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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코완의 비밀 (61/171)

61. 코완의 비밀2021.12.01.

로아드네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손님방 침대에 누웠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 사건으로 일이 많은 이때에 태평해 보이는 주군을 아주 못마땅하게 보던 닐은 로아드네스가 저를 쳐다보자 억지로 빙긋 웃고는 손님방을 나갔다. 나는 닐을 내보내고 문에 기대서서 로아드네스를 지켜보았다. 그는 민망한지 팔로 눈을 가리고 한참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16558461639532.png“배탈 같은 ‘하찮은’ 병은 걸려본 적 없으시다면서요?”

16558461639539.png“……네가 준 건 하찮은 게 아니잖아.”

16558461639532.png“전하.”

16558461639539.png“부인이 내게 준 건 하찮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상황에 말을 낮춘 걸 지적한 건 아니었지만 로아드네스는 퍽 성실하게 답했다.

16558461639532.png“그럼 제 ‘대단한’ 쿠키를 먹고 앓아 누우셨으니 제가 곁을 지켜야겠군요.”

팔로 가려졌던 눈이 빼꼼 나왔다. 어디가 정확히 아픈 건지 말도 안 해주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똑똑-. 등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문을 열어보니 요나가 있었다.

16558461639557.jpg“마님. 마담 르블레아께서 오셨어요.”

16558461639532.png“아,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나?”

16558461639557.jpg“일단 응접실로 모셨는데 손님께서 계시니 돌아가시라 할까요?”

16558461639532.png“아니야. 선약이고 할 말도 있으니 지금 갈게.”

요나가 힘차게 대답하고 사라지자 문을 닫는데, 어쩐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눈에서 팔을 완전히 내린 로아드네스가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저 이불을 거둬내면 불퉁한 입술이 나올 것 같아 조금 우스웠다.

16558461639532.png“중요한 손님이 오셔서요. 다녀올게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해 보였는데,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자 로아드네스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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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접실로 향하니 이미 모든 것들이 세팅된 상태였다. 마담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저택을 방문해 내 옷을 만들어주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표정이 밝아진 마담은 함께 온 직원들을 전부 내보내고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눈을 빛냈다.

16558461639557.jpg“저보다 중요한 손님이 계신 것 같던데, 영광입니다. 부인.”

16558461639532.png“사용인들의 입단속을 좀 더 시켜야겠어요.”

16558461639557.jpg“떡하니 황실기사단이 정문을 지키고 서 있고, 사용인들이 겁에 질린 데다가 부인의 하녀가 손님방이 있는 3층을 오가니 추측한 것이지요.”

16558461639532.png“마담은 사설탐정 같은 걸 해도 소질이 있겠어요.”

16558461639557.jpg“어머, 사실 어릴 적 꿈이었답니다.”

시답지 않는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진 마담이 호호 웃으며 은근히 미소 지었다.

16558461639557.jpg“저도 가십지를 자주 읽는 편이라, 요즘은 부인의 이야기를 스크랩해두고 있어요. 저는 두 분의 연애를 꽤 가까이서 지켜본 적도 있잖아요?”

16558461639532.png“마담, 사실 내가 2황자 전하를 기다리시게 하고 이렇게 나온 데는 이유가 있어요.”

신나게 떠들려던 마담의 입술이 뚝 멈췄다. 의아하게 뜬 눈이 나를 응시하자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58461639532.png“당분간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 노릇을 못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마담에게 궁에 들 때마다 황태자비 전하의 근황이나 그 주변 동향이 어떤지 살펴봐달라는 부탁을 하려고요.”

16558461639557.jpg“갑자기요? 황태자비 전하께 무슨 잘못이라도……?”

16558461639532.png“아직 소문을 내지 말아줬으면 하는 소식이 있는데요.”

마담이 벌떡 일어나 맞은편에서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왔다. 반짝이는 눈이 가까워지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16558461639532.png“내가 차기 대공비 내정자가 되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알을 또르르 굴리던 마담은 그 말뜻을 이해했는지 눈 크기를 키웠다.

16558461639557.jpg“트, 트로비카 대공비 말인가요?”

제국에 대공비 자리는 그 이름밖에 없으니 정확한 답이었다.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마담이 손톱에 온갖 보석을 붙인 손으로 제 입을 턱 막았다. 하지만 일렁이는 눈의 크기는 아까보다 훨씬 커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16558461639557.jpg“그, 그, 그, 그럼…… 부인의 재혼 상대는 트로비카 대공 전하이고, 연인은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이신 건가요?!”

