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절박한 표정2021.11.13.
아드리엔은 피곤해 보이는 로아드네스에게 손님방을 내어주었다. 먼저 잠을 청하라며 아웅다웅하다가 결국 아드리엔에게 지고 만 로아드네스가 목욕만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간 뒤였다. 사용인들의 시선은 아직까지도 미묘했다. 노에비안의 방문과 2황자의 방문이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이어지고, 손님방까지 내어주자 처음에는 충격으로 흔들리던 눈들이 점점 체념으로 변해갔다.
“마님, 대공저에서 짐스커 경이 오셔서 뵙기를 청하는 데 어찌할까요?”
아드리엔의 명으로 앞뜰을 서성이던 요나가 곧바로 보고했다. 아드리엔은 기다렸다는 듯 검은 드레스며 모자를 매만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 전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신다나?”
“이제 막 노집사가 옷 시중을 들러 올라갔습니다.”
마지가 대답하자 아드리엔은 산뜻하게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타이밍이 좋았다.
“짐스커 경부터 볼까?”
마지는 어젯밤 사용인들을 전부 물리고 홀로 있던 부인의 상태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원래도 왔다 갔다 해서 예의 주시하긴 했지만, 집안이 평화로워지고 백작가의 명성도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아 가만두고 보았는데. 이번에 본 부인의 눈은 은은하게 미쳐가는 빛깔을 띠었다. 그리고 그런 눈을 한 사람들은 꼭 큰 사고를 친다. 저택 입구 문이 열리고, 검은 정복을 갖춰 입은 짐스커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아드리엔은 짐스커를 반기듯 웃었다.
“짐스커 경.”
태연히 손등을 내밀고 입맞춤을 허락하자 외려 짐스커가 당황해 허둥대다 예의상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인, 대공 전하의 명으로 부인의 곁을 지키러 왔습니다.”
“저를요? 왜죠?”
짐스커 스스로도 왜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지켜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지라 대답은 한참이 걸렸다. 그 틈에 아드리엔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다정한 마음 씀씀이는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제 곁을 지켜주시는 분이 있는걸요.”
“예? 누구…….”
“나다.”
어느새 환복을 마친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2층 계단 난간에서 1층 로비까지 짙게 깔렸다. 아드리엔의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짐스커의 시선은 방금 씻고 나온 로아드네스의 젖은 금발과 아직도 물기가 어려 있는 얼굴, 단추를 반도 채우지 않은 셔츠로 어지러졌다.
“네 놈 보라고 있는 몸은 아닌데.”
“풉.”
짐스커를 따라 들어왔던 닐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에 웃음을 꾹 참았다가 로아드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굳히고 눈을 깔았다.
“짐스커 레일론. 네놈은 황족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황족에 대한 예의가 개판이군. 레일론 백작이 그리 가르쳤나?”
“제, 제국의 별이신 2황자 전하를…….”
“됐다. 귀찮게.”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은 시선이 따랐지만 로아드네스는 가뿐히 무시했다. 이 저택에 처음 들어왔으면서 집 주인같이 느긋한 걸음에, 그보다 느리게 단추를 채우는 그의 동작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장귀라 불리는 위명 때문일까. 요사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문제아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영겁처럼 흐르던 짐스커의 시간이 다시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 건, 그 아름다운 문제아가 길쭉한 팔로 단번에 미망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부터였다.
“남편이 죽자마자 미망인의 집에 제 오른팔을 보내는 주군이라.”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로아드네스의 반듯한 이마는 물기가 어려 반짝였다. 홀린 듯 동작을 지켜보고 서 있던 짐스커는 황자의 다음 말에 곧장 몸을 굳혔다.
“내 여자에게 개수작 부리지 말고, 부인 장례식이나 마저 지키라 전해라.”
*** 대공저로 복귀한 짐스커는 노에비안의 집무실에서 본인이 보고 들은 것들을 줄줄 내뱉었다. 그의 이른 귀환에 혹시라도 블리에와 함께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에비안은 짐스커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단어에 곧장 반응했다.
“내 여자?”
짐스커는 보고 있던 서류가 노에비안이 길게 뻗은 손안에서 무참히 구겨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내, 여자?”
“예. 분명 그리 말씀하시고, 저를 내쫓으셨습니다.”
확인을 바라는 듯한 말에 짐스커가 답했다. 지금 바로 나가서 전하지 않으면 걸어 다니지도 못할 만큼 뭉개버리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단 건 입안에 꼭꼭 감췄다. 은은하게 미쳐 있다는 2황자와 대적하기에, 짐스커는 상대가 안 되었다.
“백작 부인은?”
“두 분이, 매우 긴밀한 관계인 듯 보였습니다.”
서류 하나가 더 구겨졌다. 짐스커는 처음 보는 노에비안의 동요에 한참 멈춰 있다가, 그것이 무언의 축객령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벗어났다. 먼지 하나 앉지 않은 멀끔한 집무실. 햇빛 하나 앉지 않은 노에비안의 창백한 얼굴은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것처럼 어두워졌다.
“도대체…….”
