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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도망가지 마 (54/171)

54. 도망가지 마2021.11.06.

굳어 있는 내 어깨를 위로하듯 살짝 어루만진 노에비안이 곧이어 다른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하러 떠났다.

16558459643332.jpg“부인,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어왔다.

16558459643338.png“……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뻣뻣해진 목으로 나는 노에비안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았다. 그리고 곧 나와 노에비안을 번갈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느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차분히 애인을 맞이하는 미망인의 꼴이 썩 좋은 장면일 리 없었다. 침통한 사용인들의 표정. 그리고 여유로운 노에비안의 표정.

16558459643338.png‘내 방법이 잘못되었던 걸까?’

하지만 블리에 아카시아로서 노에비안의 뒤통수를 치려면 일단 그의 저택으로 가는 방법뿐이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라는 강적을 자극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자리를 꿰찰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16558459643338.png‘정말 그 방법뿐일까?’

노에비안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대공저로 들어가려 했던 시도가 백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걸까?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없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백작의 죽음으로 확신을 잃어버린 내 계획이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16558459643338.png‘지긋지긋해.’

도망가고 싶어. 이대로 어디론가 숨어서,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사람조차 세상에서 지운 채, 그저 쉬고 싶었다. 나는 얼마 있지도 않은 조문객을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맞이했다.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백작의 흔적이 가득한 이 집에 서서히 깔려 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며 침통해 하는 노에비안의 낯을 보자 더 그랬다. 나를 속이고. 로아드네스를 속였는데. 제 손아귀에 있는 아카시아 백작도 속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가 속인 사람들 중 둘은 죽고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뻔했다. 그런데 저렇게 뻔뻔하다니.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조용히 분노하다가,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노에비안을 찾아 저택을 뒤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직감이 백작의 죽음, 그 배후에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있음을 가리켰다. 멍한 머리, 떨리는 몸이지만 내 눈과 발은 부지런히 노에비안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16558459643338.png“닐 경, 혹시 짐스커 경이나 대공을 보았나요?”

16558459643332.jpg“부인?”

16558459643338.png“보았나요?”

내 기색이 심상치 않았는지 조용히 뒤를 따르던 닐이 진지한 낯을 했다.

16558459643332.jpg“짐스커 경이 마구간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조문 기도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 아닐까 했습니다.”

16558459643338.png“멀찍이서 호위해줘요. 가까이 따라붙지 말고.”

16558459643332.jpg“어디를 가십니까?”

16558459643338.png“마구간이요.”

16558459643332.jpg“조문객이 아직…….”

16558459643338.png“다들 내게는 관심이 없을 테니 아무나 세워두면 돼요.”

나는 하녀 하나를 불러, 로비를 지키게 하고 빠르게 마구간이 있는 후원 길로 향했다. 묻고 싶은 것, 추궁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그의 영역이 아닌 내 영역에서 이 불안한 심증을 확신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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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에비안의 오랜 부관, 짐스커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주군을 응시했다. 그동안 다른 가신들의 장례식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여전히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듯 퀭한 눈가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묘하게 느릿한 걸음걸이나 동작들은 오랜 기간 그를 지켜봐 온 짐스커가 느끼기에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16558459643332.jpg“각하, 괜찮으십니까.”

16558459674743.png“음.”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마구간 냄새는 불쾌했고, 짐스커는 죽음의 기운이 있는 저택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다.

16558459674743.png“경은 내일 또 여기로 와.”

16558459643332.jpg“……예?”

16558459674743.png“아카시아 백작의 유언장이 분명히 저택 어딘가에 있을 거야.”

16558459643332.jpg“유언장…… 말입니까?”

어두운 밤, 노에비안의 얼굴은 다소 창백하고 차분했지만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16558459643332.jpg“하지만 제가 어찌 함부로 저택을 뒤지겠습니까?”