16558461639532.png“뭐 그런 셈이랍니다. 지금은요.”

소리 없는 비명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마담이 크게 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달아오른 얼굴로 내게 더 가까워졌다. 입을 막았던 제 손을 손수건으로 쓱쓱 닦은 그녀는 곧이어 가지런히 무릎에 놓인 내 손을 아프지 않게 꼬옥 붙들었다.

16558461639557.jpg“저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사실 부인 덕에 최근 한 달간 저희 의상실 매출이 아주 늘었답니다. 부인께서 2황자 전하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주기적으로 가십지에 올라와서 부인의 스타일에 대해서 자주 언급이 되거든요.”

16558461639532.png“저번에 들었던 기억이 있군요.”

16558461639557.jpg“아마 부인이 2황자 전하는 물론이고, 트로비카 대공 전하를 사로잡아 대공비 자리까지 오르시게 된다면 매출이 더 늘 거예요!”

르블레아는 주섬주섬 자신이 챙겨온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동안 늘어난 수익을 정리한 표였다. 한눈에 보아도 이전과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어 보였다.

16558461639557.jpg“그동안 제 드레스가 예술적이라는 찬사는 많이 들었지만, 신분이 지극히 높은 분들만 찾으신다는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근데 부인 덕에 고객층이 훨씬 넓어졌지 뭐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분점도 낼 생각이고요.”

16558461639532.png“마담의 명성은 이미 드높았으니 그런 말은 말아요.”

16558461639557.jpg“그래서 말인데, 저는 이번 분점의 수익을 부인과 나누고 본격적으로 제 뮤즈로서 부인을 내세우려 했어요.”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서류 가방을 척 열어 보여주자 계약서 같은 종이들이 있었다.

16558461639557.jpg“그런데 이렇게 좋은 소식을…… 너무 축하드려요! 제가 더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요? 이제 그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오르신다면, 제가 뮤즈로 모실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마담이 우왕좌왕 하는 동안 내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16558461639532.png“내가 시녀 일을 못 하는 동안 소식을 전달해주는 것이면 충분해요. 우리는 서로 돕는 관계잖아요? 그리고 대공비 자리는 내정만 되어 있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니 너무 흥분 말아요.”

16558461639557.jpg“어차피 대공비가 되지 않으셔도 부인께서는 이미 점점 유명세를 얻고 계시다고요. 대공 전하와 엮이시는 순간부터 더 그러실 테고요.”

마담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나는 빙긋 웃으며 아까부터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16558461639532.png“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번에 황태자비 전하와 내 옷을 만들 때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있는데 어때요?”

16558461639557.jpg“무엇인가요?”

그녀는 어떤 것이든 수용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16558461639532.png“보석을 좀 많이 달아보면 어떨까요? 아니면 보석 공예품 같은 것들을 붙이든가요.”

16558461639557.jpg“보……석이요?”

론타에서는 주로 보석을 가슴 한가운데에나 치마 끝자락에만 장식했다. 보석이 귀했기 때문이다.

16558461639532.png“마담이라면 이렇게 소재만 제시해도 영감이 솟아오를 거라 믿어요.”

16558461639557.jpg“그야 당연하지요, 부인.”

마담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16558461639532.png“그리고 내가 추천해주고 싶은 보석점이 있는데…….”

16558461639557.jpg“말씀만 하세요.”

16558461639532.png“노우라 주세타 자작 부인의 보석점에서 공급을 받아보면 어떨까 해요.”

16558461639557.jpg“황태자비 전하의 시녀이신, 주세타 자작 부인 말씀이신가요?”

16558461639532.png“네. 서로 도우면 좋잖아요. 물론, 그분의 마음도 같다면요.”

16558461639557.jpg“……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었어요.”

16558461639532.png“마담은 슬쩍 운만 띄우고, 내가 여러 준비로 시녀 일을 쉬는 게 심심해서 자작 부인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면 좋겠어요.”

16558461639557.jpg“맡겨주세요.”

마담 르블레아의 꿈속을 걷는 듯한 얼굴을 보자, 나는 노우라가 제 발로 날 찾아올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마담은 그 후로 한참을 재잘대다가 일까지 완벽히 마무리하고 백작저를 나갔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손님방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자리를 오래 비워두었다. 똑똑-. 손님방에 노크를 하자 무언가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16558461639532.png“전하?”

몸이 안 좋은 로아드네스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 급히 문을 여는데, 운동이라도 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맨몸에 급히 셔츠를 입는 로아드네스가 보였다. 나는 누가 볼까 봐 급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16558461639532.png“몸이 부, 불편하신가요?”