도대체 뭐가 잘못됐지? 홀로 남은 노에비안은 언제나 그랬듯, 문제의 원인을 하나둘씩 분석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블리에 아카시아가 스스로 제 앞에 무릎 꿇으리라 자신했다. 아카시아 백작은 노에비안의 수많은 가신들 중 유일하게 블리에 아카시아의 신분 세탁을 도와준 인물이다. 아무리 한미할지라도, 수도에 살고 있는 귀족이기도 했고. 노에비안이라는 그늘에서, 아카시아 백작이라는 기둥을 붙잡으며 살아왔던 블리에에게 아카시아 백작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본인의 유일한 기반이 무너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충격으로 얼룩진 얼굴과 흔들리는 눈을 분명히 보았는데. 아무리 블리에 아카시아라 할지라도 후회 혹은 죄책감, 그 비스무리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감정적인 여자니까 아주 잠시나마 싸구려 동정심이라도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이 있다면 그게 자신을 향한 경고라는 것도,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임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로아드네스.”
노에비안은 꺼끌거리는 모래알과 같은 이름을 입안에서 쉴 새 없이 되뇌어보았다. 제가 판 함정에 제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드리엔의 대용품을 아드리엔을 사랑했던 남자가 빼앗으려 하자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세게 긁었다. 힘줄이 돋아난 창백한 손등으로 떨군 시선은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제게 대적한다거나,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결단코 블리에의 조막만 한 머리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블리에의 신분을 세탁한 장본인인 이상, 그 여자에게 선택권은 없다. 노에비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헛된 망상으로 일을 그르치려 하는 블리에를 어떻게 응징해 손아귀에 쥐고 흔들지 생각하느라 오전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집사 가스팔이 주인을 걱정한답시고 가져온 식사와 가십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론타의 탕아를 사로잡은 아름다운 미망인,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보아 넘겼던 귀여운 수준의 기사가 아니었다.
【론타 최고의 탕아에서,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평민 출신 미망인과의 스캔들을 부인하지 않는 로아드네스 2황자의 저의는?!】 대문짝만하게 실린 가십지 표지가 눈을 사정없이 때렸다.
“가스팔!!”
“예, 각하.”
“황궁에 들어야겠다.”
잇새를 짓씹으며 말하는 노에비안의 기세에 주춤하던 가스팔은 품에 가지고 들어왔던 초대장 하나를 꺼냈다.
“안 그래도, 황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지?”
극도로 예민해진 푸른 눈이 번뜩였다.
“사신단의 환송식에 참여해달라는 초대입니다.”
*** 사신단 환송식이 열리는 황궁의 대알현실. 노에비안은 관심도 없는 사신단 환송식보다는, 환송식이 끝나고 로아드네스의 집무실로 찾아가거나 황제에게 2황자를 또 다른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위해 초대를 수락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토기가 올라왔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주군이신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블리에가 이 사신단 환송식에서 보란 듯이 로아드네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하기 전까지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엘라콘 사신단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누가 봐도 블리에를 반기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로아드네스의 곁에 서서, 밝은 곳에서 주목받고 서 있는 블리에를 보자 격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낀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안?’
‘안이라는 이름은…… 노에비안의 ‘안’이었군요.’
‘당신이 항상 제가 꿈꾸고 상상하던 안의 모습 그대로인 게 너무 신기해요.’
아드리엔을 처음 마주한 순간 느꼈던 감정 말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아주 위태로운 수준까지 올라온 건, 자신에겐 하나마나한 인사를 하고 황제로부터 직접 공적을 인정받은 블리에를 본 순간이었다. 도리스의 입김이 없었다면 묻혀버렸을 공적. 아주 강렬한 위기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우리, 잠깐 화해하는 건 어떤가요?”
사신단에게 연달아 인사를 받고 황제에게 직접 인사를 올리는 블리에를 함께 지켜보던 도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귓속을 갉작이는 듯한 은밀한 목소리였다.
“대공비 자리에 누구를 앉힐지는 몰라도, 우리가 같은 배를 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 준다면 우리 쪽에서도 굳이 에페로 황자를 들이는 데 힘쓰지 않을게요.”
“무슨 뜻이십니까?”
로아드네스와 황태자의 곁에서 황제의 치하를 받는 블리에의 낯선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저 부인이 마음에 든 참이고, 제 아버지께서는 2황자 전하의 세력이 커지는 걸 싫어하시니…… 가엾은 미망인 하나를 세력가의 딸 대신 2황자 전하 곁에 두는 건 힘들지도 않은 일이랍니다.”
“외람되오나, 참견하지 말아 주십시오.”
차가운 음성에 도리스가 외려 눈웃음까지 살살 치며 웃었다.
“반대로 그 가엾은 미망인 한 명을, 아내 잃은 홀아비 곁에 밀어 넣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니지요.”
“……대공비 자리가 우스우십니까?”
“대공도 서부의 왕이라 불리는 제 아버지가 우스워, 여태껏 그리 굴었던 것은 아니지 않나요.”
낮게 분노하는 노에비안을 향해 도리스가 차갑게 응수했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지, 아니면 눈뜨고 뺏기실지는 본인이 결정하세요.”
“무슨 뜻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점잖은 척하시기는.”
제 입으로 직접 가장 큰 공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세웠다 황제에게 아룄던 도리스의 입에서 은근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기어 나왔다. 쉴 새 없이 팔랑이던 부채 뒤에서, 도리스가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말은 절박해 보이는 그 표정이나 감추고 하세요, 대공. 사람 우스워 보이니까.”
절박한 표정. 그 말 한마디가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자존심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