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 일에서 빠져줘요2021.10.23.
“승전기념식도 그렇고, 황태자 전하의 탄신연에서도 그렇고 요즘 2황자 전하를 파티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좋긴 해요.”
“역시, 성년이 된 지 꽤 되셨으니, 혼기가 찬 영애들을 직접 보고자 하심이 아닐까요?”
이미 남편이 있는 부인들은 아쉬운 듯 한숨을 흘렸고, 아이린처럼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영애 몇은 끄트머리 자리에서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몇몇 가십에 밝은 귀부인들은 나를 흘끔거리기도 했다.
“황태자 전하의 탄신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카시아 백작 부인께서는 그날 샤프롱으로 트로비카 대공과 함께 계셨지요?”
“기억이 나네요! 슬픔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셨을 텐데 가신이신 아카시아 백작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리하신 거라고…….”
“부인, 실제로는 어떤가요? 트로비카 대공 전하 말이에요! 다들 다가가기 힘든 분이라 하던데…….”
나는 로아드네스 이야기를 할 때만큼 흥미로 반짝이는 눈들을 둘러보았다. 도리스 역시 내 대답이 궁금한 듯 차를 홀짝이는 척하면서 시선을 주었다.
“……가면을 쓰신 것 같달까요.”
“가면이요?”
“무슨 가면?”
지독한 위선자의 가면이지. 죽은 아내의 장례도 끝나기 전에 정부와 입을 맞추려 한 주제에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는 다신 없을 관대한 주군으로 보이고 있는데.
“차가운 가면을 쓰고 계시긴 하지만, 내면에 상처가 많은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에 대한 환상을 증폭시키는 듯한 말에 귀부인들의 표정이 묘하게 상기되었다. 내 대답을 들은 귀부인들은 호들갑을 떨며 누가 차기 대공비가 될지 궁금하다며 또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차기 대공비.’ 로아드네스의 이름을 곱씹어보던 입속이 이번엔 새카맣게 태워진 기분이 들었다. 내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노에비안의 다음 옆자리를 궁금해한다. 기만으로 가득한 사랑도 그 순간에는 사랑이었나보다. 이토록 입안이 쓴 것을 보면.
“워낙 애처가로 소문이 나신 분이니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를 잊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시겠지요?”
“이건 전해 들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본래 전시되었어야 할 대공비 전하의 시신을 저택에 들이시는 것도 황제 폐하께 열과 성을 다해 부탁하셨다지 않았나요?”
“아내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간곡히 부탁하셨다던데요.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아끼시는 아우님인 대공 각하의 부탁을 거절하실 수 없었다고…….”
유달리 말이 많은 귀부인 하나가 별반응이 없는 도리스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반짝이는 눈을 한 귀부인들에게 입을 열었다.
“그것을 두고 또 가십이 생겼는데 말이지요. 물론 정말 ‘가십’일 뿐이지만…….”
“뭔데 그래요?”
“대공께서,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의 시체와 마주하며 식사를 하신대요!”
“에이! 설마요!”
“주무실 때도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잠자리에 드신다는 말도 있고요.”
“최근은 장례 기간이라 저택에서 잘 안 나오시기도 하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세기의 로맨티스트인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정부에게 입을 맞추려 하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몸을 섞겠다며 선전포고도 했는데. 나는 입이 근질거려 미칠 것 같았지만, 나를 훑어보는 귀부인들과 도리스의 시선을 느끼며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 티파티가 일찍 파하고, 우리는 도리스와 함께 황태자비 궁으로 들렀다. 노우라는 도리스에게 사신단에 대한 정보가 듣고 싶었던지 연거푸 질문했다.
“황후 폐하께서 분주하시겠어요.”
“엘라콘에서 사신이 오는 것은 오랜만이니까요.”
“사신단이 곧 오는 건가요?”
잠자코 있던 내가 처음 내뱉는 질문에 노우라의 싸늘한 얼굴이 나를 직시했다. 당연한 것도 모르느냐는 얼굴이다.
“당연히. 대공께서 직접 엘라콘까지 다녀오셨는데요. 엘라콘의 고위 귀족이나 왕족이 답례로 제국을 방문하겠죠.”
“그렇군요.”
나의 산뜻한 대답에 더 기가 질린 듯 노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저 아무 생각 없는 꼴 좀 보라는 듯 도리스를 향해 눈을 똥그랗게 뜨는데 도리스가 오히려 나를 향해 퍽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황후 폐하께서는 본회의장을 새로 꾸미느라 정신이 없으셔서, 이번 환영식 행사는 제가 맡기로 했답니다.”
노우라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곧바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이번 행사를 진행하시는군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데…….”
“맡겨만 주세요, 전하!”
“나도 이제 시녀뿐만이 아니라 보좌관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전하……!”
노우라의 드글드글 야망으로 끓어오르는 눈동자가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려 해요. 물론 아이린 영애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으니 무리가 있을 듯해서, 여기 계신 두 분을 돕는 역할이면 족할 것 같고 말이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준다면서도, 도리스는 내게로 은근한 시선을 주었다. 진한 녹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도리스가 내게 먹으라고 대놓고 주는 먹이구나.’
그녀가 내게 약속했던 대공비 자리를 위한 발판이 될 먹이.
‘엄청난 기회다.’
맹추같이 굴며 여러 정보를 수집하려는 계획을 나름대로 세웠지만, 일처리를 맹추같이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시녀의 일도 일이지만,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열어 도리스의 눈에 들어 그녀의 보좌가 된다면…….
