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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왜 나를 배신했어? (64/171)

64. 왜 나를 배신했어?2021.12.11.

대공저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인 이 침실 안에는 내가 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살펴보았음에도 별다른 흔적이나 특별한 것도 없었다.

1655846242535.jpg‘받아놓은 목욕물에 진짜 몸을 담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만큼 내 몸은 초겨울임에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빠뜨린 곳은 없는지 찬찬히 둘러보는데 딱 한군데, 넓게 깔린 두꺼운 카펫 아래만 살펴보지 않았다. 침실 중앙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기에 설마 이 거대한 카펫 아래에 무언가 있을까? 싶다가도 빠짐없이 뒤져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낑낑대며 가장자리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쿵-. 침실 문 밖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 들리는 쩔그럭거리는 소리는 분명 열쇠 꾸러미 따위를 뒤적이는 소리였다. 주변이 워낙 조용하고 바깥의 인기척이 전혀 기척을 죽이고 있지 않아서 소리는 더 선명하게 귀에 박혀 들었다. 나는 들어 올렸던 카펫 끝부분을 재빨리 정리했다. 이대로 욕실 쪽으로 가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딸깍-.  

1655846242535.jpg“!”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바로 근처에 있던 벽장으로 숨어들었다. 숨이 찼지만, 크게 내뱉을 수 없어서 양손으로 코와 입을 모조리 막고 그 안에서 밭은 숨을 내쉬었다. 분명 문 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인기척은 한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 서 있다가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왔다. 벽장 통풍구 사이로 안에 들어온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1655846242535.jpg‘……노에비안.’

노에비안이었다. 그가 문을 닫아 다시 잠그는 데까지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벽장 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과 안의 시간이 다른 것처럼, 노에비안의 행동이 아주 느렸다. 그사이 거친 숨을 다 골라낸 나는 기척을 죽이고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통풍구 사이로 보이는 곳은 그가 들어온 입구와 내가 2년 내내 누워 있었던 침대였다. 침대에 털썩 앉은 노에비안의 손에는 반쯤 비워진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곧이어 품에서 약통을 꺼낸 그가 입에 몇 알을 털어 넣더니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한참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계속 휘청이던 상체를 침대 위로 고꾸라뜨렸다.

16558462425416.jpg“……엔.”

1655846242535.jpg“…….”

16558462425416.jpg“……아드리엔.”

전력 질주라도 하고 온 듯 씨근덕대던 그는 곧이어 뭐라 중얼거리더니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박제되어 갇혀버린 짐승처럼 굳어 그 꼴을 응시했다. 노을 지던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그의 낮은 흐느낌은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술을 많이 마시고 왔던 건지 벽장 안까지 술 냄새가 꽉 차서, 나까지 취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1655846242535.jpg‘왜, 이제 와서.’

조금 더 일찍 저런 모습을 보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던지 말던지 지금의 내 상황을 말해주지는 않았을까?

1655846242535.jpg‘바보 같았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지.’

아까부터 울렁거리던 이 속은 분명 저 꼴이 보기 싫어 속이 뒤틀린 것이었다. 무슨 용기가 생겨서일까. 나는 벽장 문을 열어, 촛불 하나 없는 어둑한 침실을 가로질렀다. 코를 강렬하게 찌르는 이상한 약 냄새와 알코올 향이 어찌나 센지 코가 얼얼할 정도였다.

16558462425416.jpg“……리엔. 아드리엔, 아드리엔……!”

1655846242535.jpg“노에비안.”

들썩이던 가슴과 토해내던 울음이 뚝 멈췄다. 침대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린 노에비안의 눈은 이미 초점이 없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표정은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 충분히 알 수 있어 더 분노가 솟았다. 도대체 뭘 잘했다고 그리워하고, 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655846242535.jpg“……왜 나를 배신했어?”

가쁘게 몰아쉬던 노에비안의 숨이 그 순간 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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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에비안은 그 이후 정말 내 유령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낮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서 침실 바닥을 울리자, 진정시켜보려 조금 더 다가갔다. 누가 소리에 놀라 들어와 보기 전에,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왜 나를 죽였는지. 어째서 몰래 정부를 두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16558462425416.jpg“배……신?”

