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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반드시 그 새끼를 죽여야겠어 (49/171)

49. 반드시 그 새끼를 죽여야겠어2021.10.20.

로아드네스가 단숨에 한 손을 검집으로 가져갔다. 동시에 내가 그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내 손 아래에 있는 커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16558458457526.png“아드리엔…… 나는, 반드시 그 새끼를 죽여야겠어.”

온화하던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적당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실내지만, 우리 쪽에만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폭풍의 눈 속에서, 우리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로아드네스의 눈동자 주위로 실핏줄이 올올이 서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아마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16558458457531.png“좋아, 하지만…….”

나는 토기처럼 치솟는 묵은 분노를 꾹꾹 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16558458457531.png“내가 먼저 죽인 다음에.”

16558458457526.png“…….”

계속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던 로아드네스는, 이젠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금방이라도 말을 타고 달려 나가 노에비안의 목을 베어올 것만 같았다.

16558458457531.png“로아드네스. 네가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아.”

16558458457526.png“아니, 넌 몰라.”

로아드네스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16558458457526.png“넌, 정말 몰라 아드리엔.”

16558458457531.png“나 역시 처음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

내 손은 로아드네스의 떨리는 손등에서 검 손잡이로 서서히 옮겨갔다. 위치가 달라졌어도 손 아래 느껴지는 떨림은 여전했다.

16558458457531.png“생각해보면, 노에비안의 배신 자체에 절망한 게 아니었어. 노에비안이 나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함께했던 그 많은 시간들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더 큰 배신감을 느꼈던 거였어. 사실 그 많은 시간 대부분이 그와 함께한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16558458457526.png“진실은 변하지 않아.”

16558458457531.png“알아, 알아……. 하지만 두 달 동안 나는 지금의 상황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게 됐어.”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로아드네스의 뺨에 손을 갖다 대자, 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더 이상 고개를 젓지는 못했지만, 그의 뺨은 손 못지않게 떨리고 있었다.

16558458457531.png“내가 지금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기만으로 가득한 사랑을 진실이라 믿고 살아갔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이렇게 죽어서라도 진실을 아는 게 나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해.”

이미 죽어버린 것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나는 정말 그리 생각하기도 했다. 로아드네스가 차갑게 조소했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장이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16558458457531.png“나는 네가 있어서 괜찮아.”

16558458457526.png“아니, 너는 괜찮지 않아.”

똑똑히 기억해. 네가 아드리엔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동안 네가 상처받고 울던 모습이. 내 눈앞에 아직도 선명해. 로아드네스가 끊임없이 읊조렸다. 떨리는 턱이며 뺨은 그가 지금 나 때문에 얼마나 참고 있는지 여실히 알게 했다.

16558458457531.png“네가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지금 죽인다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겠지. 하지만 다음은? 그를 신뢰하는 네 아버지와 형님에게는 뭐라고 할 건데?”

16558458457526.png“아드리엔.”

차갑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로아드네스가 제 뺨을 쥐고 있는 내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16558458457526.png“나는 이미 제국 전체가 아는 문제아야. 누구 하나 죽인다 해서 실망했다는 말 같은 건 아무한테도 듣지 않아.”

서늘하게 빛나는 눈은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16558458457526.png“내가 그 어떤 큰 벌을 받더라도, 네 원수를 갚을 거야.”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억지로 내게 웃어 보인 로아드네스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게 살기가 가득한 사람을 마주한 건 처음이라 나는 온몸이 떨렸다.

16558458457526.png“닐에게 널 저택까지 호위하라고 할게.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끝? 무엇이 끝이란 말인가? 노에비안이 지금 이 세상을 등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고? 나는 닐을 부르려 손을 드는 로아드네스를 보자마자 그대로 일어나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널따란 등에 비해 잘록한 허리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16558458457531.png“안, 나는 네 손에 의미 없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그대로 굳어버린 로아드네스가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16558458457531.png“내 원수를 갚는 것이라면, 내 마음이 편해져야 하잖아.”

16558458457526.png“……아드리엔.”