‘지금의 내가 감히 보고 들을 수 없는 정보까지 손을 댈 수 있게 될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사의 주관은 본래 황후나 황태자비, 또는 그와 비슷한 지위를 가진 대공비의 주업무. 몸이 약해서 한 번도 참여한 적은 없었지만, 나는 언젠가 노에비안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대공저 서재에 있는 행사 관련 책들은 모조리 다 읽은 전적이 있다. 안주인 없던 내 친정에서 비앙카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른 적도 있고 말이다.
“기대할게요.”
대공비로서는 아니지만, 드디어 그 노력들이 빛을 발하게 될지도 몰랐다. *** 다음 시즌에 데뷔탕트를 치를 예정이라 바쁜 아이린이 사라지자 퇴궁길에 노우라가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 나 좀 봐요, 부인.”
“좋아요.”
흔쾌히 대답하고 주세타 자작저의 마차를 얻어탔는데 내 예상보다 분위기는 싸늘했다. 신경 쓰려 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노우라와 마주치는 시선에 나는 흠칫했다. 황궁을 나와, 수도 중앙 광장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에스코트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우리는 중앙 광장 근처의 디저트 숍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부인!”
“3층.”
“비어 있습니다!”
머리가 반쯤까진 사내 하나가 굽실거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3층은 오로지 테라스 형태의 자리뿐이었는데 하나같이 어두운 암막 커튼을 가지고 있어 커튼을 드리우면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비밀공간이 되었다.
‘수업하기 딱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부터 드는데, 그제야 나는 방금 들어선 이 테라스 자리에서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로아드네스와의 만남 장소인 「레스토란테 젠디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로아드네스를 떠올리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대로 돌아가고, 로아드네스 역시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을 텐데.
“내가 항상 먹는 것으로 주인장이 가져올 텐데,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것으로 내어오라 해도 된답니다.”
“네, 그럴게요.”
사양하지 않는 나를 보며 노우라가 다시 가늘게 눈을 뜬다. 나는 수도 사교 행사에 자주 나서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주요 귀족들의 이름이나 계보 정도는 외워두었다. 주세타 자작가는 오직 노우라의 정보력과 그녀가 운영하는 보석점으로 가세가 기울던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도리스의 최측근이니만큼, 그녀가 이렇게까지 내게 보이는 ‘적대감’의 이유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부인과 친해지고 싶어요.”
“네, 저도요.”
전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거울을 비추듯 비슷하게 답했다.
“기사단에도 선배 기수가 있고, 후배 기수가 있지요.”
“…….”
“이 제국에서도 혼인한 귀부인들이 미혼의 영애들에게 공경을 받고요.”
“네.”
“이번 엘라콘에서 사신이 오면, 그 행사를 황태자비 전하께서 주관하신다는 말도 분명히 함께 들었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뻔한 말들로 나를 교육하려 하는 걸까.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에서 빠져줘요.”
“왜죠?”
그녀에게 이어서 질문하려는데 돌연 디저트를 들여오는 직원들의 등장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노우라는 차를 따라주려는 직원을 물리고 자신이 직접 내게 차를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예요. 나는 이 일에 내 운명을 걸었어요.”
“……그게 조금 전에 말한 혼인을 한 귀부인들이 더 존경받는다는 말과 무슨 관계인가요?”
찻잔에 매끄럽게 담기던 찻물 줄기가 잠시간 바르르 떨렸다. 노우라는 어떻게 그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냐는 듯한 표정을 내게 감추지 않았다.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가 된 건 아이린 영애보다도 내가 먼저예요.”
“그게 왜 제가 빠져야 하는 이유가 되나요?”
나는 도리스의 ‘신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도리스가 내게 무슨 일이든 맡겼을 때 잘 해내서 내 쓰임을 증명하고 노에비안을 무너뜨릴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지. 솔직히 노우라의 ‘이 일에 내 운명을 걸었다.’라는 말은 내게 와닿지 않는다. 내게는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노우라가 원하는 대로 이 일에서 절대 빠질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로아드네스가 언제 노에비안을 죽여버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를 믿어달라 부탁했으니, 나 역시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역시, 귀족의 언어로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직접적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군요.”
노우라가 경멸에 가득 찬 얼굴로 내게 쏘아붙였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꼴을 보기 싫다는 거예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따뜻하게 김이 올라오는 두 개의 찻잔과는 달리 노우라의 눈은 말 그대로 얼음과도 같았다. 그녀는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인, 가장 먼저 여쭤본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셨잖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나를 공격하려는 자들에게는…….
“그게 아까 처음 언급하신 기사단이나 기혼의 귀부인들 어쩌고와 무슨 관계죠?”
맹추같이 구는 것이 최고였다.
“……연장자를 존중하라는 뜻이에요. 먼저 들어온 나를 존중하라는 뜻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기사단도, 아직 미혼의 영애도 아닌걸요.”
노우라는 식어가는 찻잔에 손을 내밀 생각도 없이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 경고를 하려 했던 것 같은데 도저히 말을 알아먹지 못하자 기가 차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제 남편인 아카시아 백작님이 부인보다 더 연장자예요.”
나는 눈치라는 건 깜빡한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노우라 주세타는 정말로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굳이 따지자면 남편의 지위도, 나이도 부인보다 제가 높은걸요.”
그리고 나는 이 부인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