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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후회할 텐데 (52/171)

52. 후회할 텐데2021.10.30.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언제나 싸늘하고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눈이 낮게 가라앉더니 열린 창문으로 그가 바짝 다가왔다.

16558459221931.png“다시 말해봐. 지금 2황자와의 관계를 내 앞에서 인정한 건가?”

16558459221939.png“주위를 좀 둘러보세요, 대공 각하. 궁 밖에 나가 살고 있는…… 이제는 이름뿐인 황족인 당신보다, 이렇게 화려하고 거대한 궁 안에서 살고 계신 2황자 전하께 더 관심이 가는 걸 어쩌겠어요?”

황자비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하던 눈이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게 일렁였다. 나는 무서워도 꾹 참고 버텼다. 오히려 더 콧대를 높이고, 보란 듯이 웃었다. 나는 이름뿐인 황족이라는 말이 그를 자극하는 단어임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이복동생으로서,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신임을 얻는 동안 오로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평생을 바친 사람이니까. 그러니 그가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16558459221939.png‘말해.’

그게 나를 회유하려는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16558459221939.png‘대공비 자리를 내게 주겠다고 말해.’

어차피 당신도 이 블리에를 갖기 전까진 물러서지 않을 거잖아. 그러니 이렇게까지 참아주는 거 아니야? 눈알이 뻐근하고 뒷골이 당겨왔다. 아마 실핏줄이 터질 만큼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겠지. 이성을 잃은 것과 다름없어 보이던 검푸른 눈동자는 검은 바다처럼 일렁이다가 곧이어 잠잠해졌다. 무슨 말이든 할 것처럼 달싹이는 입술을, 나는 고집스레 보았다. 그런 날 내려다보던 노에비안의 입에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6558459221931.png“……후회할 텐데.”

싸늘한 정적과 애정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시선을 가르고 나온 말은 고작 그 한마디였다.

16558459221931.png“이런 식으로 구는 거,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목소리는 허공이 아닌 바닥을 기어서 내게 왔다. 노에비안은 마차 창틀이 부서져라 그러잡고 있던 손을 산뜻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한참 나를 쏘아보다가 그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돌아 사라졌다. 나는 단정하게 묶인 그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숨죽여 지켜보던 요나가 멀리서 내게 달려올 때까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1655845922197.jpg“마님 괜찮으세요? 싸우신 거예요?”

16558459221939.png“……가자.”

내 눈치를 보며 마차에 올라탄 요나가 마부를 불러 마차를 움직였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파티장의 소리는 멀어졌지만, 노에비안의 말이 마차 바퀴에 달라붙은 듯이 나를 따라왔다. 반드시 후회할 거라고?

16558459221939.png‘후회라면 이미 질리도록 했어.’

처음부터 당신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그런 부질없는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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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저녁 늦게까지 블리에의 일기장을 뒤적이다 잠이 들었다. 틈틈이 해석한 짧은 글들은 특별할 것 없는 낙서나 다름없어 맥이 빠졌다. 아침부터 마담 르블레아가 들러 특별히 단장을 해주고, 나는 어제보다 훨씬 일찍 입궁했다. 오늘은 내가 계획한 대로 파티홀을 꾸미는 날이었기 때문에 일찍 가서 확인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1655845925162.jpg“아침 일찍부터 이리 입궁하신 걸 알면, 대공이 비웃을 거예요. 아버지.”

나는 활짝 열려 있는 황태자비 궁 응접실 입구에 우뚝 멈추어 서서 몸을 숨겼다.

1655845922197.jpg“그놈이 괜히 엘라콘까지 갔을 리가 없지. 법안 폐지에 동의하고 싶지 않으니 그 핑계로 내뺀 거야. 나 참 눈 뜨고 당하다니!”

