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2021.12.08.
노에비안의 침실로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주인의 침실을 이렇게 바로 열어줘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만 나는 곧 이해했다. 하녀장이 직접 열어준 노에비안의 침실은 놀랄 만큼 휑하고 단조로웠다. 이전에도 필요한 것만 있는 깔끔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황량함마저 느껴졌다. 화병은커녕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방은 최소한의 가구만 있었고, 슥 둘러보기만 해도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정돈되어 있어서 뭔가를 훔쳐 가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중요한 물건들은 집무실에나 두나 봐.’
“목욕물은 지금 준비하겠습니다, 블리에 님.”
손수 문을 열어줬던 소피가 애니에게 뭐라 속삭이자 애니가 제 무리를 데리고 급하게 나갔다.
“목욕 시중은 요나에게서만 받으려 하는데.”
나는 그런 하녀들을 끈질기게 보다가, 공손히 서 있는 소피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분부해주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소피를 보던 나는 문가에 서 있던 마리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애니가 목욕물을 준비하는 동안 잘 감시하렴.”
흠칫하던 마리마저 나가자 나는 자유롭게 노에비안의 방을 둘러보았다. 서랍은 잠겨 있지도 않았고, 열어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님?”
요나가 도둑처럼 이곳저곳 열어보는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침실 조사가 끝나자마자 노크 소리와 함께 애니의 무리가 목욕물을 날라왔다. 김이 폴폴 오르는 목욕물이 욕실 안 욕조에 채워지는 것을 보며 나는 욕실과 연결된 또 다른 문을 보았다.
‘저 문만 열면…….’
“준비는 끝났습니다, 부인.”
곧이어 온갖 향기가 나는 허브와 꽃잎, 향유까지 대령한 애니가 그제야 바닥에 박혀 있던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목욕 시중을 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못 본 채 하며 요나에게 눈짓했다. 요나가 얼른 나가라는 듯 침실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애니가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더니 나갔다. 그 뒤를 마리가 졸졸 따랐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요나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요나, 아까 말한 옷을 침대 위에 두고 넌 여기 앉아서 아무도 욕실로 못 들어오게 지키렴.”
내가 직접 노에비안의 침대 위에 앉으라 가리키자 요나는 머뭇대다가 살포시 엉덩이를 갖다 붙였다.
“혼자 하시게요? 신경 써서 준비하시려면 제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으세요?”
“느긋하게 쉬고 싶어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꼭 지켜줘. 웬만하면 침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네! 걱정 마세요!”
“특히 정문으로 대공의 마차가 보이면 욕실 문을 두드려줘.”
“네! 마님!”
요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벌써부터 창밖을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뿌연 김이 올라오는 욕조에다가 라탄 바구니에 담긴 온갖 향기 나는 것들을 쏟아부으니 진한 허브 향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나는 천천히 대공비의 침실 쪽 문으로 다가가 심호흡을 했다. 혹시라도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는 달리, 문은 허탈할 만큼 손쉽게 열렸다. 관리가 잘 되어 소리조차 나지 않는 문을 넘어, 나는 한때 내 것이었던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세상의 전부였던 꽤 널찍한 방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방금까지 있었던 노에비안의 방보다는 확실히 가구도, 숨길 곳도 많은 곳. 나는 홀린 듯이 이전에 한 번 털었던 전적이 있는 침대 협탁의 서랍부터 열어보았다. 과연 저번에 못 봤던 물건이 늘어난 걸 보아, 훔쳐 간 이들이 대부분 토해낸 것 같았다.
‘어머니의 목걸이는 없네.’
그날 이후로 노에비안의 목에 걸려 있지 않은 것 같아 분명 여기에 도로 넣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노에비안을 보면 가장 먼저 확인해봐야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간. 로아드네스는 수도경비대 본부에 있었다. 대공저에 들어간 아드리엔이 걱정되어 오는 내내 대공저 앞으로 말을 달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아야만 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한 참이었다. 수도경비대는 경비대장이 경질된 이후 긴장감이 감돌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강 면에서 해이했는데, 막상 소문의 2황자를 직접 마주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 상태로 차렷 자세 중이었다. 황자님이 오신다고 마련해둔 고급 의자에 엉덩이 한번 붙이지 않은 로아드네스는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선 채로 보고서를 훑었다.
