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백작저의 미친개2021.11.27.
짐스커는 이틀째 대공저 앞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 레일론 백작을 피하다가 겨우 후문을 통해 아카시아 백작저로 향했다. 주군이 적절하게 그가 피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려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아버지에게 ‘대공께서 궁에 입궁하셨다’는 거짓말을 계속하며 진땀을 뺐어야 했다. 그나저나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대공비 내정자가 되었다니.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연속으로 황태자가 심각한 얼굴로 대공저에 방문하더니 그런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짐스커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어떤 경로로 주군의 정부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그녀의 뒷배에 대단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단지 죽은 대공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감정적인 결정을 내릴 노에비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수도 중앙에서 꽤 떨어진 아카시아 백작저에 어느새 도착했다. 짐스커는 도착하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전부터 소박한 규모에 비해 과할 정도로 백작저를 지키는 인력이 많다고 느꼈지만, 오늘은 그 급이 달랐다. 황실기사단 제복을 입은 화려한 기사들이 전장 한가운데의 요새처럼 열을 맞춰 백작저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예? 아, 저는 레일론 백작가의 짐스커 레일론입니다.”
“소속이 어디십니까?”
“트로비카 대공저 소속입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구를 지키던 기사 몇 명이 그를 에워쌌다. 그리고 꽤 건장한 그를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달랑 들어 백작저 입구로 향했다. 한순간에 두 발이 공중에 띄워진 짐스커가 버둥거리면서 백작저 입구 안으로 들여졌다. 그가 옮겨지는 동안 달려갔던 기사 하나가 번쩍이는 남자 한 명을 저택 건물 안에서 데리고 나왔다.
“저, 저 다음에 오겠습니다. 제발.”
“어딜 가지?”
거대한 저택 현관을 뒤로하고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남자는 2황자 로아드네스였다. 산책이라도 하듯 느릿한 걸음이었지만, 짐스커는 숨이 턱턱 막혔다. 황자는 상반신을 탈의하고 있었다. 늘 꽁꽁 싸매고 있는 주군만 모시던 짐스커가 보기에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풍기 문란한 행색이었다.
“백작가의 주군이신 트로비카 대공가에서…….”
“내 경고가 먹히지 않았나? 걷지 못할 만큼 뭉개놓겠다고 했을 텐데.”
그 경고가 지나치게 잘 먹혀서 짐스커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그가 이런 쪽으로 한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문제아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치켜들고 한껏 그를 깔아보았다. 주군인 노에비안 역시 누군가를 의심할 때 자주 저런 표정을 하긴 했지만, 어쩐지 이 황자 앞에 있으면 자신이 밟히자마자 죽어버릴 벌레가 된 것 같은 위압감을 느끼곤 했다. 저택 안에서 급하게 뒤따라 뛰어나온 닐이 로아드네스에게 나이트가운 비슷한 걸 걸쳐주었다. 하지만 이미 전장에서 얻은 흉터로 빼곡한 몸을 본 지라, 짐스커는 전의를 상실하고 그가 무슨 말이든 더 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네 주인이 뭘 어쨌다는 거지?”
“아, 아카시아 백작 부인께서 대공비 내정자가 되셨습니다.”
느긋하던 황자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려 비틀린 미소를 보이던 황자는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공께서 아카시아 백작저를 관리하라 직접 저를…….”
“잊었나 본데. 부인은 내 여자니까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분명 말했는데. 전달하지 않았나 보지?”
“!”
검을 찾는 듯한 로아드네스의 시선에, 벼락을 맞은 듯 멈춰 있던 짐스커가 다시 소리쳤다.
“전하! 전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미 황태자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덜덜 떨면서 입만 살았군.”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황자를 보자 오늘 백작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백작 부인을 만나는 건 글렀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금방이라도 저를 짓뭉개버릴 것 같은 로아드네스가 성큼 다가오자, 짐스커가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월! 월!”
난데없이 혓바닥을 축 내민 채 뒤뜰에서부터 달려오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보이자, 짐스커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개를 무서워하는군.”
“제, 제발 좀 치워주십시오, 황자 전하!”
신의 걸작 같은 황자의 얼굴은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부탁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오히려 개를 향해 손가락으로 딱! 소리까지 냈다. 신호를 알아들은 개가 광견처럼 속력을 내며 달려오자, 짐스커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개보다 무서운 로아드네스의 길쭉하고 단단한 다리가 도망가려는 그의 발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버렸다. 순간 시간이 지독히 느리게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원망스레 뒤돌아본 로아드네스는 붉은 눈을 번뜩였다. 날카롭게 올라간 한쪽 입꼬리에 시선이 닿기도 전에, 짐스커는 앞뜰 돌바닥에 처참하게 넘어졌다. 마침내 다가온 개가 널브러진 그의 뺨을 세차게 핥아 올리자 눈앞이 노래지고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미친개는 이 개가 아니라…….’
저 황자다! 짐스커는 로아드네스의 걱정 가득하고 가증스러운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기절했다.
*** 로아드네스가 위풍당당하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사용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나는 황급히 그에게 나이트가운을 여미라 속삭였다.
“일부러 보여주는 건데.”
“뭐라고요?”
“그렇잖아. 네 사용인들도 그렇고 내 부하들도 미리 다 속여 놔야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더 조급하게 움직일 거 아냐.”
“그래서 같은 이유로, 일이 끝날 때까지는 말을 서로 높이는 게 좋겠다고 했잖아요.”
