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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대공비 자리에 관심이 있을 때 (51/171)

51. 대공비 자리에 관심이 있을 때2021.10.27.

노우라는 그날 이후로 내게 단 한마디도 걸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그렇게 각자의 계획대로 행사를 준비하다가, 행사식 전날의 황태자비 궁.

16558458952605.jpg“전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도리스의 깊은 한숨 소리가 조금 떨어진 우리의 테이블까지 들렸다.

16558458952605.jpg“뭔가 저희가 더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16558458952616.jpg“고맙지만, 아마 여기 있는 누구도 이건 도와줄 수 없을 거랍니다.”

나는 눈치 빠른 아이린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도리스를 살폈다. 그녀의 눈 밑은 피로 때문인지 시커멨다.

16558458952605.jpg“무엇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노우라의 야망 어린 눈이 도리스를 향했다. 그러자 도리스가 피식 웃으며 자신이 보던 메모장을 우리에게 보였다.

16558458952605.jpg“엘라콘어 공부를 하시네요?”

16558458952616.jpg“이 쓸모없는 엘라콘어를 내가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황후 폐하께서야 본인의 아드님을 잘 돌봐준 엘라콘 사신에게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어 익히신다지만, 나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차갑게 말하면서도 도리스가 메모장에서 눈을 떼지 않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금세 새로운 종이에다가 깨끗하게 그것을 옮겨썼다. 여러 번 써서 지저분해진 글씨들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16558458952605.jpg“와- 찍어낸 것 같은 글씨네요, 부인!”

아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동안 갈고닦은 엘라콘어를 본연의 우아한 글씨에 맞추어 써 내려갔다. 이번에는 도리스의 눈까지 꽤 커졌다.

16558458952616.jpg“부인이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어디서 배웠어요?”

1655845895264.png“……집에 엘라콘어를 할 줄 아는 하녀가 있어, 심심할 때 배웠답니다.”

하녀가 로아드네스라고는 할 수 없어 그저 웃자 도리스가 구원자라도 본 듯 내 팔을 다정하게 끌어당겼다.

16558458952616.jpg“좋아요. 부인. 행사를 잘 치르건 못 치르건 상관없이 사신단 접견 때 내 곁에 꼭 붙어 있어요.”

1655845895264.png“네?”

16558458952616.jpg“어차피 통역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엘라콘에서는 제2외국어로 제국어를 배우니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어요.”

1655845895264.png“그런데 왜…….”

16558458952605.jpg“통역을 하는 자는 사내에다가 늙수그레하니 젊고 아름다운 황태자비 전하의 뉘앙스가 잘 전달되지 않을 테지요.”

눈치 빠른 아이린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도리스가 큰 시름을 덜었다는 표정으로 메모장을 슬그머니 테이블 멀리 밀어놓았다.

16558458952616.jpg“부인이 그날 내 입이 되는 거예요.”

한마디로 이제 막 기초엘라콘어를 뗀 내가 황태자비의 입이 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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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신단 환영식은 생각보다 가벼운 분위기였다. 황제 부부는 사신단 대표와 바로 본회의장으로 향하고, 남은 이는 수행원들뿐이었다. 대단한 인맥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노우라의 기세가 줄어들자 오히려 내 마음은 편했다. 나는 도리스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건네야 하는 인사말이나 감탄사를 바로바로 속삭여주었다. 제국의 황태자비가 직접 엘라콘어로 인사말을 하자, 사신단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더니 그 곁을 지키던 내게까지 관심을 주었다.

16558458952605.jpg“불러주셔서 감사…….”

16558458952605.jpg“엘라콘과…… 양국의 친선을 위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내 귀에 엘라콘어가 생각보다 아주 잘 들린다는 것이었다. 회화는 거의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통역관 곁에 바짝 붙어 뜻을 물어보려던 계획이 어긋났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모르겠지만, 아드리엔이던 시절에는 외계어같이 들리던 그 말들이 이상하게 론타의 한 방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전체적인 뜻이 유추되어 머릿속에 들어왔다.

