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보고 싶어서2021.12.18.
노에비안이 주기적으로 술을 진탕 마시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죽은 이후부터 계속 그렇게 마셔왔는지도 몰랐다. 사용인들에게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식료품들 사이의 고급술이 담긴 상자는 익숙해 보였고, 주치의인 스피노가 푸념하는 내용도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공 전하의 안색이 통 좋지 않던데. 일을 제대로 하고 있긴 하는 건가?”
다짜고짜 찾아간 스피노의 방에서 나는 그를 마주하자마자 탓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스피노는 무척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얼굴이 시뻘게져서 억울하다 항변할 만한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리라.
“하긴. 일을 제대로 했다면 대공비 전하께서 좀 더 오래 사셨을 테지.”
“!”
스피노는 내가 웃고 있는 얼굴을 마치 아드리엔의 시신이라도 마주한 듯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죽은 대공비의 얼굴을 이 저택에서 애니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니까.
“전하께서 계속 술과 함께 무슨 약을 드시던데. 그게 무엇인지 알겠지?”
“수, 술과 함께 드십니까? 제가 분명히 그리 드시지 말라고…….”
“무슨 약인지 안다는 뜻이로군.”
“알고 있지만, 함부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집안의 주치의로서 주군의 건강 상태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습니다.”
“그의 아내인 내게도?”
스피노의 눈이 강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내게는 내 남편 될 분의 건강을 보살펴드릴 의무가 있어. 자네는 날 도울 의무가 있고.”
“부, 부인을 존중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트로비카에 입적이 되신 게 아니니 당연히…….”
“그리 충성스럽게 굴 거라면 대공비 전하를 살리지 그랬나. 아-.”
나는 뭔가 생각 난 사람처럼 손뼉을 쳤다. 화들짝 놀란 스피노가 내게 더 주목했을 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쩌면 자네가 대공비 전하를 돌아가시게 하는 데 일조를 했을 수도 있겠어.”
“……예?”
나는 분명히 보았다. 스피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나는 자네 생각보다 아는 게 많거든. 어떻게 보면 자네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무,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부인!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니 말해. 대공 전하께서 먹는 약이 무엇인지.”
“절대로…….”
“트로비카 대공비 전하께서 병사가 아닌 독살로 돌아가셨다는 의심을 받기 전에 말이야.”
스피노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말 그대로 정말 벌벌 떨고 있었다. 주름진 이마는 물론 움푹 팬 볼품없는 뺨까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로 봐선 노에비안이 아니라 그가 더 아픈 사람 같았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대공 전하의 약은 그저 평범한 수면제입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걸고…… 의사로서 부끄러운 짓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효과가 아주 강력한 수면제이고, 술과 함께 먹으면 강력한 환각 작용을 일으킵니다. 아마 대공께서 숙면이 목적이 아니라 그 환각을 위해 약을 계속 복용하시는 거라면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인께서 좀 도와주십시오.”
“아주 심각한 문제로군. 그 상태로 업무라도 보시는 날엔 제대로 된 사리 판단이 안 되실 게 아닌가.”
스피노는 아주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동안 주군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외부인에게 발설하고 말았다는 불안감이 얼굴을 스쳤지만 내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정말, 심각한 문제야.”
내가 그리 말하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맙네. 자네에 대한 의심은 잠깐 미뤄두도록 하지.”
고맙다는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치고는, 그는 또 다른 불안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 노에비안은 요 며칠 참 바쁘게 쏘다녔다. 드문드문 마담 르블레아나 아이린에게서 오는 서신에는 노에비안이 그 가신들에게서 엄청난 압박을 받는 중이라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그들은 주로 나를 안심시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덧붙였다. ‘대공께서 생각보다 강경하시니, 아무 걱정 마시고 그가 하는 대로 따르라’고. 나는 편지들을 벽난로에 불태우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노에비안이 늦게 들어온다고 했던 날이었지만 습관이 되어 시간을 확인한 것이었다. 며칠 전 ‘아드리엔’과 만났다고 생각했던 그가 정확히 그 시간쯤에 대공비의 침실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열쇠 꾸러미를 잃어버렸다며 온 집안을 뒤집어엎었던 노에비안은 비상용 열쇠 꾸러미를 챙기고 다녔다. 나는 그에게서 훔친 열쇠 꾸러미에서 대공비의 침실 열쇠만 빼내 그날 이후 매번 그 침실에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노에비안에게서 자백을 듣고 싶었다. 블리에 아카시아가 밝히라던 그 빌어먹을 ‘진실’도,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도 실상 이 대저택의 주인이자 모든 일의 원흉인 노에비안 트로비카만 입을 열면 단번에 해결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가 술과 약에 취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대공비의 침실로 향했고, 속삭였다.
‘블리에 아카시아와 새 삶을 살아.’
‘가질 수 없었던 나는 잠시 잊고, 새로운 사랑과 당신의 행복을 찾아.’
그럴 때마다 괴로워하며 울부짖던 그가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은 듯 홀가분한 얼굴이 되면 내 속은 사정없이 뒤틀렸다. 왜 나를 배신했는지, 블리에는 누구인지와 같이 중요한 질문에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없던 그가 그 말에는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신이 멀쩡할 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부인, 마담 르블레아와 주세타 자작 부인이 오셨습니다.”
“주세타 자작 부인?”
