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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인정하세요 (57/171)

57. 인정하세요2021.11.17.

알현실. 황제는 다소 지친 얼굴로 노에비안을 보았다. 그의 책사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인물이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약간 상기되어 있는 듯 보였다.

16558460348883.jpg“급한 일인가?”

1655846034889.png“폐하, 반란군의 잔당들이 다시 서쪽을 넘보고 있는 듯합니다.”

16558460348883.jpg“항상 서쪽이 문제로군.”

2년 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던 반란군이라는 단어는 이제는 좀 질리기까지 했다.

1655846034889.png“서쪽은 2황자 전하의 위명이 드높으니, 출전 명령만 내리신다면…….”

16558460348883.jpg“이번엔 다른 인물을 보낼까 하는데.”

황제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자, 노에비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들렸다. 황제는 짐짓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58460348883.jpg“그놈이 장가갈 때가 된 모양이야, 대공.”

1655846034889.png“무슨 뜻이십니까?”

16558460348883.jpg“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내게 청을 하더군.”

1655846034889.png“……마음에 둔 사람 말입니까.”

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엔 피레타를 원한다던 어린 아들은, 눈앞의 이 남자에게 첫사랑을 빼앗겼다. 황태자는 자신의 반려로 도리스 카스타냐를 최종 선택했고, 아들이 전장에 나간 사이 피레타 공녀는 대공 노에비안을 택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아직도 그날만 떠올리면 기분이 이상했다. 그 역시 아비인지라 노에비안의 청을 미뤄두고 있었는데, 피레타 공녀가 단번에 그의 청혼을 수락했고 그 이후 결혼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로아드네스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신문에서 세기의 커플이라 떠들어댔다. 전장에서 그 소식을 접했을 아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하지만 당사자인 피레타 공녀의 의지가 그러하다는데 따져 물을 수조차 없었다. 동부의 피레타 공작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세력이었고, 그런 동부의 귀족이 엄한 세력가와 혼인 동맹을 맺는 것보다야, 자신의 사람인 노에비안과 엮이는 게 여러모로 좋았기 때문이다.

16558460348883.jpg“누구라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오늘 보니 알겠더군.”

1655846034889.png“……누굽니까?”

16558460348883.jpg“얼마 전에 미망인이 된, 아카시아 백작 부인.”

황제는 노쇠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낮게 웃었다. 그 와중에 남편이 죽은 미망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조하던 참이었다.

16558460348883.jpg“내 트로비카 대공비를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그 부인을 보고 대공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네. 자네 역시 알고 있었겠지.”

1655846034889.png“…….”

16558460348883.jpg“차림새나 분위기가 달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 총기 어린 눈빛을 보자마자 곧장 아드리엔, 그 아이가 떠올랐지 뭔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노에비안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황제는 지친 몸을 의자에 파묻으며 오늘 자신이 직접 치하한 귀부인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보았다.

16558460348883.jpg“로안이 그러더군. ‘피는 속일 수 없나 보다’라고.”

1655846034889.png“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16558460348883.jpg“나 역시 쿠로세다 남작 부인을 보았을 때, 레티나를 떠올렸으니. 그놈을 탓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황제는 그 말 한마디에 짙게 가라앉는 노에비안의 눈을 인식하지 못했다.

16558460348883.jpg“차라리 그 부인이 미망인이 되어 다행이지 뭔가. 남편이 있었더라면 안 그래도 망나니 같은 그놈의 평판이 남아나질 않았을게야.”

1655846034889.png“저는 반대입니다, 폐하.”

노에비안은 가까스로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명치끝이 간질거리는 불쾌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1655846034889.png“제 가신인 아카시아 백작의 부인인 그녀를, 오랜 기간 지켜봐 왔지만 황자비의 재목이 아닙니다.”

16558460348883.jpg“흠.”

1655846034889.png“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 공적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애초에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 자리마저 과분한 여인입니다. 성격도 유순하지 못한 데다가 사치도…….”