“몇 놈이 돌아가면서 썼군. 글씨가 개판이야.”
몇몇 간부가 흠칫했다. 돌아가면서 쓴 게 맞았기 때문이다.
“공무용 타자기도 팔아먹었나, 글씨도 개발새발.”
예산이 부족해 팔아먹은 것도 맞았다.
“빈센토, 서류는 네가 확인해서 다시 쓰게 만들어.”
“예, 전하.”
조악한 서류를 빈센토에게 넘긴 로아드네스가 천천히 그들 사이를 걸었다. 수도 경비대원들은 본부를 포위하듯 둘러싼 황실기사단에 기가 팍 눌려 있었는데, 로아드네스가 지나갈 때마다 누가 숨통을 틀어쥔 것 같은 압박감에 휩싸여 식은땀만 흘렸다.
“대가리가 잘렸는데 죽은 줄도 모르는 놈들은 필요 없다.”
경비대장이 잘리고도 정신을 못 차렸단 뜻이었다. 거침없는 언사에 본부 집무실을 가득 메운 인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수도 한복판에서 귀부인이 실종되고, 한 달이 지났는데도 수사엔 아무런 진척도 없고. 네 놈들이 세금을 축낼 동안 얼마나 많은 부녀자가 또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
쓸모없는 놈들. 덧붙이는 말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까지 들릴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중년의 경비대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황자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 저희도 나름 밤낮으로 뛰고 있습니다. 벌써 수십 명이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고요.”
“그럼 왜 수십 명이 과로로 죄다 쓰러졌다면서 실적은 이따위지?”
“부촌의 인력은 일정 수 이상 뺄 수가 없고, 조사는 적은 인원이 빈민가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적에 대해서는 귀, 귀족 나리들 마차를 수색하는 게 저희로서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의 증언을 시작으로 몇몇 경비대원들이 더 말을 보탰다. 확실히 중앙귀족들이 많이 몰려 있는 구역은 배치된 인원만 많았지 조사 건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아드네스는 이들의 반응으로 미뤄보아, 빈민가만 조사했기에 수사에 진척이 없음을 짐작했다. 난처한 표정의 얼굴을 훑어보던 로아드네스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따라와.”
본부는 수도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인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도대체 2황자가 뭘 하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잠자코 따라왔던 수도 경비대는 로아드네스가 경비대 완장을 빼앗아 차고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거대한 마차 앞을 가로막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하!”
로아드네스의 바로 앞에 급하게 멈춰선 마차는 트로비카 대공저의 마차였다.
“맙소사!”
“미, 미친……!”
그들로서는 마차에 범인이 타고 있다고 써붙여 놓아도 세울 수 없는 마차였다. 로아드네스는 싸늘한 얼굴을 하고는 두드리지도 않고 마차 문을 열었다.
“검문 좀 하겠습니다.”
*** 궁을 향해 달리던 마차 안은 냉기만 감돌았다.
“검문?”
어처구니없는 말에 창밖을 내다보던 노에비안이 다짜고짜 문을 열어젖힌 간 큰 놈을 보았다.
“아, 대공.”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무 집행 중이네만.”
거침없이 마차로 올라탄 로아드네스의 뒤로 누군가의 짧은 탄식이 여러 번 쏟아졌다. 노에비안은 신경질적으로 마차 문을 닫고 어느새 제 맞은편에 앉은 로아드네스를 마주했다.
“수도에 구릿한 기운이 넘쳐서.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지 뭐야.”
“내리십시오. 입궁하는 길입니다.”
노에비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아드네스가 반쯤 일어나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는 물론, 노에비안이 앉아 있는 자리까지 연속으로 발길질을 했다. 쾅! 쾅! 하고 내리치는 발길질 소리는 금방이라도 튼튼한 마차를 박살 낼 듯 거셌다.
