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구속해줘2021.12.22.
잠깐의 정적이 우리 사이를 휩쓸었다. 로아드네스는 내가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을 보고 있자 실수했다고 생각한 듯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부담스러운 건가?”
그렇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부담스러웠다. 왠지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졌다. 낮게 가라앉은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바닥을 울려서일까 몸이 살짝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는데 로아드네스가 나를 지나쳐 침실 문을 잠그고 돌아왔다.
“누가 들어올까 봐 말입니다.”
내 걱정과는 달리 내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 듯, 로아드네스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내게도 착석을 권했다. 한참 나를 훑어보던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미 남작 부인이 실종되기 전 두 명의 실종자가 더 있었다는 건 압니까?”
“네, 신문에서 그러더군요.”
“수도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로아드네스가 생각만 해도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다른 지방 영지에서도 여러 번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통점은 북서이든, 북동이든 하나같이 북쪽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
“내 개인적인 사견이 들어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북쪽과 관련이 있다면 대공과 관련이 있거나 최소한 그가 사건을 축소하려고 노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연쇄적인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여태 수도에서 일어난 건만 알려진 걸 보면 누군가가 은폐했다고 생각할 수밖엔 없으니 말입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깜짝 놀랐다. 혹시라도 노에비안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아니,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엮을 수만 있다면…….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번쩍 들자 로아드네스 역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공과 엮을 수만 있다면 황제 폐하께서 아무리 아끼시는 동생이라 할지라도 절대 가만 있지 않으시겠군요.”
“맞습니다.”
“그게 기회이겠고요.”
내가 비장하게 말하는 얼굴을 빤히 보던 로아드네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표적 수사는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 새끼는 그래도 됩니다.”
“물론이에요. 그런데요, 전하.”
“예.”
나는 내 공손함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진지하게 불렀다. 그는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앞으로 그 새끼…… 라든지 그런 거친 말씀은 좀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로아드네스는 곰곰이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는 듯 눈을 굴리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 살짝 우울해진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내가 대공을 안 좋게 말하는 게 싫습니까?”
“아니요! 사실…… 전하의 말투가 제게 옮겨진 것 같아요. 가끔 전하처럼 거친 말이 제 입에서 툭툭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제 하녀가 이미 본래의 블리에에게 익숙한지라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그게 더 자존심이 상한달까요.”
잠시 멈칫하며 눈을 끔뻑이던 로아드네스가 싱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고치겠습니다.”
그리고 군말 없이 그러겠다 답했다.
“특히 당신 앞에서는.”
로아드네스가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한 듯 말하자 나는 아차 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닌데.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내 머릿속은 누가 휘저어 놓은 것 같이 어질어질해 무슨 말이든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일었다.
“죄송해요.”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머리가 한쪽으로 움직이자 정리해뒀던 머리카락이 반짝이며 다른 쪽으로 쏠렸다. 나는 내 시선이 그곳으로 따라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내 입으로 ‘일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라고 해놓고 그의 말투를 지적하는 게 말이 되는가 하는 이성적인 생각이 갑자기 번뜩 들었다.
‘이런 걸 구속하는 건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잖아.’
아까부터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그게 얼굴까지 옮겨 붙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좀 헛나갔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갑자기 번뜩 떠올라서요. 가끔 이 집의 사용인들이 제가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구속해줘.”
내가 굳어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가 하는 말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한 로아드네스가 어느새 내 쪽으로 몸을 잔뜩 기울이고 긴 팔을 뻗어 내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렸다. 나는 코완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뜻하고 큰 손이 뜨거워지던 내 머리를 시원하게 식혀주듯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히려 날 좀 더 구속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사실 마음속으로 말한 게 아니라 입 밖으로 말을 꺼냈던가?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다물었다. 지금 당장 그에 대한 마음을 책임질 수도 없는데 그가 좋다고 다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로아드네스는 굳어서 입만 달싹이는 내 반응을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런 내 생각까지 충분히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분명 속마음을 들켜 부끄러워야 하는데, 가늘어지는 그의 입꼬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느라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의 따뜻한 손이 닿은 곳은 오로지 내 머리뿐이었지만 한겨울에 솜이불을 덮은 듯 온몸이 따뜻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해주면, 내가 착각하기 쉽거든.”
“착각……?”
“우리가 단순한 친구가 아닌 것 같다는 희망적인 착각.”
아아.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지긋이 내 눈을 보고 머리를 한번 꾹 누른 뒤 손을 거두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내 코에는 그의 라벤더 향이 계속 머물렀다. 이상하게 그 향이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정한 얼굴이지만 나를 집어 삼킬 것 같은 눈을 슬쩍 피하자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말해주면 자꾸 기대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이가 될지. 부인이 어떤 말로 나를 구속해줄지.”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견디기 힘들 만큼 내 몸을 다시 간지럽힐 무렵, 나는 문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여전히 날 응시하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보기 부끄러워 별다른 대꾸 없이 문을 살짝 열자 요나가 있었다.
“마님, 안 나오셔요? 집사님이 계속 재촉하고 있어요. 마님께서 나와보시라고요-.”
“아, 잠깐만!”
로아드네스를 숨겨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뒤를 돌아보는데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깜짝 놀라 그가 서 있던 자리로 가보니, 캐노피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내 침대 위에 어디서 났는지 꽃이 놓여 있었다. 더 가까이 가서 보니 겨울에 피는 붉은 동백꽃을 가지째 꺾은 것이었다. 로아드네스가 나간 듯 보이는 열린 창문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어와 커튼을 부풀렸다.