16558460348883.jpg“로안같이 방랑하고,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는 놈에게는 유순하게 끌려다니는 쪽보단 곁에서 잡아줄 만한 여인도 나쁘진 않지. 제아무리 사치를 부린다 한들, 로아드네스가 그간 쌓아온 제물 역시 궁을 나가 몇 대가 놀고먹어도 될 만큼 있으니 상관없고.”

1655846034889.png“진심이십니까?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 부인의 출신은 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16558460348883.jpg“그래서 더 로안에게는 좋을지도 모르겠네.”

노에비안의 얼굴은 약간의 충격으로 얼룩졌다. 블리에 아카시아의 황자비로서의 가능성을 황제가 직접 옹호하고 나서는 지금의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은 까닭이었다. 고작 사신단 환영식을 좀 잘 꾸몄다고 이런 말까지 나올 일이란 말인가?

16558460348883.jpg“바르데날도에 비해서, 제국 내에서 로안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지. 로안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나는 늘 그게 신경 쓰였다네. 로안은 늘 조용히 살기를 원했고 바르데날도에게는 자네와 카스타냐 공작이 든든히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 훗날 작위를 받아 궁 밖에 나가 살려면 제국민들에게 평판이 좋을수록 좋지 않겠나.”

황제는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둔 신문 하나를 노에비안에게 건넸다. 노에비안이 공손히 그 신문을 받아 읽었다. 아침에 보았던 가십지 사이에 껴 있던 신문이었다. 평민을 사랑한 황자라나 뭐라나. 그대로 구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꽉 잡아 눌러야만 했다. 블리에와 로아드네스의 다정한 모습을 상상해 그려놓은 초상이 마치 아드리엔과 로아드네스의 다정한 한때를 그려놓은 것 같아 보고 있기 힘들었다.

16558460348883.jpg“그 많은 공적을 쌓았지만 늘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던 놈이네. 평민 출신의 미망인과 이루어진다면 그놈은 그놈대로 원하는 이를 얻어 기쁠 것이고, 귀족들은 몰라도 평민들에게는 꽤 호감을 살지도 모르겠어.”

1655846034889.png“……원하지 않는다면 어찌 됩니까?”

16558460348883.jpg“그게 무슨 뜻인가?”

노에비안은 바짝바짝 메마르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공들여 만들어놓은 무언가를 눈앞에서 뺏기는 기분이 일어 참고 있기 힘들었다.

1655846034889.png“그 부인이 그런 관계를 원치 않는다면 어찌합니까?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16558460348883.jpg“하하-.”

황제가 터트리는 웃음에, 황급히 말을 꺼내던 노에비안이 그대로 뚝 멈추었다. 황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16558460348883.jpg“대공. 세상에 그 어떤 여인이 로아드네스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놈이 하는 짓은 거칠지 몰라도 엘라콘에서도 인정하는 제국 최고의 미남자인 데다, 이 나라의 황자인데. 황제가 쉴 새 없이 이어 붙이는 말은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16558460348883.jpg“그런 로안의 옆자리를 마다할 여인은 세상에 없네.”

황제의 여유롭고, 단호한 목소리가 단번에 노에비안의 기분을 절벽 아래로 떠밀었다. 노에비안은 황제의 확언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1655846034889.png“그래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 부인이 거부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16558460348883.jpg“별수 있겠는가. 결국엔 그 또한 남녀 문제인 것을.”

절벽으로 떨어지던 노에비안은 그 말 한마디에 허공에 우뚝 멈추어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날아갈 뻔한 이성을 겨우 붙들자, 이 말도 안 되는 가정의 끝에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연관되어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제 정부를 찾기 위해, 이상을 늘어놓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노에비안은 차게 조소했다. 당신의 말대로, 정말, 정말 이 지독한 핏줄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1655846034889.png“……그렇다면 제가 주군으로서, 그 부인의 의중을 물어보겠습니다.”

16558460348883.jpg“간섭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황제가 약간 탓하듯 말하자 노에비안이 엷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아, 지독한 핏줄이여.