단 한 번도 소리치지 않은 그의 목에서 낮게 쉬어버린 목소리가 거칠거칠하게 흘러나왔다. 내 팔을 힘주어 풀어낸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나를 돌아보았다.

16558458457531.png“그를 처단해서 네게 아주 약간의 피해라도 간다면, 내 마음은 전혀 편안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16558458457526.png“널 죽인 놈의 집에, 네가 다시 들어가는 걸…… 나는 두고 볼 자신이 없어.”

로아드네스가 억지로,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노에비안의 목을 베어버리면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블리에로 살아가야 한다. 모든 진실을 덮어두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게 정말 복수일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내 팔을 동아줄처럼 부여잡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올려다보았다.

16558458457531.png“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청할게. 제발 나를 믿어줘.”

네가 날 아드리엔으로 믿어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나를 믿어줘.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잖아.

16558458457531.png“……너라도, 너라도 내 말을 좀 들어줘.”

위아래로 가쁘게 오르내리던 로아드네스의 단단한 가슴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두 눈 가득 번들거리던 살기도 갑자기 확 줄어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로아드네스에게 다가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성애의 의미가 아니라, 그와 나를 동시에 위로하는 포옹이었다. 그는 나를 마주 안아주지 않은 채 가슴을 다시 몇 번이고 들썩이다가 겨우겨우 내 어깨를 감싸 마주 안아주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로아드네스의 따끈하고 단단한 몸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내 양어깨를 그러잡은 로아드네스는 온 얼굴에 힘을 잔뜩 주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8458457526.png“……기회가 온다면, 나는 그놈을 언제든지 없앨 거야.”

16558458457531.png“안.”

16558458457526.png“네가 뭘 걱정하고 바라는지 알아.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가 그러잡은 양어깨가 점점 더 뜨거워졌다.

16558458457526.png“……그땐 네가 뭐라 하든, 내 손으로 그 새끼를 죽일 거야.”

목에 핏대를 잔뜩 세우고도, 차마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를 향해 나는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그마저도 반대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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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황자 로아드네스의 궁은 간만에 몹시 분주했다. 파업 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굴던 예전과는 달리, 로아드네스가 집무실에 앉아 술만 마시고 있는 게 아니라 뭐든 가져오라 명했기 때문이었다. 닐은 결재할 서류가 산더미였던 차라 열심히 서류를 가져다 날랐는데, 어째 로아드네스는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도, 영혼이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16558458457526.png“멀뚱히 서 있지 말고, 내려놔.”

16558458549747.jpg“어디 편찮으십니까?”

16558458457526.png“닐.”

16558458549747.jpg“옙.”

16558458457526.png“앞으로 아카시아 백작 부인에게 절대 무례하게 굴지 마.”

16558458549747.jpg“제가 언제 무례하게 굴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아카시아 백작 부인에게 전하의 가슴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며 열심히 떠들었던 것이 떠올라 멋쩍었다.

16558458549747.jpg“예. 절대 무례하게 굴지 않겠습니다.”

닐은 바보가 아니었다.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심각했던 어제의 분위기. 화난 주군과 말리며 끌어안는 백작 부인. 뻔한 치정이 아니던가. 유혹하려다 유혹당하신 게 분명했다.

16558458457526.png“그리고 노에비안 트로비카 쪽이랑 블리에 아카시아 사이에 그 어떤 연결점이라도 좋으니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16558458549747.jpg“애인의 과거를 뒷조사하는 건 기사도에…….”

16558458457526.png“살인 사건이라 생각하고 조사해라.”

16558458549747.jpg“예?”

음산하게 읊조리는 로아드네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닐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눈만 끔뻑이다가 경례를 하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16558458457526.png“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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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아드네스가 답답한 듯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시종이 정성껏 매듭지은 것들이 단번에 흐트러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옆구리에 찬 검을 뽑아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16558458457531.png‘제 손으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죄 정도면 될까?’