“마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이건 뭐예요? 어머 동백꽃이네! 이걸 어디서 이렇게 가지째 꺾어오셨어요, 그새?”
“……화병에 잘 꽂아줄래?”
“네, 외투는 여기 둘게요! 지금 꽂을까요?”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로아드네스가 나간 창문을 바라봤다.
‘나도 보고 싶었다고, 말해줄걸.’
두근대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눌렀다. 노에비안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 그의 집무실을 헤집어놔야 하는 상황에 이토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요즘 황태자비 궁은 무척 평화로웠다.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출입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 소식이 어느새 황궁 담을 넘어 소문이 났는지 아이린은 물론이고 노우라까지 상기된 얼굴로 도리스에게 알랑거리기 시작했다. 총애받는 황실 여인의 삶이란 이다지도 평화로운 것을. 도리스는 카스타냐의 가신들로부터 도착한 온갖 선물들을 눈으로 훑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르데날도는 여전히 ‘몸이 상할까 걱정’이라는 뭣 같은 이유로 도리스를 곱게 모셔두기만 했지만, 도리스는 이마저도 큰 발전이라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가 해가 지고 나서 황태자비 궁으로 드는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 블리에는 어떻던가요?”
블리에의 이름이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도리스를 대신해 그녀의 선물을 뜯어주던 노우라의 손길이 뚝 멎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어요 전하. 대공께서도 잘해주시는 것 같고요.”
“흠.”
노우라가 도리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흠’이라고 했지만, 노우라의 귀에는 ‘흥’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귀는 틀리지 않았다. 도리스는 황태자의 잦은 방문이 만족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블리에의 최근 행보가 조금 거슬렸기 때문이다. 분명 도리스와 카스타냐 공작의 의도대로, 블리에가 대공저에 간 것은 맞았다. 하지만 블리에가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대공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만 있는 게 얄미웠다. 말로는 자신의 편지를 기다리겠다 하지만, 굳이 제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카스타냐 공작의 입김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대공이 먼저 선수를 쳐 가짜 신분도 만들지 않고 대공저에 들어간 상태이니 말이다. 도리스의 공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제대로 알려줘야 그곳에서 충실히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일할 텐데 이렇게 행복만 빌어주는 꼴로는 부탁이나 명령을 하기에 애매했다. 눈치라도 빨랐다면 일찍이 제게 서신이라도 자주 보냈을 텐데. 마담 르블레아의 말로는 대공비가 되기 전 신부수업에 바빠 정신이 없는 데다가 대공비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는 바깥출입을 자제하라는 말을 들었다나 뭐라나. 얼른 대공비가 되어 황태자비 전하를 다시 모시게 될 날만을 기다린다느니 하는 말을 전했다곤 하지만 직접 듣는 것과는 달랐다.
“제가 블리에 님과 서신을 주고받았을 때도, 대공께서 정말 잘해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린의 해맑은 소리가 도리스의 입매를 더 비틀었다. 이름만 대공비인 채로, 카스타냐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하는 블리에 아카시아가 제 매력으로 노에비안을 사로잡았다는 첩보는 이미 그쪽 사람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입맛이 썼다.
“내게도 안부를 묻는 편지가 오긴 했지만, 그런 자세한 말은 해주지 않던데. 아마 대공의 눈치가 보이는 걸까요?”
도리스가 치솟는 짜증을 감추고 묻자 아이린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노우라는 여전히 눈치만 살폈다.
“늘 넷이 있다가 셋이 되니 조금 허전한 마음도 들고, 오늘은 블리에에게 편지라도 한 통 써야겠어요. 나도 바빠서 통 연락을 못 했는데.”
“어머, 그럼 제가 퇴궁하는 길에 전달할 테니 얼른 한 통 써주셔요, 전하.”
아이린이 방긋 웃으며 권하자 도리스가 기껍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러죠. 꼭 오늘 전달해줘요. 아이린.”
*** 정문을 점거하고 소란을 피우던 황실 제2기사단과 수도경비대는 내가 나오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선두에 선 닐을 설득하는 척, 어두워질 때까지 버텨달라 말했고 눈치가 비상한 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소란을 피웠다. 그들은 대공저의 사용인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조사를 대공저 밖에서라도 해야겠다며 임시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가스팔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게졌지만,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보고 감히 항명할 수는 없는지 절대 대공저 안으로만은 들어올 수 없다며 버티고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내가 나오던 순간부터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나는 예를 갖추는 척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얼굴을 식히고 가스팔에게 정문을 잘 지키라 격려한 뒤 돌아와 아이린이 전달하고 간 서신을 펼쳤다. [달콤함에 빠져 있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있지요. 그대가 아직도, 앞으로도 내 사람이 맞을까요? 아니라면 조금 쓸쓸할지도 몰라요.] 사용인들이 조사를 받으러 가느라 텅 빈 저택 안에서 그런 내용의 서신을 읽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다. 어쨌든 지금은 도리스를 적으로 돌리는 건 좋지 않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서신을 품에 넣었다. 답장을 뭐라고 해야 할지 골몰하는 동안 어느새 노에비안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어떤 열쇠가 맞는 열쇠인지 몰라 하나하나 맞춰보는데, 어느 순간 문이 딸깍-. 하고 열렸다. 나는 들이마시던 숨을 멈추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멀찍이서 아직 정문의 소란이 들렸다. 마침내, 노에비안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