16558459674743.png“미망인이 된 백작 부인이 홀로 이 저택을 지키게 할 순 없지 않은가.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한동안 이곳으로 출근하게.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백작가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기 전에 주군인 내가 유언장을 살펴 보살피는 게 맞겠지.”

16558459643332.jpg“……알겠습니다.”

짐스커는 어리둥절했지만, 노에비안의 말에 토를 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16558459643338.png‘유언장……!’

짐스커가 말에 올라타는 게 보이자, 나는 조금 더 어둡고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기고 숨을 몰아쉬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들은 참이었다.

16558459643338.png‘백작의 유언장이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단 말이지.’

죽어버린 귀족에게서 유언장을 찾는 건 상식적이다. 다만, 노에비안이 이 보잘것없는 가문의 유언장에 주목하는 건 달랐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유언장이 노에비안에게 아주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노에비안이 짐스커를 향해 뭐라 뭐라 당부의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언장. 유언장은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에 숨겨 뒀다면…….

16558459643338.png‘열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게는 백작이 영지로 가기 전 맡긴 안주인의 열쇠 꾸러미가 있었다! 나는 짐스커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저택 외부 벽을 더듬었다. 외벽 바짝 붙어 저택의 뒷문으로 다가가는데,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닐이 멀찍이서 조용히 다가왔다. 나는 노에비안이 저택의 정문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닐을 끌어당겼다.

16558459643332.jpg“부인?”

16558459643338.png“대공이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잘 보고 있어 줘요. 혹시라도 그가 나를 보고자 한다면 이제 면담 시간이 끝났다고 전해주면 좋겠어요.”

16558459643332.jpg“예? 갑자기요?”

16558459643338.png“명령이에요.”

닐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뒷문으로 들어가, 커다란 세탁실을 지나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계단을 타고 올랐다.

16558459643338.png‘열쇠 꾸러미, 열쇠 꾸러미!’

내 침실로 돌아가 블리에의 일기장과 내 보석들이 들어 있는 금고를 단번에 열자, 열쇠 꾸러미를 넣어둔 벨벳 주머니가 구석에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꽉 쥐니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곧이어 살짝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손님들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대공저의 마차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모든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고, 노에비안이 저택 입구로 나왔다. 마차 앞에서, 마치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아는 사람처럼 저택을 훑어보던 노에비안은 곧 옷매무새를 고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모든 동작이 우아하고 간결했다. 그는 이어 자신을 따라 나온 닐을 향해 뭐라 지껄이더니 미련 없이 백작저를 떠났다. 그의 마차가 저택 앞을 완전히 떠나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닐이 근처에 있던 다른 기사들과 백작저 앞을 지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창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짐스커가 내일 백작저를 뒤져,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유언장을 먼저 발견하게 둘 수는 없었다. 딸랑-! 딸랑-! 침대 맡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 흔들자, 요나와 마지가 급히 달려왔다.

16558459643332.jpg“마님! 기사님이 마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고 그러던데…….”

16558459643338.png“지금부터 모든 사용인들이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

16558459643332.jpg“예?”

수척하고 얼떨떨한 얼굴을 한 마지가 되물었다. 나는 품에 숨긴 열쇠 꾸러미를 손으로 꾹 눌렀다.

16558459643338.png“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해줘.”

마지는 내가 처음 대공저에서 사용인들에게 약 탄 술을 먹이려 했을 때처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어깨를 두드렸다.

16558459643338.png“돌아가신 백작님을 위한 것이니.”

16558459643332.jpg“……예.”

내 눈에 담긴 결연한 의지를 보았는지, 마지 역시 군말 없이 침실을 나섰다. 위층에 있던 사용인들이 모두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1층에서 바쁘게 청소를 하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곧장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 커다란 열쇠로 따고 들어간 집무실은 주인이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아 스산했다. 장식품 하나 없이 황량하고 싸늘한 집무실은 들어가는 내내 관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탁.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혹시나 누군가 밖에서, 이 집무실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할까 봐 커튼을 치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류 한 장 없이 말끔한 책상 아래, 차가운 금속 재질의 금고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열쇠 꾸러미에 있는 수십 개의 열쇠들을 끼워 넣고 돌리기를 반복하자 마침내 딸칵, 소리를 내며 금고문이 열렸다.