1655845895264.png‘블리에는 본래 엘라콘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블리에가 단순히 엘라콘어를 좀 잘했던 게 아니라 애초에 엘라콘 출신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16558458952616.jpg“블리에, 이제 좀 쉬어도 좋아요.”

1655845895264.png“네?”

도리스는 사신으로 온 사람들 중 몇몇이 내게 관심을 갖자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다.

1655845895264.png“……알겠습니다, 전하.”

16558458952616.jpg“춤이라도 좀 추고 오는 건 어때요?”

1655845895264.png“춤이요……? 아.”

도리스가 친근하게 내 팔을 잡으며 은근히 눈짓한 곳에는 노에비안이 있었다.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문득문득 내게로 향하는 시선이 빛나고 있었다.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은, 노우라의 것만이 아니었나 보다.

16558458952616.jpg“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부인의 데뷔탕트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샤프롱이 보증하는 파트너니 뒷말 없이 다가가기엔 지금이 딱 아닐까요?”

슬며시 내 등을 밀어주는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16558458952616.jpg“가서 대공의 화를 풀어줘요.”

1655845895264.png“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16558458952616.jpg“2황자 전하와의 스캔들은 거짓이라고요.”

1655845895264.png“!”

나는 깜짝 놀라 내 뒤에서 속삭이는 도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도리스도 가십지를 읽었나?  황실에 가십지 같은 게 들어올 리 없으니 어쩌면 노우라의 입을 통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딱딱하게 굳은 채 도리스의 손길을 따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홀이 소란스러워졌다.

16558459013042.png“부인, 파트너는 쏙 빼놓고 홀로 활약하고 계셨더군요.”

예상치 못한 로아드네스의 등장이었다. ***

1655845895264.png“어떻게 왔어?”

16558459013042.png“황제 폐하와 면담이 있어서 기다리던 중에.”

우리는 구석에서 잠시 속닥였다. 로아드네스의 눈은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노에비안에게로 곧장 향했다.

16558459013042.png“뻔뻔한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군.”

1655845895264.png“로아드네스!”

아름다운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에 내가 기겁해서 낮게 소리치자 그제야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16558459013042.png“폐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한 가지 하고, 너를 달라 청해볼 생각이야.”

1655845895264.png“……뭐?”

16558459013042.png“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어. 저 개자식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하려 하면 그게 방패가 되어줄 테니.”

1655845895264.png“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이혼하지 않은 나를 무슨 수로? 게다가 내 신분이…….”

16558459013042.png“다시 가봐야 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1655845895264.png“잠깐, 이대로 간다고?”

16558459013042.png“아드리엔.”

자세히 묻고 싶어 붙잡는 내게, 줄곧 굳은 표정이던 로아드네스가 억지로 웃어주었다.

16558459013042.png“……나는 두 번 다시 널 놓치고 싶지 않아.”

1655845895264.png“안?”

16558459013042.png“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다시 어둑한 시선으로 노에비안을 보던 로아드네스가 그가 보란 듯이 내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시선은 노에비안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아드네스는 어딜 가든 주목받았고, 그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어딘가 조급하고 불안해 보이던 로아드네스가 다시 사라지자, 나는 그의 숨결이 닿았던 손등을 꼭 눌렀다. 로아드네스의 입술은 내 손등에 완전히 닿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블리에 아카시아의 손등에 내 입술이 닿으면 네가 슬플까 봐.’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았다.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견디고, 세차게 뛰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꾹 누르며 고개를 들자 노에비안의 서늘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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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금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않고, 그를 향해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 작은 소란이 있고도 첫날 행사는 마무리가 잘 되었다. 로아드네스가 다녀간 이후, 도리스의 시선이 묘하게 싸늘해졌지만 노에비안을 신경 쓰느라 바빠 그녀를 제대로 살필 정신도 없었다.

