요즘 수도 치안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작저 기사 몇몇에게 몰래 수행하라 일러둔 참이었다.
“요즘같이 인신매매가 흔할 때, 대낮이라고 방심하시면 안 되지요.”
킬킬대며 웃던 복면의 사내 중 하나가 불쑥 더 다가왔다. 부녀자 실종 사건 이후로 모방 범죄들이 줄을 잇는다던데, 이런 대낮의 길거리에서 귀부인을 납치하려 할 만큼 심각했던가. 나는 숨어 있을 기사들에게 언제 신호를 보낼지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이게 웬 횡재야.”
“아름다운 귀부인이 혼자 외롭…… 아아아아악!!”
“뭐, 뭐야!”
불쑥 다가와 손목을 잡으려던 사내의 목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검 하나가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로아드네스!’
궁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나?
“으아아아아아악!”
순식간의 남자와 로아드네스의 위치가 바뀌더니 내 앞에는 그의 널따란 등만 보였다. 놈들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잘려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비명을 지르고 근처에서 물러났다.
“수, 수도 경비대다!”
“젠장!”
“……이런.”
바지까지 모조리 벗겨진 그들이 우왕좌왕하며 도망치지 못하는 틈에, 로아드네스가 몇몇 놈들을 발로 걷어차고 내 손목을 꽉 잡았다.
“로아드…….”
“쉬이-.”
로아드네스는 몰려오는 수도 경비대를 자신의 지위로 굴복시키는 순간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 귀찮아질 것을 예상했는지, 발걸음을 빨리했다.
“잡아라! 잡아!”
“도망치는 사람들도 잡아!”
얼떨결에 도망자 신세가 된 나는 로아드네스가 이끄는 대로 함께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평생을 황궁 안이나 아카데미, 전장밖에 몰랐던 로아드네스나 아파서 수도를 구경할 틈도 없었던 나나 둘 다 길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로아드네스가 곧장 으슥한 골목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곧장 붉은 망토를 짙푸른 색 안감이 보이게 뒤집어 그것을 내게 씌웠다.
“이쪽으로 갔다. 이쪽으로!”
“아냐, 저쪽으로 갔을 수도 있어!”
아이처럼 감싸져 로아드네스의 품에 안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우리 역시 서서히 밀착했다. 나는 로아드네스의 재킷을 잡아당겼다.
“아드리엔?”
나는 로아드네스의 망토를 벗어 되려 그에게 뒤집어 씌워주었다. 눈에 띄는 머리색은 내가 아니라 로아드네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단한 벽에 기댄 채 머리에 망토를 뒤집어 쓴 로아드네스의 목을 두 팔로 옭아매 살짝 끌어당겼다.
“저기 사람 그림자가 있다!”
“마저 확인해봐!”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로아드네스의 목을 더 끌어당겼다. 휘둥그레진 로아드네스의 눈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입을 맞추기라도 할 듯 바짝 다가간 내가 낮게 속삭였다.
“……저를 이용하세요, 전하.”
코와 코가 잠시 스치고, 입술이 서로 맞닿을 것처럼 훅 가까워졌다. 뜨겁고 향기로운 그의 날숨이 내 입술에 유혹적으로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