햇빛에 반짝이는 탄탄한 몸을 보자 발음이 살짝 꼬였다. 로아드네스는 몸이 좋지 않은지 떨리는 손으로 열심히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16558461639532.png“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리고 그의 손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빛을 등지고 선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지만, 살짝 달아올라 불그스름했다. 나는 공기가 사라진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면서 서서히 다가갔다. 반쯤 채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는데, 씨근덕대는 그의 맨가슴이 셔츠 사이로 보였다.

16558461639532.png“아프신데, 왜 옷을 벗고…… 운동이라도 하셨나요?”

16558461639539.png“……약한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서.”

16558461639532.png“아플 때는 푹 쉬셔야죠.”

그에게서 항상 나는 라벤더 향기에 묘한 땀 냄새가 섞여 있었는데 역하기는커녕 묘한 체향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선명히 솟은 쇄골이며 쩍쩍 갈라진 성난 근육에 자꾸 눈이 가서 나는 애써 내 손만 보며 단추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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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의 단추를 채우고 그를 올려다보자 어둡게 반짝이는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숨결이 놀랄 만큼 가까이 있는 걸 느끼고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똑똑-.  

16558461639557.jpg“마님! 트로비카 대공저에서 서신이 왔어요!”

나는 기묘한 긴장감을 뒤로하고 문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눈치 빠르게 서신만 전달한 요나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내일부터 대공저에서 살아도 좋아. 사람을 보내지.」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꽤 진득히 느껴졌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괜찮다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

16558461639532.png“내일부터 대공저로 가게 되었어요.”

로아드네스는 여전히 아까 나를 내려다보던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많이 아픈 걸까? 나는 그를 부축해주기 위해 다가갔다. 그때 로아드네스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16558461639539.png“축하한다고 해야 하는 건가?”

픽 웃은 로아드네스가 두어 번 마른세수를 하고 나를 깊게 응시했다.

16558461639539.png“뭐든 말하십시오. 하녀로 변장이라도 하라 하면 그리 할 생각도 있으니까.”

16558461639532.png“누가 봐도 사내 체형이라 아무도 믿진 않겠지만요.”

16558461639539.png“……부인이 어릴 적 원하던 그 건장한 사내의 모습입니까?”

16558461639532.png“네?”

16558461639539.png“지금, 나 말입니다.”

로아드네스가 은근히 말을 돌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만난 사내 중에 로아드네스만큼 건장한 사람이 있던가? 두 팔로 다 감싸 안지도 못할 어깨와 부딪히면 오히려 내가 깨질 것 같은 단단한 몸을 보았다. 그리고 쭉 훑어내리던 시선을 돌연 그의 얼굴로 올리자, 그의 귀가 묘하게 빨개져 있는 게 보였다.

16558461639532.png“전하?”

16558461639539.png“부인이 원하던 이상형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심각한 상황에 이상형 타령을 하는 로아드네스가 조금 어이없었지만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뭐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제 뺨을 몇 번 문지르던 로아드네스가 표정을 금세 바꾸었다. 보고 있으면 참 재밌는 사내였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여유롭다가도 이상한 포인트에 긴장하고 눈치를 살피곤 했으니까. 한참 그리 있던 로아드네스가 조금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16558461639539.png“혼자는 못 보냅니다.”

16558461639532.png“요나도 갈 거고, 할 수 있다면 마지도 데려갈 생각이에요.”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 계획을 알면서도 걱정이 되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을 테니까.

16558461639539.png“……일단 코완이라도 데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로아드네스가 경비견으로 두겠다며 백작저 뒤뜰에 풀어놓은 코완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16558461639532.png“대공도 코완의 존재와 이름을 알아요. 제가 예전에 코완의 행방을 물은 적 있거든요.”

16558461639539.png“……그가 뭐라 답했습니까?”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는 꽤 음산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그에게 다가간 나는 재빨리 다른 주제로 화제를 전환했다.

16558461639532.png“글쎄요, 기억이 안 나서요. 그보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코완이라는 이름의 뜻은 뭔가요?”

차게 식었던 얼굴이 다시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그 놀라운 변화를 생경하게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16558461639539.png“우리 중간 이름을 땄습니다.”

터질 것 같은 얼굴은 그가 열이 나고 아파서일까?

16558461639539.png“로아드네스 코즈마 드 론타의 코,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의 완.”

아니면 자신만 알고 있던 비밀이 탄로 난 것만 같은 부끄러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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