카스타냐 공작이 황태자비 궁에 들어 있었다. 간발의 차로 나보다 먼저 도착했는지 뒷모습만 봐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1655845925162.jpg“예상했던 일이잖아요? 노우라, 응접실 문을 좀 닫아줘요. 아버지, 알현 신청은 바라지도 않지만, 일국의 황태자비에게 오시면서 시종들을 다 물리시면 어떡해요? 문이라도 좀 제대로 닫고 들어오시던지요. 곧 사신단 환영식도 살피러 가야하고 그 문제가 아니어도 신경 쓸 게 많단 말이에요.”

탁-.

1655845922197.jpg“황태자…… 도대체…… 이번 기회를…….”

문이 닫히고 대노한 카스타냐 공작의 목소리가 응접실에서 흘러나왔다가 끊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귀를 바짝 붙이고 들어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아주 작은 틈새로 쉴 새 없이 응접실을 왔다 갔다 하는 공작의 그림자만 비쳤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사신단 환영식과는 상관없는 카스타냐 공작이, 서부에서 아침 일찍부터 황궁으로 달려올 이유가 무엇일까?

16558459221939.png‘카스타냐 공작이 폐지하고 싶어 하는 법안을, 노에비안이 폐지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도리스와 공작의 짧은 대화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덜컥-!

1655845925162.jpg“어쨌든, 아버지. 저는 오늘도 무척 바쁘니까……. 블리에?”

응접실 문이 갑자기 확, 열리더니 그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도리스가 깜짝 놀랐다. 나는 방금 온 것처럼 예를 갖췄다.

16558459221939.png“전하, 얼른 식장으로 드시는 게 어떨까요? 무척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을 텐데 마땅히 가장 먼저 봐주셨으면 해서요.”

1655845925162.jpg“아, 좋아요. 들으셨죠, 아버지?”

도리스가 마침 잘됐다는 듯 내 에스코트를 받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살짝 돌아본 응접실 안에는, 흥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공작이 있었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더 빨리했다.

16558459221939.png‘카스타냐 공작 역시,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로구나.’

애니와 연락을 주고받고,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라. 다른 건 몰라도 도리스의 곁에서 가장 유심히 살펴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 공작이리라. *** 행사는 첫 번째 날보다, 두 번째 날이 더 성황이었다. 온갖 보석 공예품으로 장식되었던 첫 번째 날과는 달리, 두 번째 날은 내가 주도한 동부 스타일의 꽃장식이 홀 입구에서부터 가장 상석까지 알맞게 놓여 있었다. 엘라콘은 척박한 땅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보석으로 부유해진 나라였다. 노우라가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는 말까지 하면서 여기서 인맥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노우라가 운영하는 보석점의 9할 이상은 엘라콘에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보석에 일가견이 있는 엘라콘 사신들은 어제 노우라가 준비한 장식들을 칭찬하며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뿐.

1655845922197.jpg“오늘은 어제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군요.”

사신들의 말을 듣고 있던 통역관이 밝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전했다. 나는 엘라콘과 내 고향 피레타가 보석과 꽃을 서로에게 사고팔며 이득을 봐왔던 걸 기억했다. 그때의 기억이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보석보다 꽃이 귀한 나라 사람들은 아무리 값비싼 보석을 가져다 놓아도 시큰둥할 테니까.

16558459221939.png“파티가 끝나면, 장식한 꽃들을 포장해서 가지고 가실 수 있게 자리를 마련했답니다.”

내가 파티장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통역관이 빠르게 말을 전했다. 사신단이 반짝이는 눈을 감추지 못하고 빠르게 뭐라 뭐라 말했다.

1655845922197.jpg“여태 방문했던……. 최고……. 감사를…….”

여태 방문했던 곳 중 최고이며 감사를 전해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들 중 몇몇이 나를 기억하겠다는 듯 유심히 보자, 나는 준비해뒀던 엘라콘어로 말을 했다.

16558459221939.png-모든 게 황태자비 전하의 뜻입니다.