  아직도 아드리엔의 목소리가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도저히 말릴 수도 없을 만큼 단단한 목소리로, 아드리엔은 분명 그리 말했다.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이미 죄인이었다. 실제로 노에비안이 죽이든 죽이지 않았든, 로아드네스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절망하던 아드리엔을 떠올리면 그랬다. 손에 쥔 검집과 자신이 끝낼 수 있게 믿어달라던 아드리엔의 목소리가 교차로 그의 숨구멍을 막았다.

16558458457526.png“빈센토!”

16558458549747.jpg“예, 전하!”

빠릿빠릿하게 들어온 빈센토를 향해, 로아드네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16558458457526.png“황제 폐하께 가, 폐하께서 원하시던 그 일을 내가 맡겠다 전해라.”

16558458549747.jpg“……!”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은 빈센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 실종사건! 빈센토가 어안이 벙벙해 황제의 집무실로 달려가는 사이, 로아드네스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어차피 자신이 아드리엔을 이길 수 있는 날은 평생을 가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외면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워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흔들어주는 수밖에. 그토록 제 손으로 끝내고 싶다는데, 도와주는 수밖에. ‘공을 세운 문제아, 2황자가 남편이 있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원한다.’ 그런 말을 블리에가 아닌, 황제나 자신에게 직접 들으면 분명히 더 큰 반응이 올 것이다. 꽁꽁 숨기고 기만을 반복하는 노에비안 트로비카. 남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2황자의 옆자리. 자신의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알 테니까. *** 전날 밤. 나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닐을 포함한 로아드네스의 기사 몇몇이 백작저 주위에 숨어 나를 지킨다고 했다. 다음날 오후, 나는 노우라가 황태자비 궁에서 주최한 티파티에 초대받았다. 블리에 아카시아가 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교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대부분 황태자파 주요 귀족들의 아내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 천지라 그저 황태자비와 노우라 근처에서 아이린과 함께 앉아 멀뚱멀뚱 듣기만 했다.

16558458549747.jpg“부녀자 실종 사건 말이에요. 용의자는 추려졌다던가요?”

16558458549747.jpg“아직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던데요.”

16558458549747.jpg“수도경비대장도 경질되고, 이래저래 황태자 전하께서도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비 전하.”

16558458549747.jpg“전하께선 그런 문제 말고도 업무가 많으시니, 꼭 그렇진 않으실 거예요.”

도리스는 이 자리에서 웬만해선 말을 섞지 않았고, 주로 주최자인 노우라가 황태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날름 받아 자기가 대신 대답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황태자비의 눈에 들고자 했던 부인들은 조금씩 골이 나 있는 상태였다.

16558458549747.jpg“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골이 나 있던 부인들 중 하나가 내게 질문했다. 부인들은 돌연 황태자비 도리스의 시녀 자리를 꿰찬 나에 대해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16558458457531.png“……글쎄요.”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황제의 정부라는 소문은 나 역시 최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도 성격도 모르는 부인의 실종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뭐라 해야 할까. 도리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해서 그녀가 나를 주시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16558458457531.png“잘 모르겠는걸요.”

16558458549747.jpg“부인.”

노우라는 그것을 성의 없는 태도라 생각했는지 약간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앞으로의 내 이미지에 아주 걸맞은 대답이었으니 노우라가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16558458549747.jpg“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영지에서 수도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잘 모르세요. 그렇지요. 부인?”

16558458549747.jpg“…….”

노우라가 은근히 나를 나무라려는 듯하자, 아이린이 나 대신 변명을 해주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내 추측이긴 하지만 아이린은 나의 이 ‘몸으로 하는 예법은 완벽하지만 입을 열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대화 스타일을 꽤 좋아하는 듯했다.

16558458457531.png“네, 하지만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께서 그 사건을 담당하실 거라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곧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까요?”

로아드네스를 걸고넘어지자 순식간에 티파티의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나는 보란 듯 노우라를 응시하며 말했고, 그녀의 표정은 꽤 묘해졌다. 가십에 밝은 노우라가 로아드네스와 내 관계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아침 가십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로아드네스와 내 초상을 기억했다. 어제 카페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던 모습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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