16558459643338.png“…….”

금괴 몇 개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깔려 있는 몇 개의 서류 봉투들. 아주 낡아 누르스름한 것들부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새하얀 것까지.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 뭉치부터 꺼낸 나는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16558459643338.png“!”

아니, 사실 내 발치에 툭 떨어진 것은 그 봉투들 사이에 이물질처럼 끼여 있던 분홍색 일기장이었다. 그래, 분홍색 일기장. 눈에 아주 익숙하고,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밤새 뒤적거리던 그것과 똑같이 생긴 것 말이다. 촛대를 가까이 가져다 대자 촛농이 뚝뚝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엘라콘어로 빼곡히 적혀 있는 일기장은 낙서만 가득하던 이전의 일기장과는 달리, 꽤 많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16558459643338.png“도대체 왜. 왜 또 네가 나와.”

유언장을 찾고 있었는데. 어째서 블리에. 또 네가 여기서 나오냐고……! [노에비안 트로비카, 당신을 증오해.]  

16558459643338.png“!”

일기장 첫 장의 첫 문장. 사전 없이도 해석이 가능한 유일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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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일기장을 팍 덮어버렸다. 단 한 줄의 문장이었지만, 숨이 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거친 숨만 몰아쉬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걸쳐 입은 숄 안에 일기장과 서류 봉투들을 숨겨서 집무실을 나왔다. 금고도, 집무실 문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꼭꼭 걸어 잠그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내 집무실로 향했다. 백작의 집무실보다 훨씬 밝게 불을 밝힐 수 있었지만 돌연 찾아온 흥분과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책장에 꽂힌 엘라콘어 사전을 빼 들고 책상으로 향했다. 쿵쿵 소리가 날 만큼 힘주어 걸었다. 블리에의 일기장을 최초로 해석했던 그 날의 기억, 감각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블리에의 일기장을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16558459643338.png‘이번엔 또 어떤 말들로 날 비웃고 조롱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해석이 아주 어려운 문장을 제외하고 미친 듯이 단어를 찾아 해석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후회와 죄책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이다.] [아카시아 백작 역시, 노에비안 트로비카와 한통속이었다가 버려질 사람일 뿐.] [모든 걸 뒤로하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반대로 잃어버렸던 내 삶에 대한 연민에 견딜 수 없는 밤이 온다.] 나는 이유 없이 오싹해지는 팔을 쓸어 올리며 잠시 깊은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길 반복했다. 두 손으로 귀와 목덜미를 세게 비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느낌이 온몸을 기는 것 같았다.

16558459643338.png‘사실 이건 내 일기장이 아닐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 만큼, 블리에의 일기장은 지금의 내 심정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니?]  

16558459643338.png“……!”

나는 아주 징그러운 벌레라도 만진 것처럼, 어느새 일기장을 멀리 밀어놓았다.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았지만, 블리에의 유령이 내 앞에서 날 보며 속삭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한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다. 나는 허공에 블리에가 있는 것처럼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씹어뱉었다.

16558459643338.png“그래, 도망가고 싶어. 도대체 왜 이러는데. 도대체 왜, 내게 자꾸……!”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어.] 사전조차 찾을 필요 없는 문장 하나가 뒤이어 내게 대답했다.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듯 웃기 시작했다.

16558459643338.png“네가, 도대체 뭔데…….”

  [도망가지 마. 대공저로 들어가, 모든 비밀을 밝혀내.] 아-. 어떻게 이러지? 이 여자는 도대체 뭐지? [도망가지 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기를 쓸 수 있지?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 떡하니 제국어로 쓴 내 이름자가 낡은 일기장의 끄트머리에 보란 듯이 자리했다. 마치 내가 자신의 일기장을 볼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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