노에비안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새벽같이 백작저로 온 로아드네스에게 나는 앞으로 서로 말을 높이자고 권했고, 로아드네스는 겉으로는 수긍하면서도 그 말에 내심 불만이 있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부인.”
로아드네스가 졌다는 듯 대답했다.
“짐스커 경은 어쩌시려고요?”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로아드네스가 햇살이 쏟아지는 커다란 창밖으로 기사들이 짐스커를 번쩍 들고 백작저 밖으로 내쫓는 것을 지켜보았다. 표정은 싸늘한데 입꼬리는 올라가 있어서 마치 대단한 악당처럼 보였다.
“전하?”
“뭘 어째. 저대로 버려두면 알아서 일어나 쪼르르 제 주인에게 이르겠지.”
“전하.”
“버려두면 알아서 제 주인에게 돌아갈 겁니다, 부인.”
백작저 사용인들은 멀찍이서 힐끔힐끔 지켜보면서도, 가끔 로아드네스와 눈이 마주치면 히끅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듯이 숙였다. 하긴. 백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제집처럼 돌아다니다가, 짐스커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상의를 벗어 던지고 나갔으니 그 기이한 행동이 문제아란 소문에 불을 붙였겠지.
“무슨 생각하십니까.”
“잠깐 좀 따라오세요.”
나는 조용히 그를 이끌어 내 집무실로 데려왔다. 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완전히 치고 나서야 어느새 아담한 소파에 앉아 몸을 묻은 로아드네스를 돌아보았다. 새벽같이 내 걱정 때문에 찾아온 로아드네스에게 내가 뭐라 했더라.
“대공비 내정자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죠.”
“아무도 없는데도, 그럴 거야?”
“네.”
끝까지 말을 높이려는 내가 밉지는 않은 듯 희미하게 웃던 로아드네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근처에 앉아 숨을 골랐다. 나 역시 짐스커가 왔다는 소식에 노에비안이 마음을 제대로 먹었음을 인식했던 차였다. 로아드네스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오늘부터 대공저로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드리엔 아니, 부인. 나는 이 불안한 짓을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
로아드네스는 아까 장난기 어린 모습은 싹 지우고 낮게 말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대공비 내정자가 되었다는 말을 새벽에 했을 때 깊게 침잠했던 바로 그 눈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사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없습니다. 그 부인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
“내가 돕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부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도와야 할 게 있다면 말하십시오. 로아드네스는 그리 말하며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진득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선을 받자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의 일기장을 집어 다시 돌아왔다.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느리게 그곳으로 떨어졌다.
“블리에 아카시아의 일기장이에요.”
로아드네스가 조용히 손을 뻗어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이게 그 일기장입니까?”
낮아진 목소리와 함께 노에비안이 날 죽이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그의 눈이 분주해졌다.
“그 일기장은 다른 곳에 있어요. 말씀드린 내용 외에는 거의 낙서뿐이라 보나 마나고요. 이건 얼마 전 백작의 금고에서 나온 거예요.”
일기장을 손으로 넘길수록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 그는 확실히 나보다 더 많은 내용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남작 부인 실종사건에 대한 건으로 바쁘시겠지만, 여유가 되실 때마다 그 일기장을 좀 봐주세요. 해석을 해주시면 더 좋고요.”
“첫 장부터 개…… 헛소리를 지껄이는 터라 화병나겠군.”
그가 혼잣말을 하듯 낮게 읊조렸다.
“아마 대공은 가까운 시일 내로 저를 대공저에 들이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의 반듯한 미간이 살풋 구겨지는 게 보였다.
“그러려고 대공비 내정자 타이틀을 달아주는 것일 테니까요.”
“그럼 어쩔 생각입니까?”
“대공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찾아오게 하려고요. 아마 시녀 노릇도 당분간 못 하게 될 거예요.”
“……자주 못 만난다는 말로 들립니다.”
“네, 아마 우리는 자주 못 만날 거예요.”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눈을 깔았다. 삐딱한 자세로 앉아 속눈썹 밑으로 그늘이 질 만큼 눈을 내리깐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동시에 불만을 참는 듯 보였다.
“!”
그리고 작은 티테이블 아래로, 그의 큼직한 손이 다가와 내 무릎을 꽉 잡아 왔다. 놀란 눈을 들어 그를 살피자 그가 표정 변화 없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제대로 여미지 않은 나이트가운 사이로 그의 맨몸이 그대로 보여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황급히 옆에 두었던 그의 상의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 그러다 문득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 소리의 정체를 꺼내 보았다.
“?”
눈도 떼지 못하고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내 손위에 내가 한참 전에 준 쿠키 꾸러미가 얹어졌다. 그의 품 안에서 꾸깃꾸깃해진 포장지가 꽤 애처로웠지만, 리본을 풀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 안에 뭐가 있든 꽤 끔찍한 모양새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걸 왜 가지고……?”
그때였다.
“전하!”
로아드네스는 단번에 그것을 내 손에서 거둬가더니 리본을 풀어 쿠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도, 도대체 무슨!”
잠깐 그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부인이 세상에 있는 게 실감이 안 나서 항상 들여다봤는데, 요즘 바빠서 이걸 넣어둔 곳에 자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로아드네스는 정말 대단하게도 코앞에 놓인 물도 마시지 않고 내게 웃었다.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근사한 미소를 그렸지만, 벌어진 내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맛있네.”
“맛있을 리가 없잖아요!”
“맛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두 손으로 그가 풀어놓은 포장지만 와락 구기고 있던 나는 똑똑히 보았다. 가루나 다름없던 쿠키를 꿀꺽 삼키고 맛있다고 우기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순식간에 반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