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2021.11.03.
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황태자비 궁은 분주했다.
“행사를 치르느라 피곤했을 텐데, 여전히 바쁘십니다. 비.”
“아주 가끔 들르실 때마다 제가 바쁘니, 다음부터는 좀 자주 오셔서 안 바쁠 때 대화를 나누시지요.”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말에 도리스가 차갑게 응수했다. 황태자비 궁의 하녀들이 숯을 갈아 약물에 개워 그녀의 머리카락에 치덕치덕 바르고 있었다. 길쭉한 카우치 소파에 누워 머리만 내밀고 있던 도리스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르데날도를 훑어보았다.
“어제오늘, 사신단 접대가 훌륭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요. 나는 비가 최선을 다해주어 고맙다고 말하러 왔습니다.”
예를 갖추는 척 잠시 고개를 들었던 도리스가 다시 누우며 낮게 웃었다. 행사장을 꾸민 사람들도, 그녀가 준비한 엘라콘어도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바르데날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칭찬은 되었어요. 노력이라면 황후께서 더 하셨고 저는 흉내만 낸 것이니까요. 누구의 공이 더 큰지는 이미 다 보고 계셨으니 아시잖아요? 부끄럽네요, 그런 말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들인 것도 비의 능력이지요. 비는 사람 보는 눈이 좋으니까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니 칭찬은 감사히 듣겠어요.”
도리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내 부관의 말로는 그 부인이 평판이 그리 좋지 못하다던데……. 대공저를 관리했던 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내심 감탄했습니다. 비의 안목에 말입니다.”
블리에에 대한 평판이라. 안하무인. 본인의 천박함을 자각도 못 하는 어리석음. 뭐 그런 종류였던가. 안 들어도 뻔했다. 블리에 아카시아. 데뷔탕트 초기 때부터 묘하게 눈에 띄던 아름다운 귀부인. 아드리엔 피레타를 닮은 얼굴. 그 여자는 입만 안 열면 놀랄 만큼 고등 교육을 받은 지고한 귀부인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맹추가 되어버렸다. 그런 여자에 대한 평가가 좋아봤자지. 하지만 아드리엔의 얼굴을 하고 제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꼴은 꽤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도움도 되고 말이다. 아름다운 로아드네스를 포기하고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는 바르데날도를 선택한 것도, 시녀가 되고 싶다고 로비를 하는 수많은 귀부인을 뒤로하고 블리에를 들이겠다 결정한 것도 자신이니 바르데날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번 사신단 환영식이 꽤 성공적이라, 어쩌면 에페로가 귀국할지도 모르겠다고 카스타냐 공작이 내게 연락했더군요.”
“역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신 것이지요?”
도리스는 다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시중을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며, 행동이 퍽 날카로워졌다.
“드디어 전하의 장인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깨달으신 건가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내 말을 전하지 않은 것 같길래 말입니다, 비.”
도리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사람에게 ‘시기가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형제가 있다는 건 얼마나 외로운 일일까요?”
“에페로도 황자로서 의무를 다해야 할 뿐입니다.”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의미는 차가웠다. 에페로 론타는 즉위한 지 몇 년 안 된 새로운 황후 소생의 황자였다. 본래 황비였던 그녀의 아래에서 자라다가 엘라콘으로 유학을 갔던.
“9황자께서도 슬슬 약혼자를 찾으셔야지요. 엘라콘에만 계시다가 그곳의 여인과 눈이라도 맞는다면 황후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대와 그대의 아비가 황후 폐하를 그리 생각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아시면 되겠네요.”
차가운 정적 속에서, 하녀들이 도리스의 머리를 조심조심 헹구어냈다. 바르데날도가 시중 받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맙다는 말을 하러 오기는 개뿔.’
용건이 없으면 황태자비 궁 근처에도 안 오는 인사에게 뭘 바랐으리라고. 미묘하게 웃던 도리스를 훑어보던 바르데날도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때는 금발로 한참을 있으시더니, 이번엔 흑발입니까.”
“관심에 감사드려요.”
도리스가 오랜만에 받은 관심이 기껍다는 듯 답했다.
“그런데 비, 내 눈에는 볼수록 그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죽은 대공비와 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전하의 탄신연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때는 모르는 척하시더니.”
“그래서 이번에는 그 부인을 따라 하는 겁니까?”
“……뭐라고요?”
“몇 년 전 아드리엔 피레타를 따라 했듯 말입니다.”
“……방금, 뭐라 했어요?”
45도 뒤로 기울어져 있던 머리에서 검은 물을 뚝뚝 흘리며, 도리스가 자세를 완전히 고쳐 앉았다. 하녀들이 질겁을 하고 그녀의 어깨에 수건을 둘러주었으나 목을 타고 흐르는 검은 물이 시커멓게 그녀의 어깻죽지며 가슴께를 적시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먼저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제 시녀들이 권했답니다.”
아드리엔 피레타라는 이름에 발끈한 도리스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바르데날도는 그녀의 기분과 상관없이, 아니면 되었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여상한 꼴이 도리스를 더 자극했다.
“아버지께서 그리 움직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아시면서, 제 속을 이리 뒤집어 놓으시려는 이유는요?”
“…….”
대답 없는 바르데날도를 보며 도리스가 더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오른팔인 대공이 하는 일들이 하나같이 제 아버지를 방해하는 일들뿐이라 중간에서 제가 고생이 심한 것을 아시지요?”
