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대공비의 침실2021.12.04.
노에비안의 침실은 완전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제 아카시아 백작저로 보냈던 짐스커가 추한 꼴로 돌아왔다. 격분해 정식으로 황제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로아드네스를 제재해 달라 요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황제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어이가 없었다. 로아드네스가 이끄는 황실 제 2 기사단은 현재 ‘쿠로세다 남작 부인 실종사건’ 수사를 명목으로 백작저를 점거했다는 것이다. 짐스커는 새벽같이 날아온 황제의 답변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로아드네스의 백작저 점거는 사적인 감정이 매우 많이 개입되어 있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제는 노에비안이 블리에를 곁에 두려 한다는 말을 황태자에게서 들었는지,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내버려 두라는 첨언까지 했다. 황제가 공식적인 서한 말미에 친필로 쪽지까지 붙여 오는 것은 꽤나 의례적인 일이라 노에비안은 한참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하. 어찌할까요?”
“…….”
로아드네스가 가만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벌써 ‘내 여자’라는 표현만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블리에를 들여와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적당한 때가 되면 영지로 잠시 보낼 계획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할 일이 많은 대공비 자리에 블리에를 앉혀둘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블리에 역시 제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로아드네스를 이용한다고 말했으니 불만은 없으리라 믿었다. 어차피 장례가 끝나면 노에비안은 수도보다 영지에 더 자주 머물 테니까. 대공비 자리에는 언젠가 더 이득이 되는 가문의 영애를 데려와 앉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로아드네스가 블리에를 원하고, 황자비 자리에까지 그녀를 앉힐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블리에에게 선택권이 생긴다는 말 아닌가. 평소의 블리에 같았다면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어제저녁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토록 소원하던 일을 이루어주었으니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렀다며 아주 뻔뻔하게 짐마차에 짐을 한가득 실어 왔겠지.
“짐스커 경. 자네 아버지가 뭐라던가?”
“……예?”
“오늘 아침에는 모두가 짠 듯이 정문을 지키고 있지 않더군. 자네에게 무슨 언질은 없었나?”
있었다. 짐스커는 어제 바지를 적신 채 대공저로 돌아오는 길에 정문에서 맞닥뜨린 제 아버지 레일론 백작을 떠올리며 낯을 붉혔다.
“송구합니다.”
“사과 말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 싶은데.”
‘대공이 이토록 우리를 개무시하니, 우리도 다른 수를 쓰는 수밖엔 없다’라고 했던가. 레일론 백작은 노에비안이 대공이 되기 전부터 황태자파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노에비안의 세력이 아닌, 황태자의 세력이었다. 아직 젊은 데다가 융통성 없는 황태자파 수장인 노에비안을 늘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고. 짐스커는 노에비안에게 할 말을 고르느라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노에비안은 그 짧은 침묵으로 모든 말을 알아들은 듯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은 겪었어야 할 갈등이었다. 그들이 자신이 아닌 황태자에게 충성하는 이상.
‘어쨌든 블리에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
더 이상 블리에를 날뛰게 둘 수도, 카스타냐 공작이 제게 영향을 끼치려 해서도 안 된다.
“각하?”
노에비안이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짐스커가 흠칫하며 다가왔다.
“내가 직접 백작저로 가지.”
로아드네스와 충돌을 해서라도,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명이야 늦게 전달받았다 하면 되는 것이고 백작가의 주군인 자신이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명분도 있었다. 똑똑-. 의자에 대충 걸쳐놓았던 재킷을 집어 들자마자 조용하던 집무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에비안과 짐스커의 시선이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향했다.
“각하, 아카시아 백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보고에 짐스커가 깜짝 놀라 노에비안을 보았다. 노에비안의 얼굴은 방금까지 바위처럼 굳어 있던 것과는 달리, 확연히 풀어져 있었다. 짐스커는 그것이 꽤 이례적이라고 생각했다.
*** 끝끝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실종 사건을 수사하러 간 로아드네스를 배웅하고, 나는 대공저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어찌 될지 몰라 우선 요나와 하녀 몇 명만을 데려왔다. 노에비안이 미리 내 방을 꾸며놓으라 지시했다는 말이 사실인 듯 대공저 사용인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애니와 그녀의 무리는 보이지 않고 마리만이 나를 반겼다. 나는 자연스럽게 쓰고 왔던 모자를 마리에게 안겨주고 분주해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침실은?”
“내가 안내하지.”
위쪽 계단에서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의 소란으로 잔뜩 화가 났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안심이 되기는커녕 마음이 차게 식었다. 내 시신을 발아래 두고, 이렇게 잘 꾸며놓은 대공저에서 정부와 함께할 생각에 상기된 얼굴을 보자 저절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그런 날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노에비안의 얼굴은 최근 본 그 어떤 표정보다 밝았다. 나는 실소하며 내밀어진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꽉 붙들어오는 노에비안의 손에서 나는 어젯밤 내내 그를 괴롭혔을 불안을 읽어내렸다.
“여기가 앞으로 지내게 될 침실이야.”
그가 날 데려간 곳은 본래 내 침실이 아닌, 그 옆방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블리에의 취향인 끔찍한 분홍으로 점철된 벽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집사 가스팔이 뒤따라 들어오더니 여기저기 자신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거기에 걸린 끔찍할 만큼 강렬한 분홍색 커튼이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위해 덧댄 시폰 커튼. 고풍스럽고 거대한 콘솔은 무슨 나무로 만들어진 최고급품이라는 하잘것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지루한 표정으로 그것을 듣고 있던 나는 곧바로 손을 휘저었다.