1655846034889.png“물론 부인의 의중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행동할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 것을 당신의 아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은 눈이 자연스레 황제의 발치로 향하고, 노에비안은 극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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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에비안은 최근 몇 년간 그리 빨리 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걸음을 재촉했다. 제 정부를 찾아줄 만한 사람이 로아드네스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황제가 일을 그르치기 전에, 블리에를 만나야 했다.

16558460472041.png“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마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 직전.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긴 회랑의 끝에 거짓말처럼 블리에가 서 있었다. 노에비안은 불과 몇 걸음을 남겨둔 채 우뚝 서 있다가 주변을 살피고 그대로 제 마차를 향해 걸었다. 입이 무거운 자신의 마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공간. 노에비안이 훌쩍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블리에가 따라 타더니 마차 문을 닫았다.

1655846034889.png“겁도 없군.”

16558460472041.png“설득하려는 사람치고는 꽤 위협적인 말이네요.”

그리고 덤덤한 미소. 블리에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에, 노에비안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치켜들고 게슴츠레 눈을 떠 샅샅이 살펴보아도 여자는 어제 받았던 충격을 어디 갖다버리기라도 한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1655846034889.png“설득? 설득은 네가 내게 해야지.”

순간, 여자가 픽 웃었다. 그는 잠깐이지만 숨을 죽이고 그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해 조아리지 않는 건 상당히 의외였다. 나아가 제 앞에서 이렇게 웃기까지 하는 건 전혀 예상 밖이었고.

16558460472041.png“그냥 이제 인정하세요, 각하.”

1655846034889.png“……뭘 인정하라는 거지?”

16558460472041.png“제 주변 사람들을 아무리 건드리신다 한들 제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어요.”

이 여자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여자였던가? 저런 태도가 입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인가? 늘 구부정하고 삐딱하던 자세 대신 곧게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16558460472041.png“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인데, 왜 자꾸 엄한 사람들을 건드리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1655846034889.png“……날 살인자 취급하는군.”

16558460472041.png“아닌가요?”

빙그레 웃는 여자의 얼굴은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듯 퍽 다정하게 빛났다. ……마치 아드리엔처럼. 노에비안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차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1655846034889.png“아카시아 백작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뿐이야. 남들이 오해할 만한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마. 그 정도 지능은 있잖아.”

16558460472041.png“그럼 지금은, 2황자 전하를 이용해 자극하지 말라는 소리를 재차 하시러 오시던 길인가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소용이 있나? 이미 온 세상이 로아드네스의 새로운, 특별한 연인에 대해 떠들고 있는데. 노에비안은 다시 천천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일을 그르친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유롭고 자신만만하던 여자의 눈이 자신을 향해 슬픈 빛을 띠었다.

1655846034889.png‘미친놈.’

그리고 그게 이상하게 단전을 울렸다. 진짜 아드리엔이 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슬프고 처연한 눈이었다.

16558460472041.png“당신은 아카시아 백작을 이용해 날 흔들려 하고, 나는 2황자 전하를 이용해 당신을 흔들려고 하고. 결국에 우리가 원하는 건 같아요.”

노에비안은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어 넘기는 여자를 응시했다. 아까부터, 마음이 아주 이상했다. 여자가 늘상 하던 사랑 타령, 대공비 자리 타령이었는데. 그게 그리 듣기 싫지가 않았다. 표독하지 않은 표정 때문에? 아니면 처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곧추세운 자세로 총명하게 빛을 내는 눈빛 때문에?

16558460472041.png“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죽은 대공비보다,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나를 원한다고.”

여자가 마차 의자의 끄트머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왔다. 슬프고, 처연한 눈은 그동안 여자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감정이라 자연히 눈이 갔다.

16558460472041.png“나는 이렇게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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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아주 익숙하게 그의 손을 끌어와 잡고는, 제 뺨을 손바닥에 비볐다. 입만 살아 날뛰었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살을 맞댄 적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16558460472041.png“가질 수 없는 것에 시간을 빼앗기기보다, 가질 수 있는 나를 가지세요.”

이대로 2황자에게 날 뺏기지 말고. 당신의 그늘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자유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의 모든 분노와 화를 녹이려고 하는 것처럼 한참 그리 있던 여자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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