16558458952605.jpg“마님! 한참 기다렸어요!”

1655845895264.png“생각보다 일찍 와 있었구나. 파티는 늦게 끝날 것 같으니 천천히 오라고 전갈을 보냈는데.”

16558458952605.jpg“일찍 와서 황궁 구경 좀 해보려 했더니, 너무 어둡고 넓어서 포기했지 뭐예요-.”

홀에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나가 나를 에스코트하면서 마차 쪽으로 갔다. 누가 어떤 옷을 입었더라, 누가 서로 눈이 맞았다더라 요나가 주워듣고 온 그런 이야기들로 속닥거리고 있을 무렵. 마차에 다다르자 공기가 싸늘했다. 그 많은 마차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내가 타고 왔던 백작저의 마차만 덩그러니 있었다.

16558459076054.png“즐거워 보이는군.”

소박한 백작저 마차에 노에비안이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나는 행사장에서 노에비안의 시선이 내내 내게 닿아 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로아드네스와 속닥이며 접촉할 때마다 불이 튀는 것 같던 눈도 똑똑히 보았고. 요나가 나와 노에비안의 눈치를 보더니 근처 허름한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16558459076054.png“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나는 떨리는 몸을 바로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그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면 말려들게 분명했다. 그는 불같이 화를 내기는커녕 아주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만하게 턱을 들고, 눈만 내리깐 모습은 이전에 나를 경멸하던 로아드네스의 행동과도 흡사했다.

16558459076054.png“나는 보통 가십지를 잘 읽지 않지만, 요즘엔 꽤 재밌더군.”

1655845895264.png“……재미있는 걸 찾으셨다니, 축하드려요.”

16558459076054.png“말장난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와서 너를 기다린 게 아닌데.”

조용히 씹어뱉는 목소리는 싸늘했다.

16558459076054.png“대공비가 되고 싶다느니, 나를 사랑한다느니……. 분수에 맞지도 않는 말을 예전부터 잘도 지껄이더니 하는 행동은…….”

그가 나를 경멸하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민낯. 그것은 내게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6558459076054.png“길거리 창부들이나 하는 짓을, 잘도 하는군.”

그리고 내가 덤덤할 수 있는 이유는, 그토록 맘에 안 들면 이 블리에를 버리면 간단할 것을 매번 이렇게 분노하고 경멸하면서도 날 기다리고 있는 노에비안의 태도였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655845895264.png“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여유로운 척 하던 그의 입가가 싸늘하게 굳는 게 보였다.

1655845895264.png‘버릴 수 없는 거지, 당신?’

1655845895264.png“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대공비가 되고 싶다던 말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전 각하께서 다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1655845895264.png‘이 블리에를 버릴 수 없으니, 블리에 따위가 하는 말을 이렇게 듣고 서 있는 거잖아.’

천하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1655845895264.png“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셨죠? 늘 말했잖아요.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의 옆자리에 앉고 싶을 뿐이에요.”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맥없이 풀리고, 늘 낯설게 느껴지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1655845895264.png“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들. 내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나요?”

16558459076054.png“당연한 소리를 두 번, 세 번 하게 하지 마.”

1655845895264.png“그렇다면…….”

나는 노에비안의 눈을 똑바로 올려보고 웃었다.

1655845895264.png“……제가 대공비 자리에 관심 있어 할 때 잘하세요.”

짙푸른 눈이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냐는 듯 굳어 있다가 곧이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더 짙게 웃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노에비안이 내 손목을 낚아챘지만 단번에 뿌리치고 문을 닫아걸어버렸다.

1655845895264.png“당신이 저를 하도 기다리게 해서, 슬슬 황자비 자리에 관심이 가려는 참이거든요.”

16558459076054.png“……뭐?”

황자비라는 단어에, 굳어 있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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