서투르지만 정확하게 전달되는 엘라콘말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박수까지 쳤다. 어리둥절해하는 도리스를 향해 방금 내가 한 말을 전해주자 그녀가 제법이라는 듯 나를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가장 상석에서 사신단 대표와 대화를 나누던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도리스를 불러 곁에 세웠다.

16558459283104.jpg“제국과 엘라콘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건배합시다.”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이어 황태자가 성공적으로 환영회를 준비해준 도리스를 치하하자, 엘라콘 쪽에서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도리스는 물론이고, 이 환영식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익히 보고받았을 황태자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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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샴페인 잔을 들며 젊은 황태자 부부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런 내 모습을 노에비안의 충실한 개, 짐스커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1655845922197.jpg“부인, 오늘 정말 멋졌습니다.”

16558459221939.png“닐 경. 항상 고생해주는군요.”

1655845922197.jpg“부인 호위에 신경을 안 썼다간 우리 개화…… 2황자 전하께 머리통이 깨질 테니 별수 없지요.”

홀 밖에 있던 닐이 자연스럽게 나를 호위하며 능글거렸다.

16558459221939.png“황자 전하께서는 바쁘신가요?”

1655845922197.jpg“아, 바쁘시다기보다는…… 중요한 임무를 맡으시기 위해 조율 중입니다. 황제 폐하와.”

16558459221939.png“그게 혹시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실종사건과 관련되어 있나요?”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을 입에 담자, 닐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1655845922197.jpg“직접 말씀하실 겁니다. 제가 함부로 말했다간 정말 머리통이 터질 테니 제발 모른 척해주십시오.”

장난스레 하는 말이었지만 진심이 듬뿍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창밖을 스치는 전경을 보는 내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16558459221939.png‘노에비안을 위해 공부했던 것들이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 본인의 입맛대로 나를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똑똑히 알게 되겠지. 그늘에 있어야 할 내가 자꾸 양지로 나오고, 인정받고, 내 힘으로 하나씩 무언가 얻어가는 걸 보면 내게 강경하게만 굴어선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란 걸 알 테다. 오늘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목격한 짐스커가 조용히 사라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노에비안은 이제 어떻게 나올까? 큰 행사를 치르고 나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하루빨리 대공저로 들어가 누구의 제지도 없이 그의 집무실이며 내 집무실을 마음껏 뒤져보고 싶었다.

16558459221939.png‘빨리 벗어나고 싶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 싶다.  

16558459314671.png‘나는 두 번 다시 널 놓치고 싶지 않아.’

16558459314671.png‘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바쁜 와중에도 내게 들러 그 말을 전하던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나면, 로아드네스와의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을까? 어느덧 마차가 멈추고 나는 조금 산뜻해진 기분으로 마차에서 내렸지만, 이상하게 백작저는 조용했다. 나를 에스코트한 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환히 불이 밝혀져 있지만 어두운 분위기.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사용인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노에비안이 들이닥치기라도 한 걸까?

1655845922197.jpg“마님! 마님!!”

내 인기척을 들은 마지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내 치마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1655845922197.jpg“주인님께서, 주인님께서……!”

16558459221939.png“백작님이 왜?”

아카시아 백작의 호위를 맡았던 기사 하나가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로 사용인들 사이에서 나오자, 울먹이던 마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1655845922197.jpg“죄송합니다, 부인.”

16558459221939.png“무슨 일이죠?”

1655845922197.jpg“아카시아 백작께서, 영지를 시찰하시다가 그만…….”

16558459221939.png“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1655845922197.jpg“마차 바퀴가 떨어져 나가 절벽 아래로 실족하셨습니다.”

16558459221939.png“!”

나는 너무 놀라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침통한 표정의 기사가 어렵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1655845922197.jpg“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분명 돌아가셨을 겁니다.”

사용인들의 탄식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카시아 백작이 죽었다.  

16558459221931.png‘후회할 텐데.’

  백작을 수행했던 기사가 분명히 사고였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  

16558459221931.png‘이런 식으로 구는 거,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빌어먹을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목소리가 귓속을 갉작이고 있는 것만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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