그가 토악질을 하듯 겨우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퍽 애처로웠다. 노에비안은 침대 시트를 양손으로 그러쥐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 같았다.

16558462425416.jpg“그런 건, 당신이 날 사랑했을 때, 그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지.”

헛웃음과 함께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사라질 듯 작아졌다가도 다시금 커졌다.

16558462425416.jpg“당신은, 날, 사랑한 적 없어. 아드리엔. 아드리엔…… 나는, 나는 한 번도 내 것을 가져본 적이 없어. 당신도, 예외는 아니야.”

나는 서늘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6558462425416.jpg“하지만 난 아니었어. 적어도 난. 당신을 사랑했어. 지금도, 지금도…… 그렇지 않다면 내 꼴을 좀 봐!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이렇게 환상으로밖에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데도 구질구질하게…… 이렇게 잠들 수밖에 없는 나를!”

1655846242535.jpg“당신이 정부를 둔 건?”

16558462425416.jpg“……그 여자는 당신의 대용품일 뿐이야.”

나는 실소했다. 정신이 나가버린 노에비안과 마주하니 이다지도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을, 그동안 무엇 때문에 비위를 맞춰가며 질질 끌어왔나 생각하자 우스웠다.

1655846242535.jpg“그 대용품이 이제 진짜 대공비가 되잖아. 어때, 이제 만족해?”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여자가 경거망동하는 모든 행동을 보아넘기고, 봐주고, 끝내 버리지 못하던데.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이어 말했다.

1655846242535.jpg“그 정도면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16558462425416.jpg“아니야!!”

노에비안은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눈을 시뻘겋게 붉히며 울부짖었다.

16558462425416.jpg“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드리엔.”

노에비안은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내가 제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손을 휘저으며 나를 잡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처음과 같이 끊임없이 뭐라 중얼거렸다. 나는 참을성 있게 노에비안을 기다려주었다. 그는 앉은 채로 휘청였다.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무슨 힘으로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지 참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16558462425416.jpg“하지만…….”

한참 도리질을 치며 뭐라 중얼거리던 노에비안의 입에서 마침내 알아들을 만한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6558462425416.jpg“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겠어?”

내가 아닌, 허공을 노려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노에비안의 입에서 다시금 실소가 터져 나왔다.

16558462425416.jpg“내가 가진 모든 게 허상인데.”

1655846242535.jpg“…….”

16558462425416.jpg“황제가 없다면. 황태자가 없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 그게 나야 아드리엔.”

나는 낯설기 그지없는 노에비안을 끈덕지게 응시했다. 정말이지 낯설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빈틈없는 사람이 내뱉는 진심은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16558462425416.jpg“선인인 척하는 황제를 대신해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내가 아닌 황제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세워야 해. 그 길에는 또 피가 강을 이루겠지. 그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고작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든지 황제의 말 한마디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척박한 북부와 이 거대한 대공저…….”

그런 말은 그에게서 처음 들어봤기에,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그가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똑바로 섰다. 하지만 그도 잠시, 툭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나는 뻔히 보고도 붙잡아 주지 않았다.

16558462425416.jpg“이마저도 온갖 참견과 감시를 받고. 사용인 하나 내 손으로 뽑은 사람이 없지.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것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이 거짓된 삶 속에서 내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내게 걸어온 노에비안이 내 양어깨를 꽉 쥐었다.

16558462425416.jpg“내가 어쩔 수 있겠어. 내가, 내가…….”

같은 말만 반복하는 노에비안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지독한 술 냄새와 약 냄새가 내 머릿속까지 잠식할 것만 같았다. 이전 같았다면 그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을, 퍽 애처로운 내용의 고해 성사였지만 이미 더한 충격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일까? 길게 들어봤자 결국은, 끝없는 변명일 뿐이었다. 나를 죽인 것. 다른 여자를 정부로 두고 일기장에 나를 조롱하게 만든 것. 그가 만든 오해로 로아드네스까지 죽을 뻔한 것들을 떠올리면 도저히 눈앞의 남자를 곱게 봐줄 수 없었다.

