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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 손으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죄 (48/171)

48. 제 손으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죄2021.10.16.

황궁을 나와 백작저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사실 좀 긴장하고 있었다. 당장 대공저로 오라는 노에비안의 전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백작도 없는 백작저에서 노에비안을 막을 사람이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침실로 데려가 나를 취하려 한다면 그것을 막아줄 사람이 있을까? 노에비안의 성정이나 자존심으로 보아 여자를 그렇게까지 해서 강제로 안으려 하진 않겠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1655845804531.png‘잠깐 궁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황태자비 궁에는 시녀들을 위한 게스트룸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임시’였기 때문에 이용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쓸 수 있을 것이다. 뭘 챙겨가야 할지, 요나를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던 중 마차가 멈췄다. 열린 마차 문 쪽으로 의외의 인물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1655845804531.png“……로아드네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햇빛을 오롯이 받고 선 로아드네스를 보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랬다. 로아드네스를 볼 때마다, 나는 어린 날의 ‘안’과 여태 부딪혔던 오만한 ‘2황자’사이에서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6558458045323.png“입궁했는데, 내게 아무런 전언도 없길래.”

1655845804531.png“아.”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가? 고민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로아드네스가 손을 좀 더 가까이 내밀었다. 하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아서 신기했다.

1655845804531.png“손이 참 크다.”

16558458045323.png“?”

내가 손을 잡지도 않고 하는 말에 로아드네스가 황당한 얼굴로 제 손을 들어 살폈다.

16558458045323.png“……보통이라 생각하는데.”

16558458045344.jpg“크신 편입니다. 뭐든.”

로아드네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데, 불퉁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1655845804531.png“안녕하세요, 닐 경.”

16558458045323.png“닐. 말 보태지 마라.”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듯 보이던 닐은 로아드네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더니 시선을 내게 주었다.

16558458045344.jpg“아, 부인. 솜씨가 대단하시던데요. 제가 최근 몇 년간 먹어본 쿠키 중에 가장 맛이 좋은…….”

퍽-!! 로아드네스의 길쭉한 다리가 뻗어지더니 닐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순식간에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닐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내게 우는소리를 했다.

16558458045344.jpg“제가 이러고 삽니다. 부인!”

16558458045323.png“당분간 네 주변에서 호위하라 명했거든. 당분간이지만 모시는 분께 인사를 하는 게 기사도라며 개…… 헛소리를 하더니, 정신이 나간…… 온전치 못한 모양이야. 대신 사과할게.”

나는 거친 말투를 다듬느라 말을 고르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1655845804531.png“……그러니까, 내가 보낸 쿠키를 나눠 먹은 거야, 아니면 닐 경이 다 먹어버린 거야?”

순식간에 주위가 정적으로 휩싸였다. 로아드네스도, 닐도 그 순간만큼은 둘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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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8458045323.png“네가 생전 처음 만들었다는 쿠키는 아직 내 서랍에 있어.”

1655845804531.png“맙소사, 그걸 아직도 두었단 말이야? 벌써 상했을 텐데……!”

16558458045323.png“상관없어.”

1655845804531.png“상관 있어.”

16558458045323.png“내가 상관없어. 썩은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그냥 먹을 거야. 오늘 당장. 뭣하면 지금 함께 입궁해서 내가 먹는 걸 봐도 좋아.”

1655845804531.png“그냥 버려. 그걸 먹고 네가 배탈이라도 나면 어떡해?”

16558458045323.png“배탈? 난 단 한 번도 그런 하찮은 병에 걸려본 적 없는데.”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로아드네스는 백작저 근처의 카페로 향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나보다 더 굳어버린 얼굴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정리하자면 이유는 이랬다.

16558458045323.png‘그 쿠키가 죽은 나를 떠올리게 해서 괴로웠으며, 블리에가 구운 쿠키를 먹으면 내가 슬퍼할까 봐.’

1655845804531.png“네가 쿠키를 먹지 않고 버리는 것 보다, 내가 만든 쿠키가 널 아프게 하는 게 더 속상할 거야.”

속상할 거라는 말에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원래 저렇게 반응이 격했던 사람이었나.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무덤덤하고 완벽하던 얼굴이 1초에도 몇 번씩 변하니 신기해서 자꾸만 눈이 갔다.

16558458045323.png“……그래도 먹을 거야.”

마차가 금방 카페 앞에 도착하고, 로아드네스가 훌쩍 뛰어내려 내게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황가의 문양이 있는 마차가 도착했을 때부터 웅성거리던 주변이 조금 더 시끄러워졌다.

16558458045323.png“난 건강해서 그 귀여운 걸 좀 먹었다고 아프지 않을 테지만, 너는 네 쿠키가 버려지면 내색하지 않아도 혼자 슬퍼할 거야.”

1655845804531.png“아니야, 난…….”

16558458045323.png“넌 그런 애야. 아드리엔.”

1655845804531.png“!”

16558458045323.png“그런 애야, 넌.”

여리고 다정하지.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곱씹으며 괴로워하고. 이어서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따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굵은 목울대에서 눈물이 날 만큼 감미로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넌 그런 애야 아드리엔.

16558458045323.png“그러니까 난…… 네가 조금이라도 속상한 게 싫어.”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지만,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은 목소리라, 나는 잠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우리는 부러 주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로아드네스는 울듯 말 듯하면서 결국 울지 않은 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손을 움찔움찔했지만 결국 손을 거두었다. 나 역시 그의 손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을 거두고 엘라콘어 책을 내밀었다. 말없이 책을 받아든 로아드네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책을 훑어보았다.

