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숙부의 그늘에서 벗어나실 때2021.12.15.
노에비안은 잠자코 식사하는 블리에를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발밑에서 넘실거렸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블리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접시로 눈을 떨구기까지 했다. 시야에 블리에의 얼굴 대신 접시만 가득 들어온 순간, 노에비안은 자신이 사춘기 애송이 같은 짓을 하고 있다 자책했다.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물과 함께 삼키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블리에와 눈을 맞췄다.
“잘 알겠지만, 당신에 대한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아.”
블리에가 알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녀의 손이 닿은 커트러리며 냅킨, 접시 가장자리까지 시선이 따라붙었다. 노에비안은 자신의 시선이 그리 집요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결합을 누구도 반기지 않지. 적어도 내 가신 중에선 말이야.”
“…….”
“그러니 대공비의 장례식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는 외출을 삼가줬으면 하는데.”
“알겠어요.”
그동안 그녀의 망종에 대해 분노했던 것이 허탈할 만큼 가볍고 순종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노에비안은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블리에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악의도 반감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시기만 잘 넘겨주면, 장례가 끝나자마자 최대한 빨리 가문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해주지.”
이런 말을 한 건 노에비안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직 확실한 계획도 없는 일을 약속하는 것 말이다. 바쁘게 움직이던 블리에의 포크가 뚝 멈췄다. 한참 입에 든 것을 씹던 블리에가 그것을 꿀꺽 삼키고, 백포도주를 가볍게 마시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블리에는 아드리엔이 죽은 이후로, 저렇게 진심으로 웃은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활짝 웃고 있었다.
노에비안은 한동안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용품이라 생각하면서도 단 한 번도 아드리엔과 동일시해 본 적 없던 얼굴이 어제 아드리엔의 환상을 본 이후로 정말 아드리엔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닮아 보였다.
“당신이 이렇게 내 마음에 답을 해주는데, 나 역시 당신을 위해 열심히 배워서 당신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음, 신부 수업이라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제게도 기본적인 대공비의 업무를 공부할 수 있는 집무실이 필요할 것 같아요.”
“……생각해보지.”
생기 있게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나도 얼른 건강해져서, 당신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정말 아드리엔이 부탁을 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자신이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으니까.
“집사와 먼저 의논해 봐.”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뭔가에 홀린 듯,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시간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어제보다 훨씬 괜찮아진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군말 없이 제 침실로 틀어박힌 블리에를 보며 흡족했던 것도 잠시, 식사가 끝나자마자 전쟁이라도 나가는 것 같은 표정의 가신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직접 가신들을 만나보라 종용했으므로 더 이상 그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별관에 있던 대부분의 사용인들을 물리고, 시가를 입에 물었다. 본래 실내에서 피우는 취미는 없었지만, 낮부터 술이나 약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정신으로 저들을 상대하기에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으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방어였다. 씩씩대며 들이닥친 주제에 내민 종이 위의 글씨들은 매우 점잖았다.
“이게 다 뭔가?”
“자세히 보십시오.”
익히 얼굴을 아는 영애들부터, 귀부인들까지. 각양각색의 이름들을 늘어놓은 명단이었다. 전부 우르르 몰려온 가신들의 성을 뒤에 붙인 이름들이었다.
“청탁이라도 하려는 건가?”
“저희가 생각한 차기 대공비 후보들입니다.”
“내 침대 사정까지 걱정해주는 가신들이라니 눈물 나게 감동적이군.”
몇몇 가신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들 사이에서 노에비안이 수준 미달의 미망인 하나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문이 돈 참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재취라네. 그대들의 소중한 여식들을 나같이 나이도 있는 재취 자리에 밀어 넣고 싶나? 그대들의 여식들도 같은 생각인지 묻고 싶네만.”
“각하께선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으셨습니다. 이 상황에 농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가장 들끓는 눈을 하던 레일론 백작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가신들 중 가장 세력가답게, 제 여식인 칸나 레일론의 이름을 가장 위에 올려 둔 상태였다.
“2년 전에, 뜬금없이 동부 출신의 대공비 전하를 들이실 때는 저희 모두가 수긍했습니다. 소문처럼 각하께서 얼마큼 공녀를 사랑하시는지 알기 때문이 아니라, 급이 맞는 상대였기 때문입니다.”
레일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공녀였습니다. 한때 황태자비 후보로도 이름을 알렸던 피레타 공녀요. 그렇기에 저희는 사소한 불만 같은 건 넣어두었습니다. 각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시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서부 출신의 도리스 카스타냐는 황태자비로, 동부 출신의 아드리엔 피레타는 황태자파 수장인 트로비카 대공비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데, 뭐라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남편 잃은 미망인이라니요? 평민 출신의 근본 없는 대공비라니요?”
“대공비 자리는 사랑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 하나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황태자 전하를 위한 가장 큰 패를 어찌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버리십니까?”
이름만 가신이지 실상은 원로인 사람들. 노에비안은 타들어 간 시가를 커팅하며 그들이 마음껏 지껄이도록 그냥 두었다. 저들을 향해 카스타냐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황태자파가 동부와 서부로 갈라지게 둘 순 없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사랑에 미쳐 급이 안 맞는 결혼을 밀어붙이는 트로비카 대공이라는 포지션이 낫다 판단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셨죠? 늘 말했잖아요.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의 옆자리에 앉고 싶을 뿐이에요.’
‘제가 대공비 자리에 관심 있어 할 때 잘하세요.’