“예.”
나는 이미 재가 되어버린 편지들을 더 깊숙이 벽난로에 밀어 넣고 손을 털었다. 마리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자, 과연 마담과 노우라가 와 있었다. 마담은 안주인의 구역인 2층에서 내려오는 나를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노우라는 정신없이 대공저를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휙 피했다.
“얼굴이 확 피셨네요, 부인. 빛이 나요!”
“마담도 참.”
“정말이라니까요? 얼른 디자인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답니다.”
노우라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마담과 내가 데뷔탕트 막바지 시즌을 어떤 드레스로 보낼지 상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담은 보란 듯이 앉은자리에서 스케치를 하며 보석을 얼마나 사용하면 좋을지 어필하기 시작했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눈에 띄게 일렁이던 노우라의 눈동자는 마담이 다음을 기약하며 저택을 먼저 떠나자 꽤 단단해진 상태였다.
“……제가 뭘 하면 되겠어요?”
늘 언짢던 기색이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다. 나라고 노우라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담의 말에 따르면 노우라는 제 남편인 주세타 자작의 막대한 치료비를 대느라 보석점을 시작했단다. 황태자비의 무시에도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가끔 비싼 보석을 사면 그것을 따라 사는 귀부인들 덕분에 보석점의 인기가 유지되어서라고. 그런데 도리스가 나를 따라 하면서, 노우라가 은근히 권하던 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노우라는 제 가문을 유지하고, 남편의 치료비를 위해서 내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그녀를 살피다가 답했다.
“알고 있는 전부를 말해요. 부인이 알고 있는 나에 대한 것. 황태자비 전하에 대한 것. 그 무엇이라도.”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던 노우라는 곧이어 평정을 찾고 이것저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최근 카스타냐 공작이 황태자에게 자신과 노에비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종용했으며, 그 강도가 이전과는 달리 아주 세서 도리스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란다. 황태자는 이전보다 자주 황태자비 궁을 찾는다고.
“제가 판단하기엔, 솔직히 대공 전하의 기반은 황실에 있는 것이고. 카스타냐 공작은 서부 전체를 장악한 대귀족이라 대공께서 아무리 유능하다 하셔도 훗날 아무런 방해 없이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로 등극하시기 위해서는 카스타냐 공작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실 거예요.”
“……황태자 전하께서, 적어도 대공 전하를 포기하는 척이라도 하셔야 훗날 황제가 되실 때 아무런 잡음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노우라는 내 입에서 그런 통찰력 있는 말이 나온 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이어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내가 대공을 위해서 이러한 것들을 묻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오랫동안 의지하셨던 대공 전하를 그리 쉽게 버리실 순 없을 거예요.”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다. 하지만 노우라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노에비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가 노에비안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나라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던 황태자가 노에비안의 뒤가 구린 비밀을 알게 된다면?’
기회만 노리고 있던 노에비안의 집무실에 들어가 그를 쳐낼 기회를 잡을 때였다. ***
“마님! 마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니?”
노에비안의 집무실을 살피기 위해 열쇠 꾸러미를 챙기는데, 요나가 급하게 나를 찾았다.
“황실 제2기사단과 수도경비대가 대공저를 조사하겠다고 정문에서 사병들과 대치 중이에요!”
“이 시간에?”
반역에 가까운 죄가 아니고서야, 대귀족의 저택을 늦은 시간에 허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건 굉장한 실례였다.
“그 쿠로세다 남작 부인 실종사건 때문이래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공저를 허락도 받지 않고 방문했단 말이야?”
“네! 집사까지 달려 나가서 지금 난리가 났어요!”
“……한번 나가봐야겠구나. 1층에서 외투를 가지고 좀 기다려주련?”
“네!”
마침 잘됐다. 사용인들의 관심이 정문으로 향해있을 때 노에비안의 집무실에 들어가면 될 테니까.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려 거울을 보던 나는 거울에 비친 창문이 뭔가 탁! 탁! 소리가 나며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곧장 다가가 창문을 열자 아래에 로아드네스가 보였다.
“아드리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고 창문을 활짝 열어주는데, 로아드네스가 벽을 타고 기어 올라와 창문으로 들어섰다.
“안녕.”
“이 침실은 어찌 알고?”
“네 하녀가 알려주던데. 왜, 이만한 아이.”
로아드네스가 제 명치께에 손을 쫙 펼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아, 나는 그제야 요나가 살짝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황실 제2기사단’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요나는 네가 이렇게 찾아올 거라곤 생각 안 했을 거야. 아니, 안 했을 거예요.”
너무 놀라 서로 존대하기로 한 걸 까먹은 게 생각나 급히 말을 고치자 로아드네스가 약간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정문에서 실랑이가 일어났다던데, 이렇게 여기로 오셔도 되나요?”
“아, 그건 이쪽 경비를 허술하게 하려 일부러 시킨 것입니다. 닐이 팔자에도 없는 입씨름을 하느라 아주 힘들겠지만.”
“이미 전하와의 입씨름으로 단련된 상태일 테니 닐 경은 명령을 아주 잘 수행할 거예요.”
사람 놀라게 해 놓고 참 태연한 말에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답했다.
“이렇게 갑자기 언질도 없이…… 어찌 오신 거예요? 대공이 저택에 있기라도 했었다면…….”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로아드네스가 잠시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