1655846242535.jpg“……그래, 당신이 어쩔 수 있겠어. 아무리 나를 부르고 찾아봤자, 나는 이미 죽어버렸는걸. 그러니 이제는 대용품을 곁에 두고 하찮은 행복이나마 찾으려 노력해봐.”

1655846242535.jpg‘그 대용품조차 당신 것이 아니라는 절망에 휩싸이겠지만.’

나는 꽤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웃으며 말하는 내 얼굴을 응시하던 노에비안이 약한 충격을 받은 듯 휘청이던 것을 뚝 멈추고 서 있었다. 우리 사이에 고여 있는 것은 끝없는 침묵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노에비안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짙푸른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기 직전인 것이 보이자,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노에비안의 가슴을 꾹 밀어 침대로 보냈다. 몇 번 휘청이던 노에비안은 머리를 감싸 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침대에 쓰러졌다. 흔들어 깨워도 보았지만, 그는 그 상태로 얼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죽은 듯 쓰러진 노에비안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며 그의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챙겼다.

1655846242535.jpg“이거라도 가져갈게. 원래 내 것이었잖아.”

이어 거침없이 노에비안의 셔츠 깃을 들춰본 나는 곧 실망했다. 어머니의 목걸이가 없었다. 대공저에서 찾아야 할 게 하나 더 늘어났다. 나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변을 정리하고 욕실 문 앞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는데, 내가 죽었던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노에비안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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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242535.jpg“……아.”

울부짖는 그를 보던 내내 내 몸 아래 어딘가에서 조용히 들끓던 감정이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쌓여 있던 지저분한 감정들이었다. 그가 술에 취하든, 약에 취하든, 혹은 울부짖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655846242535.jpg‘내가 밟고 선 이 바닥 아래…… 내 시신은 우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곧 썩어갈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눈물은 뚝 멈추었다. 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듯,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노에비안이 누워 있는 침실 쪽으로는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이미 차게 식은 욕조에 몸을 담가 온몸을 깨끗이 씻었다. 노에비안의 침실로 들어가자, 요나가 불안한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16558462475542.jpg“마님! 너무 오래 나오지 않으셔서 들어가 봐야 하나 걱정했어요!”

나는 요나를 안심시키며 본래 내게 배정된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에비안에게서 가져온 열쇠를 잘 숨겨두고 요나에게 내 방은 절대로 다른 이들이 청소하게 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깨어난 노에비안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을 떴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심하게 약에 취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랫동안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던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정말 실물처럼 다가왔던 아드리엔의 환영을 떠올렸다.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말들을 그토록 열심히 내뱉은 적이 있었던가. 뭐라 말을 한참 쏟아낸 기억은 있는데. 정작 아드리엔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픈 와중에도, 아드리엔이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슬프게 웃던 기억 하나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해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똑똑-. 자신의 침실로 넘어온 노에비안은 식사를 가지고 들어오는 소리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16558462425416.jpg“식사는 하지 않…….”

1655846242535.jpg“식사는 하셔야죠.”

먹지 않으려 했는데,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 블리에였다. 블리에가 받쳐 든 나무 트레이에는 방금 구운 향긋한 빵이 따뜻한 김을 아지랑이처럼 피워내고 있었다.

1655846242535.jpg“눈 뜨자마자 맛있는 향기가 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요.”

16558462492767.jpg‘내 몸이 건강해지면, 당신이 온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당신을 위한 아침을 준비할 거예요. 눈뜨자마자 당신이 맛있는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불현듯 아드리엔과의 신혼을 떠올리던 노에비안은 두통도 잊은 채 태연히 하녀에게 세팅을 지시하는 블리에를 응시했다.  

1655846242535.jpg‘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여자가 경거망동하는 모든 행동을 보아넘기고, 봐주고, 끝내 버리지 못하던데.’

1655846242535.jpg‘그 정도면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게 아닐까?’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떠오르지 않던 환영 속 목소리가 돌연 튀어나와 머릿속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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