‘당신이 이렇게 내 마음에 답을 해주는데, 나 역시 당신을 위해 열심히 배워서 당신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위아래를 모르며 저가 옳다 떠들어대는 이들의 목소리보다 과거 블리에의 목소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아침에 보았던 블리에의 반짝이던 눈이 가슴에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생각해보지. 그러니 그대들의 주군을 너무 나무라지 말고 지금은 이만 돌아가지.”
“하지만……!”
“아니면 조문이라도 한 번 더 하던지.”
상중인 집에 와서 이렇게 주군을 닦달하는 건 그들이 생각해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는지 대부분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그러나 레일론 백작과 몇몇은 그대로 남아 마지막까지 심사숙고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떠났다. 노에비안은 그것이 레일론 백작의 경고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별관 앞을 차례로 떠나는 마차를 내려다보며 조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뜻이 곧 바르데날도의 뜻임을 안다면, 너희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관심사에 저들의 이익 분배 따위는 없다. 그것을 모르니 황태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감히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리라.
“다 아무 소용없는 몸부림이라는 걸, 언젠가는 깨닫길 바랄 수밖에.”
독한 시가 하나가 짧은 시간 동안 전부 태워졌다. 노에비안은 마지막 부분은 커팅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창밖으로 던졌다. 이만한 불씨로 대공저를 태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서부의 왕으로 불리는 대귀족. 황태자비의 아버지. 황태자의 장인이자 왼팔. 카스타냐 공작은 제대로 설명하자면 단 한 줄로는 부족한 대귀족 중의 대귀족이었다. 며칠 전부터 알현 신청을 해서 겨우 입궁한 그는 타들어 가는 자신의 속과는 달리, 정원을 거닐며 식물 이름 따위나 알려주는 황태자를 경멸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억지로 끌어올려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 차마 곱게 볼 수 없어서 드문드문 내리깔던 눈. 하지만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자신의 추천에 의해서가 아닌, ‘새로운 사랑’에 빠져서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시녀를 대공비로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인내심에 한계가 와버렸다. 이미 도리스를 통해 한 번 들었다 해서 그 충격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뱀 같은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결국 수를 썼군.’
전혀 상쾌하지 않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온 카스타냐 공작은 얼굴에 근심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제 사위에게 이제 대놓고 말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라콘에 계신 에페로 황자께서 고국을 그리워하신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이번 엘라콘 사신들에게 반응이 좋았던 차라며 여상히 차를 권하는 황태자를 향해 카스타냐 공작은 준비해 온 폭탄을 투하했다.
“……공작?”
바라던 대로 해주었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순진한 표정에 속이 뒤틀렸다. 그는 순하고 착하기로 유명한 황태자와 살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던 도리스를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착한 얼굴로 상대를 미치게 하는 사람. 그게 제 사위이자 이 나라의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후께서도 아드님을 그리워하시고 말입니다.”
“대공이 이번에 꽤 양보한 것을 느끼지 못한 겁니까?”
“제가 원한 것은 제가 그 귀부인의 후원자나 주군으로서 대공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청렴하신 분이시니 모르는 척하실 수 있어도 대공은 아니지요. 분명 알면서도 그리 한 겁니다.”
카스타냐 공작은 황태자가 권한 차를 술처럼 들이켰다.
“신에 대한 신뢰가 그것밖에 없으시다면, 이런 요청을 진지하게 드릴 수밖엔 없겠습니다.”
“……결국 9황자를 다시 데려오겠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말씀 주신대로 대공이 이렇게까지 양보를 해 주었는데 이번엔 다른 요청을 드려야겠습니다.”
공작은 이번만큼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확신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 전하와의 사이에서 반드시 후사를 봐주십시오.”
“!”
“올해 안으로 좋은 소식을 들을 수만 있다면, 제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사생활이 지나칠 만큼 깨끗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참았었다. 하지만 숙부를 버리지 못하는 황태자에게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도 보험이 필요하지 않은가.
“두 분 다 아주 젊으시고, 남들은 그 정도 함께 살았으면 아이 두셋쯤은 우습게 낳지 않습니까. 건강에도 문제가 없으시면서 계속 비 전하를 독수공방시키시는 걸 제국민들이 알면 얼마나 황실과 카스타냐가 우스워지겠습니까.”
“공작, 그건…….”
“카스타냐는 손이 아주 귀한 가문이니, 외손자를 보기 위해서라면…… 도리스의 남편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태자는 찻잔을 손에 쥔 채로 굳어버렸다.
“재혼은 론타에서 합법이며, 도리스와 전하의 사이에 후사가 없으니 그럴듯한 사유도 있지요.”
꽤나 위협적인 말임은 분명했다. 바르데날도의 입이 달싹이기만 할 뿐 어떤 소리도 뱉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카스타냐 공작의 말은 어찌해서든 둘이 이혼하기만 한다면, 황태자를 끌어내리고 또 다른 황자를 황태자로 올려세우겠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서쪽에서 위명이 높은 2황자 로아드네스, 혹은 현 황후 폐하의 적자인 9황자 에페로 같은 사람 말이다.
“……무엇을 원합니까?”
한참 굳어 있던 황태자가 겨우 내뱉은 말에, 카스타냐 공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숙부의 그늘에서 벗어나실 때가 되셨습니다, 전하.”
공작은 진작 이럴 것을 그동안 너무 사정을 봐주며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책사로서 번번이 서부의 앞길을 가로막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황태자의 책사로 이어져 권세를 누리게 둘 수는 없었다. 이미 오래전 황제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제거되었거나 멀리 떠났어야 할 황족.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카스타냐의 아래에 둘 수 없다면…….
“아예 손에서 놓아버리시면 가장 깔끔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