“됐으니 나가게.”
“예?”
“두 번 말해야 하나?”
가스팔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파드득 떨더니 노에비안의 눈치를 살피고 침실을 벗어났다. 나는 자연스럽게 노에비안의 손을 놓고 새로운 분홍 침대 위로 다가가 앉았다.
“대공비 내정자라는 말은 이름뿐이었나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가 보군.”
“네. 대공비의 침실은 이 옆방이잖아요. 한 번 가본 적도 있는 곳을 제가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셨나요?”
“아니. 당신은 지금 그곳에 갈 수 없어.”
“왜죠?”
“오고 싶으면 와.”
‘오고 싶으면’이라니. 마치 제 방처럼 말하는 통에 나는 헷갈리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를 마주 보던 노에비안이 가스팔이 닫고 나간 침실 문을 도로 열며 내게 입을 열었다.
“지금 거긴 내 방이나 마찬가지니까. 동침하고 싶거든 와.”
“!”
“전부인의 장례도 끝나기 전에 내정자와 붙어먹는다는 소문은 내게도 썩 달갑진 않지만,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보지.”
전혀 웃긴 농담이 아니었는데 그는 낮게 웃으며 쉬라는 말을 지껄이고 나갔다.
“쉬라고?”
감히 그런 소리를 하고 쉬라니, 제정신인가? 어이가 없어서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요나가 부리나케 뛰어 들어왔다.
“마님, 대공께서는 궁으로 입궁하실 준비를 하신다는데요?”
“됐어. 마중 같은 건 나가지 않을 거니까.”
“네. 그런데 대공께서 저를 빼고 나머지 사용인들은 다 백작저로 돌아가라 하셨어요.”
“그럴 줄 알았단다.”
나는 창밖으로 대공저 입구에 있는 거대한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곧이어 노에비안이 바쁜 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타 떠나는 것이 보였다.
“요나. 마리를 불러오렴.”
*** 내게 불려온 마리는 주절주절 내가 묻는 말에 대답했다. 대공비의 침실은 도난 사건이 일어난 뒤로 노에비안이 보는 앞에서 청소를 하고 드나들지도 못하게 문을 잠가 놓는다는 말이었다.
“젠장. 문을 잠가놔?”
“예, 예!”
“일단 알겠으니 나가봐.”
마리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놀란 듯 눈을 끔벅이는 요나를 보며 입을 막았다.
“내가 방금 젠장이라 그랬니?”
“네. 2황자 전하를 모시는 줄 알았어요.”
“망할. 언젠가 그에게 거친 입에 대해 한 소리 하려 했는데 되려 내가 물들어 버렸잖아.”
“…….”
“……내가 방금 망할이라 그랬니?”
“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마님.”
요나는 로아드네스와 닐과 며칠 함께했다고 금세 익숙해진 듯 웃어보였다. 나는 분홍색으로 범벅이 된 방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겼다. 이 대공저 안에서의 내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에비안이 선을 명확히 긋기 전에 대공비의 침실이며 집무실부터 뒤지려 했다. 내가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무실보다 만만한 침실 문이 잠겨있다는 건 이렇게 노에비안이 집을 비워 놓은 절호의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요나. 내 짐가방에서 제일 숭한 옷을 꺼내오렴.”
“……숭한 옷이요?”
“응.”
대공비의 침실은 가운데 욕실을 두고 대공의 침실과 연결 되어 있는 구조였다. 고로 노에비안의 침실에 들어간다면 욕실을 통해 침실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공교롭게도 욕실 문은 욕실 안에서만 잠글 수 있기 때문에 욕실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대공비의 침실로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똑똑-. 마침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나가 내 눈치를 보며 문을 열어주자 하녀장 소피가 아주 느릿하게 지팡이를 짚고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거의 눈을 바닥에 처박고 있는 애니의 무리가 따라 들어왔다.
“대공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인. 하녀장 소피입니다.”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기 전까지는 블리에 님이라고 불러도 좋네, 하녀장.”
“감사합니다.”
소피는 얌전한 눈으로 활짝 열린 짐가방을 쳐다보았다.
“짐 정리는 사용인들에게 시키시면 될 텐데요.”
“아, 그건 내 하녀가 할 테니 걱정 말게. 그보다 마침 자네를 보러 가려던 참이었어.”
“분부하실 일이라도?”
“목욕물을 준비해주게.”
소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에 걸린 시계로 향하자 내가 낮게 웃었다. 보통은 자기 전에 씻기 때문이다.
“대공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미리 좀 준비를 해두려는데.”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소피의 축 처진 눈이 커지고 주름진 두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브, 블리에 님?”
“남편을 맞이하기에 그리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지 않나.”
요나가 어느새 내 옷을 찾느라 짐가방을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강렬하게 흔들리는 요나와 소피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대공 전하 침실에서 미리 기다리려고. 다들 이해할 거야, 그렇지?”
대공을 유혹했던 정부가 대공저에 들자마자 침실에서 미리 그를 기다리는 그림은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일까. 그를 기다리는 척 대공비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대, 대공 전하의 침실이요?”
“그럼.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 뭘. 목욕물을 준비하게.”
“그, 그렇다면 목욕물을…….”
“대공 전하 침실에 있는 욕실을 쓰고 싶은데.”
노에비안이 돌아올 때까지 대공비의 침실을 뒤진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