“아무것도 없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부드럽기는커녕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2황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영 헛소문은 아닌가 봅니다.”
낮게 읊조리는 노에비안의 표정도 딱 그만큼 싸늘했다.
“아, 그거. 맞아. 난 좀 미쳐 있지.”
로아드네스가 제 군홧발을 손으로 툭툭 털고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태연히 노에비안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 옆의 벽을 짚었다.
“누가 자꾸 내 걸 욕심내더라고. 2년 전에도. 지금도.”
노에비안이 가까이에서 본 로아드네스의 눈은 끓어오르는 용암 같았다.
“……전하의 것이라고 착각하셨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에비안이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자 로아드네스는 생각보다 산뜻하게 뒤로 물러나 마차 문을 열었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 사실 그대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탁-!
“트로비카 대공저의 마차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가도 좋다!”
순식간에 닫혀버린 문밖에서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웅웅대며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쾅! 쾅! 하는 발길질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노에비안이 앉은 자리가 푹 꺼졌다. 로아드네스가 확인이랍시고 밖에서 걷어찬 마차 바퀴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게 분명했다.
“이런, 어쩌나.”
침묵하는 노에비안의 눈에, 전혀 난처해 보이지 않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창문을 액자 삼아 비쳤다. 주변이 온통 경악으로 물들어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로아드네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머뭇대며 근처를 서성이던 수도 경비대 역시 저들에게 죄를 물을까 꽁지가 빠져라 그를 따라갔다.
“…….”
당황한 마부가 급히 말 한 마리를 풀어 마차 문 앞에 데려올 때까지, 노에비안은 방금까지 로아드네스가 앉아 있던 맞은편만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자꾸 내 걸 욕심내더라고. 2년 전에도.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겠지. 사실 그대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노에비안의 눈 흰자위에 어느새 붉은 실핏줄이 올라붙었다. 얼굴은 희게 질려 굳어 있었지만, 그 아래론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단단하게 다져진 마른 땅에, 로아드네스의 말이 날벼락처럼 내리꽂히더니 점점 균열이 가는 것만 같았다. 그 뒤로 노에비안이 마차 밖으로 나온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굴러가지 않는 마차를 길 한복판에 세워두고 우물쭈물하던 마부는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와 그에게서 고삐를 건네받고 말을 달리는 노에비안의 뒷모습을 멀거니 볼 수밖에 없었다. *** 노에비안이 술에 취해 저택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에 반쯤 엎드려 후문으로 들어온 터라 문지기 말고는 아무도 그의 출입을 알지 못했다. 이제 막 노을이 지려 하는 시간이었으니 평소 그의 귀가 시간에 비하면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소란 떨지 마라.”
생전 보기 힘든 주인의 비틀거리는 모습에 사용인들이 빠르게 다가오자 그가 모조리 그들을 물렸다. 여전히 머리는 터질 것 같이 들끓었고 로아드네스의 말이 마치 저주처럼 머릿속을 잠식했다.
‘사실 그대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아무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며 1층 구석에 있는 주치의 스피노의 방문을 두드린 그는 망설임 없이 항상 먹던 약을 요구했다. 스피노는 흉흉한 기세에 눌려 군말 없이 약병을 내밀었지만, 걱정스러운 기색은 지우지 않았다.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십시오, 특히 술과는.”
스피노의 조언을 뒤로한 채 노에비안은 그 길로 제 집무실로 들어가 받아온 약을 술에 타 들이켰다. 약은 평범한 수면제였지만 술과 함께 마시면 강력한 환각제가 되어 가끔 환상적인 꿈을 보여줬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아드리엔과 결혼했던 날의 꿈을 꾸었다.
“…….”
그런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아드리엔은커녕, 로아드네스의 망할 목소리만 더 크게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깨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집사 가스팔도 모조리 물린 노에비안은 술과 약에 절은 채로 제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 채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은 죽은 아내, 아드리엔의 침실 앞이었다. 한참 그 문 앞에 머리통을 기대고 서 있던 노에비안은 한참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곧, 제 품을 뒤져 열쇠 꾸러미 하나를 꺼내 침실 문을 따고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