16558458045323.png“혼자 다 끝낸 거야?”

1655845804531.png“응. 네가 예전에 레티나 황후 폐하의 초상 앞에서 내게 화냈던 날……. 그날 이후로 연락이 안 됐잖아. 혼자서라도 많이 공부했지.”

16558458045323.png“하나도 안 변했네.”

로아드네스는 그때 생각이 난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조금 미안한 기색이었다.

1655845804531.png“뭐가?”

16558458045323.png“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 와도, 넌 항상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려 하잖아.”

책을 덮은 로아드네스가 멀찍이 서 있던 닐에게 손짓했다. 닐이 책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중급 엘라콘어> 책이었다.

16558458045323.png“본격적으로 과외를 해주려고 했는데, 진도가 빨라지겠네.”

1655845804531.png“바쁘지 않아……? 무리하지 않아도 돼.”

16558458045323.png“바빠도 할 거야. 이 핑계로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너무 여상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탓에 나는 얼굴을 붉힐 시간도 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전혀 부끄럽지 않은 걸까?

16558458045323.png“굳이 공부를 핑계로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 온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1655845804531.png“……응.”

16558458045323.png“난 네 계획이 뭐든 적극 협조할 생각이야. 그게 네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만 한다면.”

로아드네스의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리는 손을 맞잡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5845804531.png“……노에비안의 입에서 나를 대공비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참이야.”

16558458045323.png“……뭐?”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식간에 온몸에 피가 빠져나간 것 같아 보였다.

16558458045323.png“대공…… 대공비가 되고 싶다는 말인가?”

로아드네스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충분히 화가 날 만도 했다.

1655845804531.png“노에비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도록, 너를 이용할 생각이야, 안.”

16558458045323.png“…….”

로아드네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쥐고 있는 그의 주먹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크게 움찔하던 로아드네스가 느릿하게 그 위로 시선을 옮겼다.

1655845804531.png“나는 네 협조를 얻을 생각이야. 그리고 황태자비 전하의 협조도.”

16558458045323.png“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1655845804531.png“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로아드네스가 잠자코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려주었다.

1655845804531.png“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게 죽일 수 있는지 물어봤던 것 말이야.”

16558458045323.png“!”

1655845804531.png“너한테 물었던 건 내 실수였어. 사실 어떻게 해야 그가 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는지 알고 있거든.”

16558458045323.png“알려주면 내가…….”

1655845804531.png“나만 할 수 있어.”

나는 로아드네스에게서 손을 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손을 거둬내고 자세를 반듯하게 할 때까지 그의 시선은 내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1655845804531.png“노에비안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 이해해. 황제 폐하의 이복동생으로서 살아남는 동안 무수히 많은 공적을 쌓아왔고 평생을 바쳐 얻은 걸 절대 잃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목이 바짝바짝 말라 식은 차로 입안을 적셔야만 했다.

1655845804531.png“그러니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정부 역시 이렇게나 숨겨왔고, 지금까지도 꼭꼭 숨기려 안달하는 거겠지. 제 명예에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16558458045323.png“…….”

1655845804531.png“지난 두 달간, 노에비안과 마주하면서 느낀 건…… 노에비안은 블리에를 생각보다 훨씬 많이 원하고 있다는 거였어.”

16558458045323.png“그래서?”

1655845804531.png“이미 자기 것이라 생각했던 내가, 자꾸 너와 엮이고 자신과 대치하는 황태자비 전하와 엮인다면 빼앗길 거라는 생각에 아마 뭐든 하겠지.”

그 ‘뭐든’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노에비안이 마음먹어서 이루지 못한 것은 없었으니까 뭐든 하려고 할 것이다. 이번에도.

1655845804531.png“내가 대공비 자리가 아니라면 곁에 있지 않겠다고 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를 그 자리에 앉히려 할지도 몰라.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16558458045323.png“그렇다면…….”

1655845804531.png“계속 무리수를 두다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을 돌리고 주위에 적이 많아졌을 때…… 그가 실각할 만한 결정적인 사건을 찾아 다시는 귀족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16558458045323.png“실각할 만한 사건? 예를 들면? 노에비안 트로비카 정도로 신임을 받는다면 반역이나 살인이 아닌 이상…….”

1655845804531.png“제 손으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죄 정도면 될까?”

16558458045323.png“……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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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찍이서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났다. 온갖 종류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6558458045323.png“방금, 그거 무슨 뜻이야?”

1655845804531.png“차기 대공비가 될 수만 있다면, 대공비의 집무실이든 노에비안의 집무실이든 들어갈 기회가 있을 거야. 그때 무엇이든 찾아낼 수만 있다면…….”

16558458045323.png“방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로아드네스는 급기야 가늘게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잇고 있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내 무릎에 두 손을 얹고 꽉 잡았다.

16558458045323.png“제 손으로 누굴 죽여?”

시뻘건 눈이 나를 태울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1655845804531.png“……불쌍한 아드리엔 피레타.”

16558458045323.png“아드리엔!”

1655845804531.png“결국엔 저가 정말로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16558458045323.png“아드리엔, 제발!”

1655845804531.png“……제 남편이 저를 죽이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테지.”

내 무릎을 붙잡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손 위로 흘리고 있는 줄도 몰랐던 굵은 눈물방울이 툭, 툭 떨어졌다.

1655845804531.png“……블리에 아카시아가 자기 일기장에, 그렇게 적은 걸 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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