아내상속법. 후계가 없는 가문에서 가주가 죽으면 아내가 가문을 상속하게 한다는 그 기가 막힌 법. 보통 후계 없이 가주가 죽으면 그 가문의 친인척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문을 승계한다. 하다못해 방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제 모든 걸 아내에게 주고 싶다던 그 작자는 아내상속법이라는 정신 나간 법을 발의하고 황태자의 지지로 결국엔 입법에 성공했다. 5년간 아내가 가문을 관리하다가, 적당한 후계를 찾아 뒤를 잇게 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몇 년이든 대귀족인 대공의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화제였다. 입법이 확정되자마자 온 신문이며 가십지에서 일제히 그를 론타 최고의 로맨티스트라 불렀다. 모든 예술가들이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찬양했고. 그 행태를 떠올려보던 도리스가 미간을 왈칵 구겼다. 꼴사납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결국 아내보다 일찍 죽지도 못했으면서 명성만 얻었으니, 과연 법안 폐지를 위한 회의에 불참하고 엘라콘으로 차출될 만큼 남다른 인재이기는 하군요.”
“그 법안은 이미 2년 전에 끝난 이야기입니다, 비.”
“네, 제가 아드리엔 피레타를 따라 했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퍼져 제가 힘들어했던 과거도 벌써 몇 년이나 흘렀답니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것으로 제게 뭐라 마세요.”
“다 됐습니다, 전하.”
“말리는 건 됐어.”
하녀들이 마른 수건으로 충분히 닦아낸 머리카락을 꼬며 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대 앞에 앉은 도리스는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바르데날도에게 콧방귀를 끼곤 거울을 보았다. 흑발의 긴 생머리. 블리에 아카시아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처럼 되려면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필요했다. 칠흑 같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도리스를 향해, 거울에 비친 바르데날도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도리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른 바르데날도의 큰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뒤에서 감쌌다.
거울 속 그녀를 들여다보는 황태자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향한 걱정스러운 미소로 가득했다.
“나는 가지지 못할 것에 힘 쏟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도리스는 묘한 말을 하는 그의 짙푸른 눈을 응시했다.
“가지지 못할 것에 시간과 힘을 쏟는 것보다, 가질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도리스는 곧 그것이 자신을 저격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발끈하여 어깨를 한번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전부 다, 가지면 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바르데날도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 도리스가 지지 않겠다는 듯 그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질 수 있으면, 전부 가지면 돼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바르데날도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그는 아직 젖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쳤다.
“내게 그대 같은 안사람이 있는 것 또한 주신의 뜻이자 축복이겠지요.”
바르데날도는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하녀들을 향해 눈짓했다.
“내 비께서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더없이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들을 채근했다.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한 하녀들이 서둘러 도리스의 곁에서 부지런히 머리를 빗고 말릴 준비를 했다. 도리스는 거울을 통해 바르데날도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그의 뜬구름 잡는 듯 찝찝하게 말하는 버릇에 진절머리를 쳤다.
*** 아카시아 백작의 부고를 들은 다음날. 장례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됐다. 사용인들의 얼굴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흐릿했고, 특히 노집사와 마지는 나보다도 멍한 얼굴로 겨우겨우 조문객을 맞이했다. 아침에는 아카시아 백작이 타고 갔던 마차의 바퀴가 짐마차에 실려 왔다. 이음새의 굵직한 나무 나사가 부식된 상태로 뚝 부러져 있었다. 흔히 있는 사고였다. 하필 절벽으로 간 백작과, 하필 점검에 소홀했던 낡은 마차가 합작한 불의의 사고.
“마님, 영지 관리인이 서신을 보냈어요.”
나는 요나가 건네는 서신을 무감각하게 뜯어 읽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절벽 아래는 전날 비가 와서 잔뜩 불어난, 유속이 빠른 물줄기가 흘렀고 사고가 난 다음 날 수색해 봤지만, 근처에 떨어진 마차의 잔해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수색대를 물줄기 하류까지 풀었지만 아카시아 백작의 시신은 그 어디에도 걸려 있지 않았으며 바다로 떠내려간 것으로 보인다고.
“마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시신도 없는 장례라, 장례식은 저택의 뒤뜰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방계나 먼 친척들은 영지에서 따로 간소하게 그를 추모하고, 수도에서는 내가 상주가 된 것이었다. 그에게는 후계조차 없으니까. 신관을 부르고, 주신께 백작을 부디 낙원이 있는 아바델리아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오늘 하루만큼은 1층 로비가 거대한 예배당이 되어 종일 잔잔한 음악 속에서 조문객들이 짧은 기도를 함께하겠지.
“닐 경, 2황자 전하께 설마 보고했나요?”
“아, 경황이 없어서…… 지금 보고를…….”
“하지 마세요.”
가뜩이나 바쁜 로아드네스가 이런 일로 나를 신경 쓰게 할 수는 없었다. 하루면 끝날 장례에 로아드네스까지 부르며 유난을 떨기보단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님!”
입구에서 가끔 조문객들의 외투를 받아들던 요나가 내게 급히 달려왔다.
“대, 대공께서 오십니다!”
과연. 몇 안 되는 조문객들의 시선이 노에비안에게로 향하고, 고개가 공손하게 떨어졌다. 이 저택에 있는 대부분이 황태자, 혹은 노에비안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나와 닐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아내며, 조용히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외투를 받아들려는 노집사의 손길을 태연히 무시한 노에비안이 일견 침통하고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주군이신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갖춘 나는 노에비안이 말없이 내미는 손을 보았다. 검은 장갑. 검은 정복. 예민하고 금욕적인 얼굴은 제국 모두가 아는 그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맞았다.
“……감사……”
“내가 말했지.”
순식간에 그 공간에, 노에비안과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정중히 악수를 청한 노에비안이 손이 닿기가 무섭게 나를 끌어당기고 내 정수리며 귓전에 음산한 목소리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